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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전우용 교수글.18년 정도는 정권을 맡겨보고 평가하는게 공평
게시물ID : sisa_11067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언파파
추천 : 15/5
조회수 : 979회
댓글수 : 29개
등록시간 : 2018/09/05 08:07:01
1963년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서울시장에 윤치영을 임명했습니다. 윤치영은 제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의 삼촌이자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5.16 뒤에는 박정희를 ‘단군 이래 최고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가 ‘단군 이래 최고의 아첨꾼’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3공화국 출범을 앞두고는 공화당 의장, 대통령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자기가 국회의장이나 총리 정도는 될 거라고 믿었지만, 박정희는 서울시장 자리를 줬습니다. 
15년 전에 서울시장 윗자리이던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박정희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건만 ‘고작’ 서울시장이라니. 윤치영은 이 ‘박대’에 ‘태업’으로 보답했습니다. 1965년, 국회의원들이 윤치영에게 서울이 너무 지저분한데 잘 가꾸지 않고 뭐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이때 윤치영은 역사에 남을 답변을 했습니다. “내가 도시계획을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지금도 촌놈들이 자꾸 서울로 밀려와서 걱정인데, 서울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면 더 밀려올 것 아니냐?”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4대 의혹 사건’ 등 쿠데타 주도 세력의 부정부패만 드러났을 뿐 별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1963년 서독 광부 파견, 1964년 베트남 파병, 1965년 한일협정에 따른 청구권 자금 도입 등을 계기로 나아지기 시작했죠. 1967년 대통령 선거를 1년 남짓 앞둔 1966년 4월, 서울을 그대로 두고서는 부정선거를 해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부산시장이던 공병 장교 출신 김현옥을 새 서울시장에 임명하고 일본에서 청구권 자금 대신 현물로 들여온 건설 중장비 400여 대를 줍니다. 김현옥에게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처음으로 불도저를 가진 시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한국에 미군 소유 말고는 불도저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김현옥은 시장이 되자마자 건설 중장비를 이용해 세운상가 건설, 강변도로 개발, 여의도 개발 등의 개발 사업을 숨 가쁘게 추진했습니다. 서울은 하루하루 눈에 띄게 달라졌고, 사람들은 발전의 ‘성과’를 직접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성과’를 내세워, 박정희는 67년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습니다.  
박정희는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 집권했습니다. 그 18년간의 변화를 모두 박정희의 ‘성과’로 돌리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박정희식 성장 정책의 부작용을 생각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쳐도, 박정희 모델을 부활시키려 했던 이명박 박근혜 10년간 경제 사정이 어땠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한계와 문제점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언론들이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성과를 언제까지 낼 거냐”며 집권한 지 1년 반도 안 된 정부를 다그칩니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한 지 1년 반 동안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파친코 사건의 ‘4대 의혹사건’이나 저질렀습니다. 그랬던 박정희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수십 년 된 경제 정책 패러다임을 바꾸는 엄청난 일을 두고는 1-2년 안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라고 난리입니다. 18년 정도는 정권을 맡겨 보고 평가하는 게, 공평한 태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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