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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없이 살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1번 뽑은 이유 적어봅니다.
게시물ID : sisa_11996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7분03초
추천 : 12
조회수 : 840회
댓글수 : 33개
등록시간 : 2022/03/15 14: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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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는 상식, 정의, 공정으로 대표되는 쪽을 없는 사람이 뽑는 이유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글을 적다 보면 개인적인 정보와 본인이 숨기고 싶었던 정말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지만 그 없는 사람이 받았던 혜택과 적지만 사회적인 복지를 설명하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네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자기소개 먼저 하자면 일단 저는 지금 40대이고 오유에서 몇 번 적었지만 경상도 토박이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다들 아시죠?ㅎㅎ
민주당 지지하면 빨갱이 되는 지역에서 한평생 싸우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아빠는 제 나이 2살에 알콜 중독으로 엄마를 너무 괴롭혀서 저러다 사람 하나 죽겠다 싶어 동네 사람들이 보다못해 동사무소에 건의해서 병원에 넣어버려서 아빠 도움은 살면서 받아본 적이 없어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 하자면 혹시 유니세프에서 광고하는 아프리카 아이들 돕자는 광고 속에 등장하는 지붕 너덜너덜해서 겨우 비만 막아주는 집들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제가 어릴 때 그런 집에서 살았다면 믿으실까요?
지금은 많이 바꿨는데 경남대 뒤쪽 산이 있던 곳으로 그런 달동네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못사는 집이 우리 집이었어요.
그래도 평생 착하고 바르지만 억척스럽게 살아 온 엄마 때문에 그 엄마를 보고 자식 3명 건사하기도 힘들텐데 진짜 대단하다며 동네분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금전적인 부분만 빼고 먹는 거, 입는 거 그리고 동사무소 복지과 사람들까지...
엄마가 새벽 5시에 출근해서 밤 10~12시 돌아오고 그랬는데 그 때문에 실제로는 안 되는 건데 저와 동생을 봐 줄 사람이 없어서 동사무소 복지과 사람들이 보육원에서 같이 교육받을 수 있게 해줬었어요.
그러다 오후 늦게 언니가 데리러 오면 집에 가고...
그러다 초등학교를 가죠.
이틀 전인가... 맹물에 고춧가루 풀어서 라면 반쪽 넣어 먹었다는 댓글을 달았는데 그건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에요.
그리고 80년대에 초등학교엔 왕따라는 건 있을 수도 없었는데 제가 얼마나 가난했으면 그걸로 왕따를 딱 1년 당했었어요.
아직도 기억 나는 게 그때 학교에서 우유 먹을 사람 조사하는데 선생님이 저를 조용히 불러서 너는 돈 안 내도 되니까 우유 먹을 수 있다고 한 이야기를 어떤 남자애가 듣고 반 아이들에게 가난해서 쟤는 우유 공짜로 먹는다고 놀리고 그랬어요.
그래도 전 시대를 잘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게 저를 왕따 시켰던 애들도 그냥 머리 한 대씩 쥐어박고 점심 먹을 때 혼자 먹는 정도로 끝났었고 학년 바뀌고 그 애들과 반이 달라지니 언제 그랬다는 냥 아이들과 자연스레 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4학년 때 엄마가 거창할 것도 없던 밥 반 김치 반 도시락까지 못 싸줄 정도로 힘들 때 그 이야기를 알고 학교에서 저와 제 동생 도시락을 싸줬었어요.
2교시 끝나고 교무실에 도시락 가져다 놓으면 선생님들 점심 준비하던 분들이 저와 제 동생 도시락을 싸주셨거든요.
그때 선생님들이 대견하다면서 머리 쓰다듬어 주고 도시락 챙겨주던 어머니들이 밥 꾹꾹 눌러 담아 주셔서 그거 남기면 집에 가서 먹고 그랬어요.
그리고 자잘하게 동사무소에서 쌀이나 3만원, 5만원이고 때 되면 챙겨주는 그 돈이 우리 가족에서 진짜 큰 힘이 되었었어요.
