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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바라는 이들의 마음가짐
게시물ID : sisa_11605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둥글이8
추천 : 6
조회수 : 77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0/08/07 12:24:06

‘이상은 높게, 그러나 실천은 작은 것부터’
이 말은 ‘스피노자’가 했던 말이지만, 이후 수 많은 역사 현장의 혁명가들이 마음 속에 담고 실행했던 투쟁의 지침이었다. 아무 준비없이 다짜고짜 거창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성급하고 섣부른 활동은 그 이상을 만들어낼 기반마저 파괴하는데 반해, 실질적 성과를 만들어 내는 구체적 실천은 그 이상으로 향하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권투를 잘 하려고 무조건 주먹 뻗는 연습만 해서는 영영 아마추어로 전락하게 된다. 진정 권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먹이 아닌 발을 먼저 단련해야 한다. 스탭 밟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서 기본을 갖춰야 한다. 급한 마음에 눈에 보이는 성과부터 얻으려고 서두르다간 낭패를 범하기 십상인 것이다.

대중운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당장 어떤 효과를 내기 위해 선무당 사람 잡는 과오를 범하며 이곳저곳 들쑤셔 놓아서는 안 된다. 대중들은 각자 자기들의 그릇이 있고, 그 그릇이 조금씩 채워지게 독려 하는 것이 진정한 활동가의 자질일 것이다. 그런 과정과정을 거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충분한 ‘동력’이 비축된 후에라야 그런 사람 하나하나가 동시에 움직이며 시류를 바꾸는 움직임이 가능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자기 이상과 가치를 상대방에게 들이댄다. 상대의 입을 강제로 벌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막 쏟아 부어 넣는다. 상대의 가치와 취향, 능력은 아랑곳 않는다. 이에 상대가 반사적으로 거부할라치면 ‘너도 똑같은 적폐다’고 손가락질 한다. 대중운동이라기 보다는 독재자가 국민들을 총칼로 탄압하며 그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다. 그런 이들이 권력을 쥐면 독재자가 된다.

개혁은 남에게 강요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자율성을 최고조화 하고 그 각자의 에너지가 누적되어 ‘변화의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그 뇌관을 때려 폭발하는 힘으로 사회의 도약을 이뤄내야 하는 것이 ‘개혁의 이치’이다. 좌우 앞뒤 살펴야 할 것이 많다. 그런 하나하나의 과정과정을 거쳐 내부의 충분한 ‘동력’을 비축 해야만 세상의 변혁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집집마다 찾아가 전단지를 뿌리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지루하고, 자존심 상하며, 힘든 과정의 연속이다. 그것이 어렵기에 사람 많이 다니는 번화가 사거리에 스피커 세워놓고 ‘당신들은 왜 그렇게 아둔하냐!’는 소리만 줄기차게 쏟아낸다. 불만이 느껴지면 막 쏟아내고, 지적질하고, 진저리 치고, 배척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음에 만족한다. 권투를 배우러 체육관에 가서 다짜고짜 관장에게 주먹부터 휘두르며 한판 붙자는 식이다.

이런 행동은 오히려 개혁을 이뤄내기 위해 비축된 동력을 누수시키는 역할을 한다. 엘리트 주의에 무장된, 얄팍한 활동으로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들일수록,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자기 자신의 미숙함 때문임을 전혀 모르고, 남 탓하고 세태를 푸념하는 것으로 다시 자신의 나르시즘을 충족하고 있다. 팔에는 스스로 채워준 ‘진리와 정의’의 완장이 있기 때문에 추호도 자신이 잘 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고가 잦은 동네 번화가에 위험 방지턱 하나 설치하게 하는데도, 동네 사람들 서명 받고, 시의원들 설득하고, 행정기관에 탄원서 내며 죽을 똥을 싸야 한다. 그런데 ‘사회 정의’를 말 한마디로 해결한다. 천지를 창조하기 위해 6일간 고생하셨던 하느님 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다.

