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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 나치부역 언론인엔 '관용'이 없었다
게시물ID : sisa_10077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ulip_Mania
추천 : 22
조회수 : 74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2/28 16: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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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 나치부역 언론인엔 '관용'이 없었다
 
(중략)
1940년 히틀러 군대에 점령당한 지 4년 만인 44년 8월 파리가 해방되자 프랑스는 즉각 `정의의 법정'을 세우고 나치 부역자 단죄에 나섰다. “나라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반역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던 샤를 드골 장군의 신념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부역자 색출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99만여명의 나치협력자가 투옥되고 이 중 6700여명에게 사형, 2700명에게 종신강제노동형, 1만여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 2만2800여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또 9만5천여명에게는 부영죄형을 선고하고 7만여명의 공민권을 박탈했다.
눈여겨 볼 것은 이렇게 단죄받은 나치부역자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엄중하게 `정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지식인, 특히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법정은 언론인 중에서도 애초부터 `히틀러의 나팔수'를 자임했던 파시스트보다 독일의 지배가 확립되자 뒤늦게 나치 선전원으로 돌아선 `매춘 언론인'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다.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드골이 밝힌 `최우선 가중처벌'의 이유였다.
 
일간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주 쉬아레즈는 “프랑스를 지켜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한 기사와 히틀러의 관대함을 찬양한 기사를 쓴 대가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일간 <누보 탕>의 발행인 장 뤼세르는 신문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반민족 언론인들의 사상적 지도자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 및 재산몰수형을 받았다.
 
독일에 `간과 쓸개'를 내놓았던 <르 마탱>의 편집국장 스테판 로잔은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 밖에 독일방송의 선전문을 작성했던 폴 페드로네, 독일 점령 기간중 <라디오 파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장 헤롤드-파퀴, 36살의 작가 겸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크 등이 민족반역자로 사형대에 올랐다.
 
이와 함께 나치 찬양에 적극적·소극적으로 나섰던 언론사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독일 점령 기간중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해 폐간시키고 언론사 재산을 국유화했다.
 
그리하여 900여개의 신문·잡지 가운데 649곳이 폐간되거나 재산을 전부 혹은 일부 나라에 빼앗겼다.
 
일간지 가운데 처벌을 면한 것은 <르 피가로> 등 3곳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치점령기 동안 자진휴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킨 신문들이었다.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단죄와 관련해 <프랑스의 대숙청>을 쓴 언론인 주섭일씨는 “드골의 언론계 대숙청으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프랑스 언론은 각계 각층 국민의 의사를 공정하게 대변하는 공공성을 확보하게 됐고, <르 몽드> 같은 세계가 존경하는 신문도 언론개혁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 “프랑스의 언론인 숙청은 단순히 반민족세력의 처단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부도덕한 인간들이 언론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담고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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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1/0050000002001032921262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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