그리고 중학생 되면서 그 달동네에서 창원으로 이사 오면서 처음으로 보일러가 있는 단칸방에 살게 돼요.
그전까지는 연탄 집이었거든요.
그리고 중학교 다니면서 햄, 소시지 같은 인스턴트 반찬을 처음 접하게 돼요.
창원에 잘 사는 애들 많더라구요.ㅎㅎ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친구들 도시락 반찬 제가 다 먹어서 너랑 같이 점심 안 먹겠다. 선언까지 듣고 또 혼자 먹게 돼요.
그래도 또다시 시대를 잘 만나 그런 저를 보듬어 준 친구들이 생기죠.
중학교는 진짜 신나게 놀고 여전히 우리 집은 생활보호대상자라 [의료보호]를 받으며 병원 가는 건 걱정 없이 다녔어요.
물론 큰 병 걸렸으면 큰일 났었겠지만 엄마가 부지런히 산이고 들이고 다니며 뜯은 제철 나물들을 먹으며 커서 그런지 감기 이상의 큰 병치레 없이 살았어요.
이때 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서 치킨이나 돼지고기는 1년에 한두 번 정말 큰 경사가 있을 때나 먹는 일이었고 소고기는 구경도 못해 봤어요.
그리고 대망의 IMF 터지고 고등학생이 되죠.
제일 재밌는 시기였지만 제일 상처도 많았던 시절이었던 거 같아요.
몸 갈며 쓰리잡 뛰면서 우리를 키우던 엄마가 20여년 넘게 일하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잘렸고 퇴직금은 고사하고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나왔어요.
언니가 있었지만 나와 동생은 어리고 엄마가 일은 안 하면 당장 생활이 안되는 시기였는데 그때 엄마가 울던 모습은 흐릿하지만 기억이 나요.
그리고 2년 뒤 언니가 만 18세 이상이 되면서 집에 가장 노릇 할 수 있는 사람 생겼다고 생활보호대상자에서도 탈락해요.
엄마가 그 이야기 듣고 시청 뛰어가서 담당자 바짓가랑이 붙잡고 울며 사정하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네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 당시에 창원에 임대아파트가 큰 게 있었는데 홑 부모에 엄마가 자식도 많고 직장도 없이 일용직 뛰면서 키우니 생활보호대상자에서는 탈락했지만 임대아파트 입주 조건은 되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작지만 엘리베이터에 화장실이 딸린 집에 살게 돼요.
그리고 이젠 의료보호가 아닌 의료보험으로 병원에 가면 돈을 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동안 당연했던 게 아니게 된 순간이죠.
저는 IMF 시작과 동시에 고등학생이 된 사람이라 수학여행도 되게 특이하게 가게 됐어요.
3월 입학하는 그달부터 3만원씩 모아서 1학년 2학기 10월에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그 낼 돈이 없었기에 엄마에게 말도 안 했고 안 갈거니까 돈 안 냈었어요.
그리고 수학여행 2주 전, 담임선생님이 수학여행 안 갈 사람 앞으로 나오라길래 나갔는데 저 포함 6명이나 안 간다고 나와서 담임이 내일까지 생각해보라고 하대요.
저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없어서 내일 다시 말해야지 생각하던 와중에 반장과 부반장이 저를 살짝 부르네요.
3만원씩 50명 쯤 되는 사람이 8개월을 모으니 이자가 제법 됐었나 봐요.
반장과 부반장이 서로 입 맞춰서 담임 모르게 돈 내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하대요.
저는 괜찮다고 그러다 담임한테 들키면 큰일 난다고 사양했지만 자기들이 돈 관리하고 있고 담임 그동안 관심도 없었다고 그리고 수학여행 안 간다고 나간 애들이 다 일진인데 너 괜찮겠냐고 안된다고 너는 가야 한다고 오히려 저를 설득했어요.
