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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오늘 강경대 열사를 추모합니다.
게시물ID : sisa_11301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제주불한당
추천 : 8
조회수 : 59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9/04/26 16:4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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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오늘 강경대 열사를 추모합니다.

공유. 권경원 (영화 <1991,봄> 감독)
· 
D+177일

28년 전 오늘 있었던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의 죽음은 
1991년에 일어난 모든 일의 시작 같아보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일의 결과였습니다.

1987년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았지만,
야권분열로 인해 광주학살자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국민들은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으나,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밀실 거래를 통한
3당 통합을 통해 현 자유한국당의 모태인
거대 여당 민자당을 만들어냄으로써 
여소 야대 정국을 역전시킵니다.

전교조 가입교사 1500여명을 대량 해고한 데 이어
216석이라는 국회에서의 압도적 힘까지 갖게 된 
신군부 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공안정국을 만들어 나갑니다.

서울경찰청과 치안본부는 이에 응답하듯
체포위주의 공격적인 시위 진압작전의 도입
신체 구타범위의 모든 제한을 풀어버립니다.
이것은 국가가 나서서 
시위 학생뿐만 아니라 전경과 의경 모두를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예고된 살인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군은 
밥은 꼭 먹고 가라는 엄마의 메모 밑에, 
'엄마, 아빠 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금방 올게요'
라고 덧붙여 써두고는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그는 
등록금 문제로 경찰서에 잡혀 있는 
총학생회장 구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시위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시위대 선두에 있던 학생 10여 명이 
교문 밖 50미터 지점까지 진출하던 순간, 
골목에 숨어있던 사복 체포조들이 
그들을 연행하기 위해 최루탄을 쏘며 뛰어 왔습니다. 
강경대 군은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다급해진 그는 갑작스러운 체포조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무작정 달려 나갔습니다.

사복 체포조들이 자신들을 향해 뛰어오던 
강경대 군을 발견했습니다. 
강군이 그들을 피해 교문 옆, 
철망이 제거된 담벼락을 넘어 학교 안으로 피하려던 순간, 
사복 체포조 한 명이 
그의 발을 잡아 담장 아래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강군을 잡아 담장 벽에 비스듬히 세워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

이어 115cm 길이의 쇠파이프로 
강경대의 가슴과 어깨를 마구잡이로 내리쳤습니다. 
또 130cm의 각목으로 왼쪽 다리를 가격하고, 
허벅지를 난타했습니다. 
또 100cm의 쇠파이프로 왼쪽 다리 부분을 다시 내리치고 
발로 배를 계속 걷어차면서 
머리를 잡은 채 경찰 진압봉으로 머리와 팔을 가격했습니다.

전경들은 쓰러진 그를 
길바닥에 그대로 두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어머니의 메모에 써 두었던 약속을 영영 지키지 못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의 시위에서의 부상은 일상이었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알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90-91년 사이에 시위도중 최루탄 등에 
실명을 한 학생들이 학교마다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시위와 상관없는 
국가의 폭력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역시 신입생이었던 저 또한 
MT답사를 위해 학교 후문을 나서던 도중
전경에게 잡혀 린치를 당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백주 대낮에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끌어내서 
마구잡이로 때리는 일이 멀쩡한 대학교 교정에서 벌어지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뒤늦은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와 켜있던 TV에서는 
강경대가 사망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화면 속 그의 사진은 저와 참 많이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

1996년 3월 11일, 
피고인석의 전두환과 노태우가 뭐라고 이야기하며 
악수를 나누던 순간 법정 뒤에서 한 방청객의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이 살인마들아, 너희들이 대통령이야? 
무슨 스타냐? 역사의 반역자들이 용서를 구해야지"

전두환의 둘째 아들 전재용이 
고함을 친 방청객의 목을 붙잡은 것을 시작으로 
세 아들이 그를 둘러쌌고, 
이내 “죽여라.”, “밟아버려.”라는 전씨 측근들의 욕설과 함께 
5-6명이 주먹질과 발길질이 그에게 가해졌습니다. 
그 방청객은 전치 3주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1991년 4월 26일 전투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한 
명지대생 강경대의 아버지 강민조 씨였습니다.

2주전 뵈었던 경대 어머님의 머리카락은 
28년 전과는 다르게 이제 하얗게 세셨습니다.

91년 당시 시위 때마다 쩡쩡하던 그의 누나 강선미가 
그 해 내내 결핵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평전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강경대의 묘역은 2014년 
광주 망월동에서 이천민주화기념공원으로 이장됐습니다.

올해 초 명지대학교 재단 측에서는 
학교 앞 도로 확장공사를 하며 학교담 길에 놓여있는
강경대의 추모동판을 없애겠다는 
계획이 몰래 세워졌었습니다.
유가족과 동문들의 외로운 싸움 끝에, 
그의 추모 동판은 교내 학생회관 앞으로 이전하기로 
협의된 상태입니다.

28년 전, 강경대의 죽음을 항의하며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외치고 또 들었습니다.

"경대는 아직 싸우고 있다."
"열사는 무슨 열사냐? 그래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 모든 말들이 똑같이 들리는 것 같은 지금.
강경대가 아닌 사람들은, 
강경대가 없는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나 봅니다.

부모님께도 다정다감한 메모를 남기던 강경대는
노트에 이런 메모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난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바르고 건강하게 자란 학생이
스스로에게 건넬 수 있는 당연한 다짐들은
지금 신입생들에겐 어떻게 읽힐까요?

강경대 군이 고교 졸업식 때 
값싸게 찍었다고 좋아하던 사진은 영정사진이 되었지만, 
얼마든지 외면이 가능했던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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