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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중근의사 의거 기념일 입니다. 기억해주세요!!!
게시물ID : sisa_4480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삼류천사
추천 : 5
조회수 : 241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26 13:32:43




안중근 의사 하얼빈 기차역에서 의거한 지 104주년을 10월 26일 맞이합니다.
여러분 안중근 의사 의거를 기억하시나요? 그 분의 애국정신과 평화사상을 기억하십니까?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 있는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본의 정치가이자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이 사건은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안중근 의사는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평화론자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도 안중근 의사의 올곧음을 잘 나타내주는 명언입니다.

<출처: 구글이미지>

안중근 의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회복운동, 교육운동, 국채보상운동, 의병활동, 집필활동, 그리고 하얼빈 의거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던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과 굳은 결의를 본받아 먼 후세까지 안중근 의사의 독립정신을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독립정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안중근 의사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고 조국이 주권을 회복했을 때 고국으로 이장하라. 나는 천국에 들어가서도 다시금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생각이다.”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와 같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던진 안중근 의사의 독립정신을 되새겨 봅시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먼저 국가독립의 쟁취로써, 국권회복을 위해, 안중근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그리고 사회정의의 실현으로써, 민권과 자유가 신장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백성들에게 폭정을 일삼는 정의롭지 못한 국가권력은 물론, 정교 분리를 주장하며 독립운동마저 파문으로 금했던 종교권 위에 맞서 과감히 항거하였습니다.


<출처: 한국경제>

언제나 동양평화를 외쳤던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에 이어 만주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으며, 옥중에서 순국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동양평화의 근본정신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국가독립, 사회정의, 동양평화 정신은 민족자존, 민주, 통일 정신으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그럼 104주년을 맞이하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할까요?




1905년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을 지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의 철도 문제 및 러일간의 경제 현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재상인 코크흐체프와 양자간 회담을 갖기로 하고 중국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하고 회담을 위해 러시아측에서 특별제공한 특별열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던 한국 청년 안중근도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며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기차역 검문을 받을 때 일본인이라 위장하고 기차역에 입장하였습니다.


<출처: 구글이미지>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과 러시아인, 중국인들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경호를 위해 러시아군 헌병 및 군인들이 호위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을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 깃발과 일장기를 흔들며 양국 수뇌를 환영하였습니다. 


<출처: 구글이미지>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의 면상을 직접 본 적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있는 이토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의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백발의 늙어보이는 남자가 바로 이토임을 인식하여 품속에 있는 권총 육혈포를 준비하여 이토를 향해 조준하게 되고 이토가 헌병들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이토를 향해 첫 발을 쏘게 되었는데 바로 이토의 몸을 관통하게 되었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2,3발을 추가로 발포함에 따라 이토는 결국 총탄에 맞아 땅바닥에 쓰러지게 되었고 이토를 보호하기 위해 나온 일부 일행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혔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출처: 구글이미지>

안중근은 즉시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기차에 호송되어 응급치료를 받던 중에 숨이 끊어졌습니다.


<출처: 뉴시스>

안중근 의사는 체포 후 뤼순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가 재판을 받은 후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서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거사 이후 하얼빈역에서는 의거의 현장을 나타내주는 도형 표시가 있으며 이토의 사망지점과 안중근의 의거지점 사이에 정확히 간격을 두고 도형표시를 하여 그 당시의 일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출처: bnt뉴스>

을사조약 체결 이후 나라를 잃게 된 슬픔 속에 이루어진 의거. 조약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라는 원흉을 한국인 안중근 의사가 저격함으로서 민족의 정의와 자존심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침략행위를 막아내려는 안중근 의사의 투지와 의지를 알리기도 한 사건이었습니다. 안중근 정신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염원, 먼 후세까지 계승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는 정보, 대한민국정부포털(http://korea.go.kr)에 있습니다.




[출처] 안중근 의사 의거 104주년을 기리며|작성자 펀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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