그래서 평생 기억에 남을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가게 돼요.
그 와중에 엄마는 10년 넘게 알고 지낸 동생한테 평생 모았던 돈 천만원을 사기당하고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에게도 나가서 알바라도 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요.
그렇게 20대를 맞이하고 대학은 갔으나 새벽 4시까지 알바하며 대학을 다닌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고 학사경고 맞아 휴학하고 일에 전념하게 돼요.
그런데 제가 가진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 졸업생도 아니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르바이트나 계약직 일 밖에 없더라고요.
주유소 새벽 알바, 호프집 서빙, 프랜차이저 햄버거집, 그때 막 생기기 시작한 테이크아웃 커피숍, 마트 일일알바, 백화점 단기알바, 검찰청 서류정리 알바 등 그때그때 돈 되는 건 다 하려 했지만 IMF 이전처럼 무기한으로 일 할 사람을 구하는 곳이 거의 없었어요.
그리고 2002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이때 공공근로라는 게 생겨요.
이게 얼마나 좋았냐면 하루 8시간 1주일 5일, 최대 11개월까지 할 수 있는데 한 달 쉬고 다시 11개월 할 수 있었던 일이라 엄마같이 저소득층에 당장 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말정말 좋았던 일자리였어요.
일하다 엄마가 다쳐서 한 달 정도 쉬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때 엄마가 쉬게 되면 다음번에 안된다고 이거 유지해야 된다면서 또 우시길래 제가 2달 하고 마무리 지었던 적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도 20대 초라 길거리에서 쓰레기 줍고 포댓자루 나르고 하는 일은 도저히 부끄러워 못 하겠더라구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에 공공기관에서 공공근로 노동자 쓰겠다고 해서 도청에서 일하게 됐어요.
나이 많은 분들이 많아서 어린애가 부끄러울 법도 한데 열심히 한다고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귀여워해 주며 먹을 것도 많이 주셔서 그때 도청에서 8개월 일하면서 살이 5kg이나 졌었어요.
그리고 이명박이 당선되어요.
제가 일하던 도청부서가 사회장애인복지과였는데 그때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유시민 장관께서 마지막으로 내려준 일이 저소득층 연탄값이라도 주려고 각 시군에 인원 조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그 일을 받은 주사님이 안타까운 어투로 없는 사람들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이러시네. 하면서 한숨 푹 쉬셨거든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공공근로를 할 수 없게 됐어요.
공공근로가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만 8시간, 주 5일 11개월 이 모든 게 단기 아르바이트 형태로 바뀌고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중이에요.
그런데 다행히 정말 엄마를 잘 봤던 주변 지인 분 중 한 분이 대기업 계약직 자리를 제안해주셔서 거기서 열심히 또 일을 할 수 있게 돼요.
그런데 2년 후, 잘려요.ㅎㅎㅎ
정말 열심히 일하고 초반 실수 두어번 빼곤 실수 한번 없었고 ERP로 바뀐 시스템을 계약직 중엔 내가 제일 잘 썼고 나중엔 신규 계약직들 들어오면 공채들이 나에게 넘겨서 교육해 달라고 할 만큼 열심히 했는데 정직 전환하면 돈 많이 든다고 잘랐어요.
그렇게 제 나이 30살을 맞이하게 되죠.
이렇게 되니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모았던 돈으로 졸업 못한 대학이나 졸업 하자라는 생각으로 7년만에 복학하게 돼요.
남은 학기 마무리 지으니 32살이네요.ㅎㅎ
이젠 진짜 졸업 후가 걱정이었는데 제 사정을 안 한 교수님이 대학원 진학하면 연구소 자리 널렸다는 말에 혹해서 대학원을 가요.
그런데 박그네가 당선되어요.
그리곤 국립연구소로 가던 지원금들이 엄~~~청나게 삭감 됩니다.
