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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폭력
게시물ID : sisa_1339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연.
추천 : 2
조회수 : 47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11/13 15:48:16
6, 7년전에 갔었던 평화에 대한 포럼에서 독일에서 온 한 소설가는 '좋은 전쟁'에 대해 얘기했다. 그의 부모는 유태인이자 공산주의자로 나치시대를 살고있었고 그 앞에 있는건 당연히 죽음뿐이었던 상황에서, 연합군의 전쟁은 '좋은 전쟁'이라 해석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을 바탕으로 그는 NATO와 독일군의 코소보전쟁 참전을 지지했고, 그 결과 전쟁주의자라는 악명을 얻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가 평화에 대한 포럼에서 이 얘기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평화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현의 문제입니다. 원칙적으로 평화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라크를 침공하고 있는 저 부시마저도 평화를 얘기합니다. 필요한 것은 원칙과 원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얘기입니다."

그 당시의 내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평화를 얘기할때 폭력에 대한 결벽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게 일반적이었고 나 또한 그랬으니까.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수전 손택은 이렇게 얘기했다. 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사람들은 이미지에 익숙해져서 무심히 넘기거나 그저 연민할 뿐이라고. 그러나, 시뮬라시옹(=시뮬레이션=가상현실=현실은 힘을 잃었고 자가복제를 반복하는 이미지들이 현실을 대체했다는 이론)은 거짓된 이론이라고. 그 이론은 이미지의 범람에 무력해진 제1세계의 지적유행에 불과하고 실제 투쟁과 전쟁의 장인 제3세계에서 그 이론은 모욕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녀는 행동했다. 세르비아의 폭탄이 떨어지는 코소보에 3년간 있었고, 국제적 관심을 요청했으며, NATO의 코소보 전쟁 참전을 지지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급진전시켜보자.
이름은 기억안나지만(망할!) 알카에다의 한 대변인의 독특한 이력이 기사화 된적이 있다. 그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인텔리로서 학생일때 사람간의 폭력은 물론 동물에 대한 폭력조차 혐오했으며 현재에도 채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반응은 웃음이었다. 테러집단의 주요인물이 폭력을 싫어하고 채식을 한다니.
하지만 거기엔 모순이 없다. 모든 종류의 테러는 폭력이자 동시에 '저항'임을 이해한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기독교+백인의 세계체제에서 이슬람은 항상 배제되어왔고 억압되어왔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팔레스타인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현실속에 이슬람의 지식인은 어떤 길을 택해야하는가. 그 대변인의 극단적 선택은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선택에 모순이 없음은 이해할 수 있다.

알카에다가 혐오스럽다면 티벳을 얘기해보자. 달라이 라마는 성인으로 칭송받지만 그가 티벳 독립을 위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하는가를 묻는다면 참으로 난감해진다. 그는 티벳의 무장 독립단체(=테러단체)를 비판하고 자제시키려 하지만 정작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민중봉기에 함께하지도 않는 자의 말뿐인 평화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에게 종교적 존재로서 정신적 지주라는 것 이외의 실질적 가치가 존재하기나 하는가. 그런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결국 평화가 실질적 고민없는 공허한 말이라는 것을 재확인해줄 뿐이다.

폭력에 대한 결벽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장하는 평화는 공허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80년대의 광주 시민군이 했던 행동은 폭력이지만 동시에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라고 판단한다. 그것과 같은 이유로 나는 시위대의 폭력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그걸 싫어할때는 내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어쩔 수 없는 경우나,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때다.
예를 들어, 2008년의 촛불은 폭력이 배제되어야 했다. 언론과 대중은 시위와 폭력의 연계에 상당히 민감한데, 촛불은 바로 그 언론과 대중에 호소하는 대중운동이었으므로. 다수로 청와대 앞까지 걸어가면 대통령이 gg치는건 옛날 얘기다. 지금은 소위 '여론'이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이 폭력적인 사회는 시위에 대해서는 남다른 결벽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위는 폭력을 필요로한다. 대중이 폭력에 대한 결벽을 요구하기에 앞서,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고립된 시위대에게 남은 선택은 두가지뿐이다. gg치고 흩어지거나 진압에 맞설 준비를 하거나. 그렇기에 오늘도 수많은 철거민들은 잊혀진 투쟁을 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투쟁이지만 잊혀진 투쟁.

여기까지 오면 폭력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목적이 옳은 것인가, 목적을 이루는데 폭력이 수반될 수 없는가에 대한 판단과 선택의 문제. 여기에서 길을 잘못들면 적군파(옛 서독의 극좌테러단체)가 탄생한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고민없는 평화는 공허할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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