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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LA 폭동
게시물ID : sisa_1855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연.
추천 : 5
조회수 : 69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4/07 10:15:02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C%8A%A4%EC%95%A4%EC%A0%A4%EB%A0%88%EC%8A%A4_%EC%82%AC%ED%83%9C

로스앤젤레스 사태(1992 Los Angeles Situation, LA Situation) 또는 한흑 갈등(Korean - African conflicts), 로스앤젤레스 폭동( 1992 Los Angeles riots, LA riots)은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에 발생한 미국내 한국계 이민자와 흑인간의 갈등이 물리적 사태로 확산된 유혈사태이다.

개요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백인 교통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하여 흑인 사회는 흥분하였다. 당시 로드니 킹은 백인 교통경찰관들을 용서하였으나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캔음료수를 절취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와 실랑이 끝에 주먹으로 안면을 수차례 강타당하자 두 씨가 라타샤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그 소녀가 사망한 것이 흑인 사회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사태였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일반적으로 "로스앤젤레스 사태"보다는 LA 폭동이라고 한다.

로드니 킹 사건

1991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백인 교통 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수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폭행으로 보이는 무차별 구타가 있었다. 이 경찰관 폭행 사건은 피해자인 로드니 킹이 백인 교통경찰관들의 집단구타로 평생 청각장애인이 될만큼 심각한 사건이었는데도[2] 법정에서 배심원들에 의해 가볍게 처리되었다.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로드니 킹을 집단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면서 WASP(백인,앵글로 색슨,개신교)로 설명될만큼 미국 사회의 특권계층인 백인에 비해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3]에 젖어 잠재적 폭발 요인을 안고 있던 빈민층의 흑인 사회(라틴계 청년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가 폭발, 시위가 번졌고 급기야는 6일간의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특히 이들은 며칠 뒤인 3월 16일 흑인 빈민 소녀가 한국인 출신 이주민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사살당하자, 흑인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코리아타운을 주로 약탈 타깃으로 삼아 방화를 하는 등 치안부재의 무법천지를 만들었다. 이때의 약탈·방화로 LA 한인 사회는 정신적·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50~60명이 사건 중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백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었다.

한국계 이민자와 흑인 사이의 갈등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ABC방송과 LA지국인 KABC TV에서는 1991년 3월 16일 흑인 빈민 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하여 폭동을 악화시켰다. 언론공세로써 흑인들의 백인들에 대한 분노를 한국인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두순자 사건이란,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한국 출신 이민자 두순자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것으로 오인해 말다툼과 몸싸움 끝을 한 끝에 결국 두순자가 권총을 꺼내 라타샤 할린스를 총격해 라타샤 할린스를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두순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 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결국 이 판결로 인해 흑인들의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고, 결국 로스앤젤레스 사태에서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이 흑인들의 주요 폭행 대상이 된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사태는 주로 흑인들이 한국인과 기타 아시아인을 향해 진행되었다. 흑인들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들에게 무차별 구타와 집단 난타, 투석, 총격을 가했고 격앙된 한국인 출신 이민자들 역시 흑인들을 발견하는 족족 끌어다가 구타, 폭행을 가하였다. 한흑 갈등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한다.

한국계 이민자의 대응

사건 당시 미국 경찰은 한인 상점이 몰려 있는 지역에서 효과적인 폭동 진압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한국계 이민자들은 상점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이는 미국 현지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경과

1992년 5월 1일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출동한 것을 계기로 4.29 폭동은 진압되었다. 그 뒤 한인 교민 사회와 흑인 사회에서 발생한 각종 재난에 서로 도와줌으로서 관계는 서서히 개선되어갔다. 한흑 갈등의 와중에서도 한국인 출신 입양 아들을 보호한 한 흑인 남성의 기사가 언론으로 보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요즘 도를 넘은 글이 자꾸 올라오길래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시라고 올렸습니다.
불체자 문제나, 치안 문제 같은건 아무리 맘에 안들어도 법의 테두리안에서 해결해야합니다. 지금처럼 제노포비아 부추기고 자경단 조직하자느니 얘기하다가는 뭔가 계기만 생기면 이렇게 되는거 순식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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