이런 이들일수록 ‘구체적 활동’ ‘구체적 실천’에는 고민하지 않고, 거창한 이상과 가치에 침잠하는 특성이 있는지라, 자신이 뭔가 세상의 변화를 위한 어떤 구체적 변화를 만들어 내려는 생각보다는 남이 해 놓은 결과물을 가지고 가타부타 비판을 하고, 다른 사람의 가치와 이상에 평점을 내리는 일에 집중한다. 이상과 가치가 높다보니, 그 높고 고매한 정신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말’을 쏟아낸다. 이상이 높을수록 실천을 하기 힘들고, 구체적 실천도 할 이유 없으니, 악순환이 증폭된다.

그 이상과 가치가 너무 고매하다보니, 밤새 동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혁명’을 논하기는 할망정, 다음날 아침에 동네 돌아다니면서 전단지 뿌리며 사람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실천의 노고가 필요하고, 가오가 상하며, 활동의 결과물이 보이지 않지만, 고매한 이상과 가치를 떠벌리며 ‘한심한 사람들’ 손가락질 하다 보면, 그 순간 내 자신이 세상의심판관이 된 듯한 희열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옳다. 단, 상대방이 자기 생각대로 순식간에, 이유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뀐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 ‘옳음’은 성립된다.

문제는 그렇게 손안대고 코풀려는 생각을 상대방도 똑같이 하고 있다. 하여 이런 이들끼리는 풀리지 않는 분열과 갈등의 연쇄고리에 빠진다. 서로 손가락질하면 ‘니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외친다. 이런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을라 치면 마치 퇴마사들이 서로 염력 싸움을 하는 듯 느껴진다. 서로를 향해 되지도 않을 주문을 걸며 자기 꼭두 각시를 만들어 내려 발악을 한다.

이렇게 극도로 관념화된 유아론적 나르시즘이, ‘진리와 정의’의 기치를 내 걸고 대중운동, 사회운동에 퍼져 있다. 보수와 진보, 그리고 진보 내의 다양한 분파들에 이러한 성향이 퍼져 있다. 그렇기에 허고헌날 싸우는 것이다. [종]으로 보면 ‘극보수와 보수, 진보와 극진보’ 식으로 나눠져 보이지만, [횡]으로 보면 [남 탓 하는 관념적 이상주의자들]과 [자기 반성에 기반한 실천론자들]이 구분된다. 진보나 보수 가리지 않고 그렇게 부류가 나눠져 있다. 보수가 없어져야 살맛나는 진보세상이 오는 것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 속의 ‘남 탓하는 이상주의’가 사라져야 살맛나는 세상이 도래한다.

사회 변화는 말로, 지적질로, 자신의 가치와 이상을 상대방에게 강요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이해와 가치, 해석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 다짜고짜 ‘적폐’ 타도하듯 나서면 안 된다. 각자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세상을 산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유아론'에 빠져 있기 때문에 상대를 강제해서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불법-폭력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맞서서 박터지게 싸워야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다양한 이상과 가치, 문화, 해석의 충돌 문제를 '불법-폭력'의 문제로 환원해, 쥐잡듯 서로 남탓하며 분열과 갈등을 고조해서는 안되고, 그러한 미숙함을 '진보'의 미명으로 포장해서도 안된다.

진정 사회 벽혁을 위한 대중 운동을 하고 싶다면, 예민하고, 사려 깊은 마음으로 각각의 마음을 변화시킬 길을 열어줘야 한다. 상대에게 강제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떠 먹여 줘서는 안 되고 상대가 그것을 스스로 떠 먹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그 선택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어떤 이해의 씨앗을 전할 수는 있을 망정, 그것을 싹틔우는 것은 전적으로 그 본인의 실존의 판단임을 알아야 한다.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자 갈망하는 이들의 갖춰야할 기장 기본적인 자세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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