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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당시 시민군의 무장투쟁 사례
게시물ID : sisaarch_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lidarite
추천 : 7
조회수 : 86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0/27 00:45:19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뒤로 마산에서는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마산경찰서 무기고에서 수류탄 4개가 탈취되고, 경찰서장실 앞뜰에 수류탄이 투척이 되어 마산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 11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결국 마산 지역 시위는 총격전 양상까지 발전했습니다.

 

4월 19일 서울에서는 경찰이 경무대에 몰려든 시위대에 발포를 했으며, 오후 2시 경찰이 경찰서 무기고에 육박하던 시위대에 대해 발포를 가해 시위대 8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때부터 시위대는 경찰로부터 무기를 빼았기 시작하여 19일 오후 4시 동대문 경찰서에서 최초의 총격전이 일어났고,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파출소를 대부분 불태우면서 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을 탈취했습니다.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도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무장한 시위대는 의정부 무기고로 이동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지만 자정무렵 계엄군이 출동하자 고려대 뒷산으로 후퇴했습니다. 20일 새벽까지 고려대 부근에서는 경찰과 시위대 간의 총격전이 계속됐습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나서도 시위는 진정되지 않아, 26일 오후 7시 인천에서는 파출소가 파괴되고 시위대가 무기고에 칩입했으며, 27일 새벽 경북 김천에서 군중이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칼빈총 7정 권총 1정 탈취했습니다.

 


4월 11일 마산 시위와 4월19일, 4월20일 양일간의 무장항쟁 사례

 

"이날 현장조사에서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짝이 파괴되고 수류탄 1~3개가 없어진 사실이 밝혀졌으며 그 중 1개는 1960년 4월 11일 밤 데모 대원들이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음이 드러났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1300209103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4-13&officeId=00020&pageNo=3&printNo=11695&publishType=00010 

 

마산 시위는 폭동과 총격전 양상으로까지 발전, 사망 8명, 부상 72명, 검거된 인원만도 253명에 달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42600329203001&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0-04-26&officeId=00032&pageNo=3&printNo=13717&publishType=00020

 

오후 2시 경찰무기고 앞에 몰려있던 데모대는 차차 흥분상태가 고조되자 무기고 안으로 육박하기 시작했다. 이 때 무기고안에는 M1소총 64자루와 실탄 4만7천44발, 카아빈 3백36자루와 실탄 6천3백74발이 들어있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5240020920400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5-24&officeId=00020&pageNo=4&printNo=16506&publishType=00020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기동화된 이들 무장데모대원들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무렵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었다. 오후 6시40분경 소방차와 트럭등에 분승한 데모대원들이 종로3가를 지나다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 때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장갑차 2대와 경비경찰관 23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때 이곳에서 쌍방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으나 데모대는 10여명의 사상자를 낸채 곧 동대문쪽으로 쫓겨났다. 이 총격전으로 종로4가 일대는 수라장이 되고 길가 복덕방 임원협 노인이 총에 맞아 숨지는가 하면 김진자는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40여대의 차량에 분승, 밤거리를 질주하며 시위하던 수백명의 데모대는 숭인동 근처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잠시 주춤했으나 밤8시경부터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200209204008&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6-02&officeId=00020&pageNo=4&printNo=16513&publishType=00020

 

야간기동데모대들은 계엄군의 진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미아리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쪽으로 몰렸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400209204010&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6-04&officeId=00020&pageNo=4&printNo=16515&publishType=00020

 

데모대의 최후 후퇴로인 돈암동, 안암동 일대는 20일 상오 일체의 교통이 차단되었다. 안암동 근처 산에서는 20일 새벽까지 데모대원과 무장경찰 사이에서 사격전이 끝까지 벌어졌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2100209103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4-21&officeId=00020&pageNo=3&printNo=11703&publishType=00010

 

 

1960년 4월26일 이승만 하야 이후 무기탈취 사례

 

관계 당국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경북 김천에서는 27일 새벽 일단의 학생 및 군중들이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 칼빈총 7정, 권총1정을 탈취한 후" 트럭과 짚차에 분승하여 대구 방면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정보 접헌 계엄당국에서는 군대를 급파, 이를 진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밖에도 성주, 현풍, 안동 등지에서는 27일에도 군중들이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2800209103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4-28&officeId=00020&pageNo=3&printNo=11710&publishType=00010

 

26년 하오 7시반 수백명에 달하는 군중의 데모는 어둠에 따라 점점 악화되어 시내 수개처의 관공서 및 사개 파출소를 대파하였으며 계속해서 파출소의 비품과 서류를 소각한 다음 인천서를 습격하여 건물 내외부를 대파하고 무기고에 침입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270020920302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4-27&officeId=00020&pageNo=3&printNo=11709&publishType=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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