알바를 병행하며 대학원을 다니다 보니 3년 만에 졸업했는데 교수님도 난감해 하면서 연구소에서 아예 석사 자리를 내주질 않는다. 나더라도 남자만 찾는다는 답변을 들었어요.
순간 교수님을 원망했으나 어쩌겠어요.
선택은 내가 했으니...
고민이 깊어 가던 와중에 친구가 국비교육을 추천해줘요.
그래서 알아보니 이명박 시절과 많이 달라져서 친구와 같은 내용을 듣고 싶어도 8개월에서 6개월로 교육 시간도 하루에 8시간에서 6시간으로 그리고 지원해주던 금액도 80에서 40으로 다 줄었더라고요.
친구도 당황해서 자기 때는 안 이랬는데 이거 왜 이렇게 됐지? 라며 자기가 교육받은 곳에 전화해봤더니 정부에서 보조금 다 줄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당연히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비 지원으로 교육 듣고 일자리 알아보려는데 이젠 나이 때문에 지원해도 해도 떨어지기 바쁘네요!!
그렇게 3개월 허비하다 이러다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서 시작한 알바로 아직도 연명하고 있긴 해요.
그러던 중 나를 아~주 많이 이해해주는 비슷한 처지의 남편 만나 결혼도 하고 소소하지만 남편 벌이로 저축도 하고 며칠 전에 적었지만 오로지 우리 손으로 모은 돈 천만원이 생겼어요.
집도 절도 없고 엄마가 한평생 온몸 부셔져라 일해서 겨우 마련한 13평짜리 엄마 소유의 아파트에 얹혀 살고 있지만 딱 이렇게만 살았으면 했어요.
진짜 딱 그런 마음뿐이었어요.
 

제가 구구절절 이렇게 글을 적은 이유는 상식과 정의, 공정한 세상이 아니면 그 여파는 정~~~말 없는 사람들에게 직격타로 다가옵니다.
주위에서 나 좀 고생했다 나 많이 힘들게 살았다는 사람들은 많으나 우리 엄마처럼 몸 부수면서 온갖 고생 다 하면서 산 사람 아직 못 봤습니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삼 남매 중 하나도 안 버리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 나라에서 해주던 작지만 어떨 땐 컸던 복지 때문이었어요.
어릴 때 동사무소에서 주던 그 3만원을 받아 들면 엄마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때는 저도 과자 하나 사달라고 말 할 수 있었어요.
요즘 세상에 그렇게까지 힘든 애들이 있을까? 그런 집이 있을까? 싶죠?
아직도 정말 많아요.
오히려 지금 애들이 더 힘들 수도 있어요.
나야 진짜 시대를 잘 타고 나서 가난한 게 놀림을 받았지만 한순간이었고 오히려 없는 나를 배려해줬던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다 같이 잘 살았으면 해서 내가 투표로 누군가를 뽑을 땐 상식, 정의가 먼저였어요.
많이 가진 자들은 내일 당장 전세금 올려 줄 몇십만원이 없어서 길거리 나 앉아야 하나 그런 걱정은 없잖아요.
100원이었던 새우깡 하나 먹고 싶어서 혹시나 누가 떨어트린 돈 없나 싶어 운동장 모래판 뒤집고 다니진 않잖아요.
생활보호대상자 떨어져서 시청 담당자 바짓가랑이 붙잡고 있는데 그 담당자가 비웃는 눈빛 안보잖아요.
그러니까 없는 사람들 생계까지 위협하는 그런 선택은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고 해줬으면 해요.
의료보호로 대표되는 공공재 지원 이거 진짜 없는 사람들에게 너무너무 절실한 거예요.
누군가는 그러겠죠.
60대 이상 없는 사람들도 다 윤 뽑았다고...
그 사람들은 정말 몰라서 그래요.
그러니 아는 사람들 만이라도 생각을 깊게 해주세요.
그리고 있으면서도 1번 뽑아 준 분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 5년 정말 무난하게 지나갔으면 하고 매일 저녁 자기전에 간절히 기도하고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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