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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돌아본 아버지의 당시회고
게시물ID : sisa_6075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홍진
추천 : 5
조회수 : 4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8/15 15:24:25
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
일기장에 회고록 비슷하게 적어놓은
긴글에서 그당시 부분만을 옮겨적습니다.
옛날분이라 맞춤법의 오류가 있으나
수정않고 그대로 옮깁니다.
아버지뿐아니라 당시를 살던 젊은이들의
고달팠던 삶의 아주 일부분이라도 같이 느껴보았으면
하는 의미에서 올리는 글이니 다른 오해는 없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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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2차대전이 벌어져 온세상이 불안한 상태에서
학교에서는 공부보다도 군사훈련이 주가 되어 언제든지
일선에 나갈 준비를 하고있었다.
겨우 중학5학년을 졸업하고 징병으로인해 군에 입대하게
되고 일본 마이쓰루라는 해군기지에서 3개월 훈련을 마치고
출동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출신이라해서 소대장으로 임명을 받았고
그때 전쟁은 종반에 들어서면서 일본본토까지 미군폭격으로
심한 폐허가 되고있었다.
사람목숨이 파리목숨보다 더 해푼 그시기에
내조국도 아닌 일본을 위해 죽는다는것이 정말 원통하고
분한 일이였다. 그럼으로 살려고 하는 생명을 헛되게 할수없어
탈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던중 내소대원 10여명이 먼저 집단탈출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관계로 헌병대에 끌려가
많은 고문과 인간이하의 기합을 받고 계급장까지 몰수당하고 하급졸병으로
강등당하고보니 더이상 기다릴수없었다.
 
밤12시경 높은 담을 뛰어넘어 들로 산으로 무작정 뛰었다.
때는 3월이었기에 산에는 소나무만 싱싱하였고 풀들은 시들어 있었다.
아침이슬을 흠뻑 맞고보니 몸은 추워서 떨리고 적막과 같은 고요와
두려움이 앞을 가린다.
장미가시와 명감나무 가시에 찔린데가 아프기 시작했고
앞일을 생각하니 애처롭고 막연하기만 했다.
마침내 탈출에는 성공한 셈이였다.
누구나 신념만 있으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수있는
의지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협박과 공포속에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어가고있는 현실에서 더이상 기다릴수 없었기에
탈출을 했었던 것이다.
낮에는 산에서 자고 밤에만 걸어 무작정 남쪽으로만 내려왔다.
내가 입대할 당시 교복을 입고갔기에 학생으로 가장하고 여로는
계속되었다.
몇일동안 먹지못해 아사직전에 한농가에 들렀더니
다행이도 우리교포를 만나 배불리 밥을 얻어먹고 돈까지
주었기에 다시 길을 떠날수있었다.
겨우 나고야라는곳까지 왔으나 배도 고프고 돈도없어 더이상
갈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곳 군용비행기공장에서 일하면 도리어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게되었고 나는 내발로 그곳을 찾아갔다.
돈벌겠다고 속아서온 사람들과 강제징용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심한 노동으로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매일 미폭격으로 주변이나
시내가 쑥밭이 되고 고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죽게될판이였다.
그곳 비행기공장에는 수천명의 여학생들이 강제동원되어
일하고 있었다. 미폭격으로인해 수맣은 학생들이 희생이 되었고
나역시 여러번 비행기로부터 비오듯 쏘다지는 기관포 세례속에서
간신히 살아남기도 했다.
우리 노동자들은 매일 시멘트 콘크리트 공사와 방공호 터널파기등
중노동의 연속이였다.
오늘도 일터에서 중노동을하고 숙소에 돌아와보니
내가 비밀리에 고향형님께 보낸편지의 답장이 와있었고
거기에는 일본에서 살고 계시다는 사촌누님의 주소도 적혀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그곳을 몰래 빠져나와 기차로 누님집으로 달렸다.
가는도중 공습경보가 나면서 기차승객들에게 들판으로 피하라는 것이였다.
숲속에 엎드려 하늘을 쳐다보니 수백대의 미폭격기가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날아갔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그비행기들이
내가 일했던 비행기공장을 완전 폭파시키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었다는 것이였다.
내가 그날 떠나지 않았으면 나또한 희생물이 되었을것이다.
어렵게 도칙한 누님집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다 싸놓은
상태였다. 보름동안 대기하고 배편을 겨우 구하여
구주시 선창가에 왔으나 배가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것이다.
구주시내는 폭격에 폐허가 되고 여기저기 굶어서 죽은 사람들이
까맣게 썩어있어 코와 입에서 구더기가 보기 흉하게 나돌고 있었다.
우리는 그시체들옆에서 3일간 기다림끝에 기적적으로 배에 탈수 있었다.
 
새벽에 부산에 도착하고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달렸다.
때는 7월이라 밤에 집에들어가니 온식구들이 뜰평상에 앉아 저녁식사
중이였다.깜짝 놀라며 모두들 나를 반겨주었고 내가 죽은줄만
알았다는 어머니말씀에 더욱 눈물이 났다.
그동안 헌병대와 경찰들이 나를 잡기위해 수차례 다녀갔다는말에
고향의 정다움과 포근함을 느끼기도전에 근처 대흥사 북암 동굴로
다시 피신을 하였다.
피신생활 1개월만에 뜻밖에 우리나라가 해방이 됐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하산해보니 온거리는 축제의 물결속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끝내는 일본이 항복하고 만것이었다.
동구밖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며 만세를 부르고있던
어머니를 끌어안고 실컷울었다.
 
출처 아버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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