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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노제에 다녀왔습니다.
게시물ID : sisa_699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날았다곰
추천 : 2
조회수 : 4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09/05/30 18:31:21
(글이 많이 깁니다. 용서해 주세요. 말을 짧게 하는 능력이 없어서..)

생각이 많은 어제였습니다.

뙤약볕에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수 십만의 인파.
어차피 사람이 많아 운구 행렬을 직접 볼 수도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모두들 그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을 겁니다.
저처럼.
그냥 집에서 편안히 TV보면 될 것을.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바보였습니다.
조금 모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전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비오듯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던 한 할아버지의 지친 모습을 보았습니다.
구부정한 허리로, 걸음도 온전치 못하면서 무얼 보시겠다고 자꾸만 앞으로 나가시던 하던 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양산을 받쳐 들고 살이 탈까 전전긍긍했을텐데, 어제따라 무방비로 앉아있던 아가씨도 보았습니다.
반팔도 더운데, 굳이 검은 정장과 넥타이를 차려 입고 묵묵히 고개 떨군 한 청년도 있었습니다.
학교에 앉아 졸고 있어야 할, 교복입은 학생들도 매우 많이 보였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앞 사람에게 앉으라고 소리치는, 몸이 불편한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안은 채,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계신 젊은 엄마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바보였습니다.
조금 모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형화면으로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전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조용했습니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수 십만의 인파가 모인 광장이 쥐죽은 듯 조용한 모습을 상상이나 하실 수 있나요?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 놓길 잘했습니다.
전화가 오는 내내, 진동 소리가 너무 커서 주의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최소한 제 주위에, 제 시야에 전화를 받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명박이 헌화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헌화할 때 빼곤 말이죠)

영결식이 끝나고, 노제가 끝난 후, 사회자가 소리쳤습니다.
"... 사랑합니다!" 라고, "..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그러자,
불혹을 넘긴 아저씨도,
노무현 전 대통령님보다 훨씬 연장자로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울먹이며 노래조차 따라 부르지 못하던 어떤 아가씨도,
사회자를 따라 소리쳤습니다.
사랑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전 목소리가 갈라져 차마 따라 소리칠 수 없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들리는 함성은 울부짖음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울부짖음은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속으로 읊조려도 되는 고백이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모두 바보였습니다.
조금 모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제가 끝난 후, 운구 행렬을 따라갔습니다.
(그 사이에 전경 버스가 광장을 다시 봉쇄하려고 했다더군요)
묵묵히 따라가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제서야 통화를 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간혹 KBS 기자, 카메라를 보면 흥분하기도 하고, 유시민 의원을 보며 힘내라 응원도 보냈습니다.
일부는 더 쫓아가기도 했다던데, 대부분은 서울역 앞에서 멈춰서 한 쪽 방향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대형TV화면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속보들이 날아들고 있던 터였습니다.
간혹 동영상도 보여주더군요.
다들 처음 접하는 영상인 듯, 훌쩍거렸습니다.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전 이미 보고 또 봐, 외울 정도였는데, 그 분들은 처음보는 분들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모두 바보였습니다.
조금 모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청 앞 광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벌써 전경들이 광화문 가는 길을 막고 있더군요.
하지만 사람들은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무언가 안타깝고, 아쉬워 보였습니다.
행사는 끝이 났는데, 그들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모두 바보였습니다.
조금 모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전 1시간쯤 전경들 앞에서 그들의 표정을 쳐다보다가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

바보였습니다.
누굴 닮았는지는 몰라도 다들 바보였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누가 알아준다고 거기 땡볕에 나가 있었던 걸까요.
그런다고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팔과 콧잔등이 빨갛게 익어가며 앉아 있었던 걸까요.

어떤 이는 일주일 내내 검은 옷을 입고,
어떤 이는 즐겨하는 취미 생활도 잠시 접고,
어떤 이는 웃는 것 조차, 맛난 걸 먹는 것조차 꺼려했던 걸까요.

누가 알아준다고.

전국적으로 수 백만의 사람들, 모두 바보였습니다.
누굴 닮아 바보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추모하는 방송사들은 하나 같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의 정치 실험과 개혁은 미완에 그쳤다고.

하지만 전 거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의 재임 당시 경제는 기초가 튼튼해졌고, 규모면으로도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정치는 새로운 탈바꿈을 시도했습니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는 수 백, 수 천만의 바보들을 남기고 간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그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 갔습니다.
다만,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니, 깨닫지 못하셨던 모양입니다.
아셨다면,
아셨다면,
그렇게 가진 않으셨겠죠?

남겨진 숙제가 많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은 듯 싶습니다.
누구 말대로, 이제 집에서, 직장에서 고인의 뜻을 기려야 할 듯도 싶습니다.

그러나,

못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석될 거라 생각했던 그리움은 여전히 진하디 진합니다.

그래서 이 글도 마치질 못하는 모양입니다.

요점이요?
그냥 그랬다는 겁니다.
어제 노제에 다녀왔는데, 할 말이 있는데, 아쉬운데, 그냥 그랬다는 겁니다.

...

일주일이, 그냥 꿈이었으면 하는, 저녁입니다.
꿈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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