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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을보고 반성합니다.
게시물ID : sisa_11493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둥글이8
추천 : 1
조회수 : 42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2/17 09:19:42

기생충을 보고나서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기상충이 그 어떤 유명한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들보다도 사회 양극화 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고 파급력 있는 문제의식을 던져줬다. 이 영화가 우리 사회 진보운동의 고질적인 병폐와 맞물려진 반성꺼리를 제공해 줌에 사회운동 깔짝댄 사람으로서 큰 반성을 하게 된다. 
 
기생충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세상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가진 자는 악], [못 가진 자는 선]으로 획일적으로 도식화 하지 않는다. 그러한 단순화된 세상은 이상주의자들이 투사하는 가상 속에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진 자]가 선량할 수 있고 [못 가진 자]가 악할 수도 있다.  또한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밟고 올라서지만, 그 [못 가진 자]는 [더 못가진 자]를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못 가진 자]는 상실을 채우기 위해 [가진 자]의 것을 넘보지만 [더 못가진 자]와 아귀다툼을 해야 할 운명에 놓인다. 가난한 기택(송강호) 가족이 박사장 가족에 기생하기 위해 그보다 가난한 문광(가정부) 가족을 짓밟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절대 정의’와 ‘절대 선’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 삶의 다각성을 조명하지만, 한편으로 ‘사회적 양극화’와 ‘빈자의 박탈감’을 호소력 있게 묘사한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흔히 빚어진다. 사추 측의 횡포에 ‘노동해방’을 외치며 싸우는 일부 노동자들 중에서는 자신들보다 더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짓밟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비단 노동 문제 뿐만 아니라, 각종 시민사회운동, 복지, 동물권, 인권운동, 사회적 소수자 운동 부분에 이런 부조리는 총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이다.   

진보는 흔히 세상을 양분화 한다.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선악의 대립구도는 내가 싸우고자 하는 상대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가늠하여 ‘투쟁의 열정’을 쏟아 붓는데 상당한 편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나만 정의, 진리이고, 나와 다른 이들은 불의와 거짓으로 매도한 후 자기목소리만 높이는데 용의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투쟁의 방향성을 설정할 때 임시방편으로 써야하는 가상의 도식일 따름이다. 영화 기생충처럼 현실은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에 실패할 때, 가열 찬 결의는 허공의 헛발질만을 반복케 한다. 

우리의 삶은 무지개 스펙트럼처럼 다층적이고 변화무쌍한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하여 이분법의 흑백논리는 우리의 정신을 실재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현실과 괴리된 이상의 구름 위에 우리의 존재를 위치시킨다. 이 때문에 우리가 정의의 깃발을 휘날리며 진군하면 할수록 우리의 존재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일부 진보운동이 세상을 너무 극단적으로 이분법화하고 ‘정의와 선’을 앞세우고 무분별하게 진군?한 결과 감당할 수 없는 갈등과 분열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영화가 현실 같고, 현실이 더욱 영화 같은 희한한 세태를 보게 된다. 영화 속에는 다면적인 인간 군상의 모습이 어우러지는데, 현실 속에서는 선과 악의 두부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할 때는 적을 구분하고, 엄숙해야 할 때도 있고, 형식을 차리고, 지시적 언사도 써야 한다. 하지만 시종일관 내가 주장하는 것만 ‘정의와 선’이고 내 주장과 조금만 틀리면 말꼬리를 잡아서 타도의 기치를 높인다. 더군다나 그러한 강압에 ‘진보’의 미명이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큰 아이러니이다. 그렇다보니 진보는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갈등하고 사분오열되어 서로들 자기만 잘났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 중 상당수는 아무런 울림없는 메아리를 끊임없이 쏟아내는데 이는 희망의 메시지라기보다는 ‘공해’에 가까울 때가 많다. 진보적 세상을 위한 이상은 너무 고결하여 관심을 가지고 다가온 ‘하찮은 대중’, ‘수준 낮은 민초’들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고, 자기들 끼리의 살풀이 동아리 모임 수준으로 전락되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몰라주는 ‘*같은 세상’을 한탄하며 서로 자위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러한 교조적 진보주의를 치유할 처방전이 바로 ‘기생충’이다. 

