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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미·중 전쟁>, 오판과 충돌 그리고 대치 (좋은방송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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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계룡산곰돌이
추천 : 0
조회수 : 4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7/25 22:54:28
[6.25 한국전쟁 70년 기획]
<1950 미·중 전쟁>, 오판과 충돌 그리고 대치


■ 연출 김형석
■ 글·구성 윤영수
■ 방송일시  <1950 미·중전쟁-오판>을 시작으로 
<1950 미·중전쟁-충돌>, <1950 미중·전쟁-대치>가 
2020년 7월 9일 목요일 밤 10시부터 3주간 방송된다.

경제·무역 갈등과 군사·안보 분야의 긴장, 최근 가치충돌로까지 이어진 미·중간의 신 패권 경쟁, 그 시작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가을부터 1953년에 걸쳐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과 중국이 충돌했던 전쟁, 이 전쟁은 트루먼, 맥아더와 마오쩌둥 등 미·중 지도자의 대결이자, 군 지휘부의 치열한 전략 전술의 대결이었다. 미·중 충돌로 한반도는 국제 질서의 각축장이 됐다. 한반도의 정전 체제를 만든 미국과 중국, 이 두 큰 힘이 충돌하며 일어난 전쟁의 여진은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현재진행 중이다. 2020년 한반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1950년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미·중간의 전쟁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해본다. 

■1950 미·중 전쟁 
1950년 6월 27일, 미국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참전했다. 미군 연인원 178만 9천여 명이 참전했고 9만 2천여 명이 부상, 3만 6천여 명이 전사했다. 중국 역시 1950년 10월 25일 1차 공세를 시작으로 7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펼쳤으며, 전쟁 기간 중 최대 122만여 명의 중국군이 참전했다. 전쟁으로 중국군 20만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13만여 명이 전사했다(한국 측 추정).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이 오랜 기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미군과 중국군의 격돌을 미·중 전쟁의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1950 미·중전쟁 1편> - 오판
1950년 당시 냉전의 최전선은 독일과 대만. 그러나 전쟁은 한반도에서 발발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 그 원인에 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자리 잡고 있다. 전쟁 발발 전,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인천상륙에 성공한 맥아더는 설령 중국군이 개입해도 “미군이 완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1950 미·중전쟁 1편-오판>에서는 양국의 참전 여부와 국제질서, 전략전술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중국, 양측의 치명적인 오판을 들여다본다.


“그들(미군 정보부)은 크리스마스 때는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중국군은 감히 올 수 없다.고 말했어요.”

-조지 울프 미 공군 조종사



1949 미국의 대 소련 전쟁 계획, 그 내용은?


국제정세에 변화가 일어나며 국가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낀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예상한다. 한국전쟁 발발 전인 1949년, 미국은 대 소련 방어선을 구축한 전쟁계획 (‘OFFTACKLE’)을 세운다. 방어선 내 속한 국가들의 방위를 미국이 책임지겠다는 건데 한반도는 이 방어선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 1950년에도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의 전쟁계획(‘SHAKE DOWN’)은 이어진다. 미국의 핵전력에 기초한 전쟁 계획을 들여다본다.


고트발트에게 고백한 스탈린의 전쟁 전략


전쟁 초기, 미군이 연이어 전투에 패배하자 중국은 조기 참전을 희망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요구에 응하지 않다. 중국이 전쟁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왜 중국의 조기 참전을 지지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에는 스탈린이 미국을 아시아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1950년 8월, 스탈린과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고트발트 사이에 오갔던 전보를 통해 스탈린이 전쟁에서 얻고자 했던 전략적 이익과 그 의도를 살펴본다. 



「미국이 현재 극동의 문제에 정신이 팔려 
유럽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국제적 권력 균형 선점에 좋은 기회다.」

-1950년 8월 27일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쓴 편지 中-


중국 지도부의 중국군 만장일치 출병 결정, 그 이유는? 
전쟁 초기부터 상황에 따라 참전과 파병 보류를 반복해온 중국. 이들이 최종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원인을 연구해 온 베이징대 김동길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중국 당안관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최종 출병결정 이유가 “싸우지 않고 북한 북부 지역을 확보”하여 “국방선을 압록강에서 평양 이북지역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국방선 무혈확장’에 있었다는 것인데.. <1950 미·중전쟁> – 오판에서 중국 당안관 자료를 통해 본 중국 참전 결정의 과정과 중국의 최종 참전 이유를 알아본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원, 
정치국 전원, 그리고 정치국 후보위원. 
중국 지도부 전체가 다 참여했다고 보면 되고 
전원이 거기(출병)에 동의했다고 보면 됩니다.’   
            
-김동길 베이징대 역사학과 교수

미국과 중국 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점철된 <1950 미·중전쟁> - 오판은 
오는 7월 9일 목요일 밤 10시 KBS 1TV를 통해 방송된다.


■<1950 미·중전쟁 2편> - 충돌



1950년 11월 말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 영하 30도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미군과 중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세계 3대 동계전투 중 하나로 꼽힌 장진호 전투. 미 제1해병사단이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은 7개 사단의 중국군에게 포위당해 2주간 격전을 벌인 전투다. 1950년 가을부터 1951년 봄까지 반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벌어진 미·중 간 대규모 충돌을 장진호 전투와 군우리 전투를 통해 들여다본다. 

