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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과 빠가사리
게시물ID : sisa_937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좌회전
추천 : 5
조회수 : 930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0/11/22 15:52:49
얼마전 조사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자유주의적'으로 평가받은 
김규항씨가 1999년 씨네21 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실었던 글입니다. 

요즘 체벌금지, 교사에 대한 폭행 관련해서 말이 많은데 1993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저로서는
전적으로 공감했던 글이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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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과 빠가사리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년 전 어느 날, 3학년 P가 '영감'(교련 선생)을 폭행했다. 총검술 수업 중에 '통제'에 따르지 않던 몇몇을 영감이 불러내어 기합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P가 목총으로 영감을 친 것이었다. 체육 수업 중이던 나는 그 일을 목격했는데, 영감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해 있고 P는 여남은 명의 급우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있었다. 한참 후 P는 갈비 두 대가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고 학교는 P의 갈비가 되붙기 전에 그를 학적부에서 파냈다. 3학년 대표 몇몇이 영감의 집을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했고 영감은 다시 총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9년 전 어느 날, 나는 '빠가사리'(수학 선생)가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찼다. 급우들을 대신하여 한 짓이었지만 와장창 문짝이 넘어가면서 유리 조각이 튀고 사위가 정적에 휩싸이자 나는 모든 게 내 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먹과 발은 물론 걸레 자루, 걸상까지 동원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니 진짜 안 빌래." 빠가사리는 무조건 빌 것을 요구하며 나를 때리고 자빠트렸지만 나는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동작을 거듭할 뿐이었다. 그것은 전투였고 수백 개의 눈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맞서 칠 수 없다면 그저 버텨서라도 이겨야 했다. 수업 시작종이 두세 번쯤 더 울리고서야 그 지루한 경기는 끝이 났다. 탈진한 빠가사리가 내일을 기약하며 복도 끝을 돌아 나가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피가 고인 입안에서 살점들이 돌아다니고 교실 바닥이 파도처럼 넘실거렸지만 나는 녀석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녀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가와 피를 닦아주거나 회칠갑이 된 교복을 털어 주었다.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선가 학생의 뺨을 수십 차례 때리던 선생을 학생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잡혀가는 일이 일어나 세상이 무너지는 '교권'을 한탄하고 있을 때, 나는 20여 년 전을 추억했다. P는 선생을 팼고 나는 교실 문짝을 찼지만 그 차이가 몰매와 박수라는 결론의 차이를 낳은 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별명의 차이, '영감'과 '빠가사리'의 차이에서 나온다. 학생들에 의한 선생의 별명은 괜스레 착안되는 게 아니며 매우 긴 시간적 공간적 경험의 공유에 의해 만들어진다. 선생의 별명이란 대개 그 선생의 인간적인 등급인 것이다. 영감은 총검술이나 가르치는 시시한 존재였지만 매우 기품 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빠가사리는 3학년 수학을 맡는 실력자였지만 악취가 나는 사람이었다. P가 아니라면 누구도 영감을 때리지 않았겠지만,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빠가사리가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찼을 것이다.

선생이 학생을 때릴 권리를 '교권'이라 부르는 일은 폭력으로나 권위와 가치를 유지하려는 파시즘이다. 교권이 '사랑의 매'를 전제로 한다 해도 그 매가 사랑의 매인지 아닌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역시 학생이다. 급우가 맞는 과정을 지켜본 학생들이 경찰을 불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매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20년 전 선생을 때린 급우에게 몰매를 놓은 학생들과 19년 전 선생이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찬 급우에게 박수를 보낸 학생들, 그리고 오늘 어느 교실에서 한 선생을 지켜보는 학생들은 전적으로 같다. 20여년 전 학생을 때리던 선생과 오늘 학생을 때리는 선생이 전적으로 같듯이 말이다.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학생의 인생을 그르치는 일이 되는 마당에, 선생이 단지 선생이라는 이유로(영감이든 빠가사리든) 똑같은 권위를 부여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져야 할 일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권위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선생이라는)과 인간(학생이라는) 사이의 인격적 질서이며, 지켜야 할 건 '교권'(선생만의)이 아닌 '인권'(선생과 학생의)이다. 

후일담 : 졸업 이듬해, 그러니까 17년 전 어느 날, 나는 버스에서 빠가사리와 마주쳤다. 그를 발견한 내가 그래도 은사라고 다가가자(순진한 건가 노예근성인가) 빠가사리는 황급히 버스를 내려 도망쳤다. '교권'을 곱게 보기엔, 나는 너무 치명적인 경험을 가진 셈이다. | 씨네21 1999년_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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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론 그사이 세상도 변하고, 학생들도 변했겠지만 
저는 "따져야 할 것"은 "권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사이의 인격적 질서"라는 말에 공감하는데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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