기생충은 일명 진보운동을 한다는 이들이 주장하는 바대로의 계급구조의 도식을 무시한다. 사회적 약자를 ‘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강자를 ‘악’로 묘사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을 약자와 강자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사회적 약자가 악하고 사회적 강자가 선할 수도 있음을 묘사한다. 또한 세상을 약자와 강자의 투쟁이 아닌, 다양한 힘 스펙트럼의 역동적 아귀다툼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전 세계에 ‘사회적 양극화’, ‘빈자의 박탈감’ 문제를 호소력 있게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통속적 진보?의 뒤통수를 때린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타고 전 세계 영화 수입이 2천억에 다다르며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한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기생충의 아케데미 수상 자체가 사회적 양극화와 빈자의 박탈감 문제를 조명할 ‘정치적 파장’의 결과이고 새로운 원인이 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사회 평론가들은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이유 중 하나를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찾고 있다. 미국인 상당수가 트럼프의 독단적 국수주의와 일방주의에 지쳤고, 이러한 세태가 반영되어 아카데미 회원들은 문화적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 기생충을 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듣보잡 대통령이 미국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있다 보니, 아카데미 회원들은 이에 맞서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비영어권 영화에 작품상을 쥐어 줌으로 미국의 일방주의에 재동을 걸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카데미상 수상이 대망의 ‘결론’으로 끝맺음 되며 무대의 막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시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오는 11월에 시행될 미국의 대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다. 트럼프가 부추긴 ‘양극화 문제’가 대선의 주요 이슈가 될 것이란다.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미국 CNBC 보도이다. 한편의 영화가 세계의 문화 – 정치에 이렇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전례가 있었는가. 

‘사회적 양극화’, ‘빈자의 박탈감’, ‘약자가 강자로부터 착취 받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아주 호소력 있고,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다룬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져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아카데미 영화제에도 그런 영화는 부지기수로 출품되었었고 이번에도 출품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통속적 도식을 깬 영화 기생충이 오히려 전 세계의 ‘사회적 양극화 문제’와 ‘빈자의 박탈감’ 을 대변하는 엄청난 문화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니 이는 참으로 멋진 삶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조리한 자본주의 체제 전복과 혁명을 직설적으로 설법하는 것보다,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어우러짐을 보여준 것이 우리가 적응해 있는 세상에 대한 적극적 자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 자체가 대단한 역설이다. 이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대중을 가르치는 것보다, 적나라하게 세태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혁명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헤게모니를 대중에게 지시적으로 주입해서는 안 되고, 세상을 보는 다양한 가능성을 대중에게 제공해 스스로 판단할 여력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생충은 이렇게 우리네 삶의 한 자락의 비밀을 드러내 보여주며 진보적 일방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가진 것을 내려놔야 새로운 것이 쥐어지고, 낮은 곳을 향하다보니 어느새 높이 와 있고, 뒤로 물러나니 세상이 넓어지는 인생사의 비밀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목소리 높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자기 욕망을 투사한데로 단순화 하지 않고, 폭넓은 스팩트럼으로 조명하여 인간성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탐구하려 했던 개척자 봉준호의 정신. 그 정신이 결국 세상에 깊은 울림과 넓은 파장을 만들어 내며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진보들 반성의 포인트가 있다. 
진보들 사이에 사람을 가르고, 사상을 가르며, 선악 이분법 도식을 만들어내고, ‘약한 자 = 절대선’, ‘강한 자 = 절대악’으로 등치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있다. 자신은 약하기 때문에 ‘절대 선’하고, 그 때문에 ‘정의의 완장’을 차고 나아가면 무슨 주장을 해도 된다고 여기며, 자기 주장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은 타도의 대상으로 만드는 진보적 교조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 사회의 상대성과 다원성 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악이고 불의이며 타도의 대상이다. 진영논리라는 절대 종교로 무장해 빚어내는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한 정체된 정신이 만들어내는 독단과 폭력에 스스로 면죄부를 줄 권능까지를 부여했으니 파쇼와 구분되지 않는 애매한 경계에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자신들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쌩떼를 쓰는 것에 ‘약자의 권리 투쟁’의 미명이 붙었으니 폭주하는 화물차는 제동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  ‘정의’의 수식만 붙으면 무슨 행패라도 용인되는 형국이다. 각종 시민 사회운동, 복지, 인권운동, 사회적 소수자 운동 부분에 만연되어 있다. 심지어 이러한 우려를 말하는 것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들이 과연, 남들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세상에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다층적 역동성을 발견해 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오히려 기생충 속에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가 선하게 묘사되지 않음에 불쾌해 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터이다. 

이렇게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배려하지 않으며, 인간미가 빠지고, 그럴싸한 이상과 말잔치만 난발하여 대중을 쫓아내는 운동이 고립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고립된 섬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싸워대고 있으니, 이는 ‘인간성’이라는 대양이 얼마나 폭넓고 역동적인지를 바라볼 시야를 잃은 이들이 필연적으로 다다르는 아비귀환의 장이다. 

일명 진보들이 서로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입장이 다른 진보들끼리 머리빡 터지게 싸우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라치면, 기택(송강호)가정과 문광(가정부) 가족이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반지하의 삶을 벗어나려다 지하에 갇히고, 지하의 삶에서 무덤으로 향하게 되는 가엾은 인간군상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거든, 세상의 모든 것을 선악으로 구획 짓는 조잡한 이분법의 도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네 삶은 그리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끝으로 오해 말았으면 싶다. 이는 어떤 진보를 비판하기 위함보다 내 자신에 대한 자아반성에 가까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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