“갑자기 언덕에서 수천 명의 중국군이 나오더니 
우리 수송대 중앙을 쳤어요. 
그렇게 우리 소대를 잃었죠.”

- 짐 졸리 미 해병대, 장진호 전투 참전
 
“한 팀에 단 하나의 겨울 신발이 보급됐습니다.
여름용 신발을 신고 눈 속을 걷는데 편할 수 있겠습니까. 
부상자의 70%가 동상이 걸렸고.
일부는 눈밭에서 얼어 죽기도 했습니다.”

- 니잉덴윈 중국군, 장진호 전투 참전


신 제작방식으로 구현된 1950 한국전쟁 



총 6개월의 제작 기간, 3D SCAN을 이용한 캐릭터 제작과 실시간 게임엔진(언리얼) 연동 가상 카메라 시스템(Virtual Cam-Vcam)을 통해 실사 촬영과 흡사한 다이내믹 촬영기법으로 장진호, 군우리 전투 장면을 재연한다. 또한 그간 흑백으로만 볼 수 있었던 전쟁 당시 영상을 Deep learning을 통해 컬러로 복원했다. 그리고 전쟁을 둘러싼 주요 인물(맥아더, 마오쩌둥, 스탈린, 트루먼 등)의 당시 모습을 디지털 휴먼(Photo-Realism Digital Human)으로 구현해냄으로써, 각 인물의 주요 발언과 상황을 보다 현실감 있게 전달한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미군과 중국군의 격돌을 다룬 <1950 미·중전쟁> – 충돌편은 
오는 7월 16일 목요일 밤 10시 KBS 1TV를 통해 방송된다.


■<1950 미·중전쟁 3편> - 대치
전선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사이, 미국과 중국은 정전협상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52년 1월, 포로 문제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협상은 또다시 결렬되고 한반도는 이념전과 심리전의 무대가 됐다. 전쟁 종결을 둘러싸고 미국에서는 대논쟁이 벌어졌다. 군비와 경제력 증강을 위한 주안점을 ‘유럽’에 둘 것인지, ‘아시아(중국)’에 둘 것인지를 두고 미 지도자들 사이 주장이 엇갈렸다. 1950년 12월, 아이젠하워가 NATO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맥아더는 해임되는데... 트루먼과 맥아더를 주축으로 펼쳐진 미국의 대논쟁을 따라가 본다.      

1950 전쟁 이후 세계는 빠르게 냉전 구도로 개편되고, 미·중 충돌은 1964년 중국의 핵실험을 둘러싼 미국의 공격 계획과 1965년 발발한 베트남전까지 이어지며 기나긴 대치에 들어간다. 현재까지도 인도태평양전략과 일대일로 정책으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미·중. 전쟁의 결론은 나지 않은 채, 더 많은 과제를 남긴 70년 전 미·중 전쟁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해본다.


“스탈린은 조선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이게 되면 
유럽에 대한 압력을 쇠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포로 문제에 대해 전혀 양보하지 않고 
미국과 끝까지 가겠다고 한 것이 전략이에요.”

- 주젠룽 도요가쿠엔대학 교수


“지금은 냉전 시 마오쩌둥이 펼쳤던 
혁명 전략을 실행하지 않지만,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주요 전략적 경쟁자입니다. ”

- 윌리엄 스톡 조지아대 명예교수


출처 - http://program.kbs.co.kr/1tv/culture/docuinsight/pc/board.html?smenu=71ccb3&bbs_loc=T2019-0296-04-850025,read,,23,943961


1편 - [미·중전쟁 1편 오판] 1950 한반도. 미국 참전 연 178만 9천여 명, 중국 1953년 당시에만 최대 122만여 명 참전, 전투기간 2년 10개월. 한반도에서 벌어진 미·중 전쟁 무엇을 남겼는가? 새로운 국제 질서를 위한 미국의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2차 대전 후, 세계 질서는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었다. 서태평양 마샬 제도의 비키니 섬, 미국은 이 아름다운 섦을 핵 실험장으로 삼았다. 1946년부터 58년까지, 모두 예순 일곱차례의 핵실험을 진행했다.

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296&program_id=PS-2019201637-01-000&sect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sub_code=08#more

2편 - [미·중전쟁 2편 충돌] 1950년 11월 말, 영하 40도의 혹한 속 서부전선부대와 접촉하기 위해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를 이동하던 동부전선의 미 제1해병사단이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고 출병한 중국군 7개 사단에 포위된다. 한반도에서 펼쳐진 미군과 중국군의 2주간의 접전. ‘세계 3대 동계전투’이자 ‘미군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를 통해 1950 한반도에서 일어난 미·중간의 대규모 충돌을 들여다본다.

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296&program_id=PS-2019201636-01-000&sect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sub_code=08#more

3편 - [미·중전쟁 3편 대치]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북한군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미국 National Archive에 소장돼 있던 해당 영상은 이제껏 사진으로만 공개됐던 1963년 9월 5일 군사분계선 0769지점의 합동 실측 영상이다. 미군과 한국군, 북한군 실무자들이 군사분계선에서 탁자를 둔 채 마주 앉아 합동 실측에 관해 논의하고, 군사분계선을 명확히 긋기 위해 초단파 거리측정장치를 작동시키는 모습이 담겨 있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군사분계선 합동 실측 영상을 볼 수 있다.

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296&program_id=PS-2019201639-01-000&sect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sub_code=08#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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