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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페미니스트들의 페미니즘 비판
게시물ID : soda_64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eunzehn
추천 : 10
조회수 : 22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1/27 11:41:41

* 이 글은 온라인 매거진 'Quillette'에 게지된 여성 언론인과 학자들의 인터뷰를 번역한 것입니다. 단순 사이다라기엔 조금 길고 난해할 수 있지만 근래 페미니즘이 보이는 문제점들을 정확히 지적한 기사라 여기에 올립니다. 원문은 출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성은 정말로 피해자인가? 4명의 여성에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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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 Pluckrose- 기자, 역사학자

때로 여성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을 이용하고 학대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그 대상이 여성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여성이기 때문에 권력을 쥔 남성에게 학대당하고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경우도 있다. 허나 그럼에도 여성이 '피해자'의 하위 분류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남성들이라면 단순히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말과 행동 - 원치 않는 성적 접근, 강도 높은 비판, 불친절한 지적, 질 나쁜 농담, 캣콜링, 휘파람, 윙크 등에 의해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렵거나, 불편하거나, 짜증나거나 혹은 단순히 서투른 행동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성인이다. 여성은 수비적인 정신성을 구축하거나 분쟁 지역을 만들지 않고도 주변에 있는 남성들의 행위를 평가할 수 있는 유머와 공감능력, 이성, 균형감각, 그리고 관용을 지닌 존재다.

최근의 #MeToo 현상(SNS에서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토로하는 해쉬태그가 유행했던 현상)에 끔찍한 강간 사례와 함께 서투른 구애행위와 원치 않는 칭찬 따위가 언급되고, 강간과 의도치 않은 신체의 스침이 같은 현상으로 논해지며 젊은이들의 28%가 윙크를 성희롱으로 여기는 현실 속에서는 사회가 여성의 위기분석 능력과 사회생활 적응능력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감당할 수 없는 평판이다.

우리 어머니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에는 지나치게 온순하고 섬세하고 신경질적이며 쉽게 감정적으로 변한다는 주장에 격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승리했다. 자매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기 시작했고 여성들은 남성과 나란히 회의실과 정치판, 강의실 연단과 극장, 법정과 군대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성취는 현재 여성의 강화(empowerment)에서 피해자 지위를 얻는 방향으로 목표를 변경한 페미니즘 내부의 문화적 시프트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여성이 이룩해낸 진보를 무너뜨리고, 예민함을 칭송하고 강인함을 부정하며 피해자의 위치를 무기화해 양성간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파탄내려 하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 유능한 행동자가 아닌 예민한 피해자로 대우받는 것이 여성에게 좋을 리 없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말을 걸거나, 칭찬하거나, 비판하거나, 구애하거나 혹은 친밀함의 표시로 신체접촉을 하는 것이 자신의 커리어와 평판을 파괴할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양 성 모두에게 해악이 된다.

여성들이 성폭행 피해자의 신뢰성, 남성의 권리와 행복, 그리고 여성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성희롱'에 대한 윤리적 패닉과 남성에 대한 마녀사냥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Holly Ashe - 패션기자, 패션 디자이너, 벤처 사업가

나는 어릴적부터 강한 여성이 되기 위해 여성이 충분히 능력을 갖춘 존재임을 교육받았다. 나는 남성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편모 가정에서 자랐고, 내 어머니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냈다. 그녀는 임신 8개월째에 카펫을 깔았고, 혼자서 옷장과 2층 침대를 만들었으며, 90년대 초반의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정권 하에 생활을 위한 자금조차 거의 없는 상태에서 두 명의 성공하고 인정받는 딸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어머니는 '피해자'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녀는 그것을 철저하게 경멸했으며 나와 내 자매가 절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것은 내가 지금도 매일 되새기는, 끔찍한 만성 질환과 파탄난 결혼생활, 그리고 30살이 되기도 전에 찾아온 커리어 전환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진언이기도 하다. 나는 피해자 행세를 할만한 모든 핑계를 지니고 있었다. 주저앉아 자신을 동정하고 키보드 뒤에서 수백만의 '순교자'들에게 징징대며 이 한심한 작태를 부추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앞서간 우리의 자매들이 '여성'이라는 낙인을 떨쳐내고 능력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감내한 수많은 희생을 뒤로 하고, 시간을 한참 뒤로 감아 'trigger warning'(대학 강의 등에서 감성적 자극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을 보여주기 전에 사전 경고하는 것), 'fainting couches'(충격을 받았을 때 주저앉을 수 있는 안락의자), '보모' 따위를 요구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러한 터무니없는 트렌드는 나름 웃음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시대착오적이고, 미디어에 의해 너무나 공격적으로 홍보되고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지구상의 다른 자매들에 비해 엄청나게 혜택받는 위치에 있는 서구권 여성들이 스스로를 성인들의 세계에서 살아갈 능력이 없고 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납치된 처녀'의 스테레오타입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실로 해롭고 분별없는 행위이다.

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우리는 남성이 허위신고로 인해 여성과 함께 일하기를 꺼리고, 고용주가 고소가 두려워 여성을 고용하지 않으려 하는 지점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최근에 한 페미니스트가 트위터에서 했던 말('나는 죄없는 남자들이 성범죄 허위 신고로 인해 직장을 잃는다 해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처럼 말이다.

이 '운동'이 여성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망상이다.


Amy Alkon - 심리학자

1990년대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Seventh Avenue를 건너고 있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던 한 남성이 '그렇게 몸매 좋은 백인 여자 처음 본다!'며 외치고 지나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명을 질러 경찰을 부르고 그 남자가 신속히 체포, 처형되도록 조치했다.

물론 농담이다. 나는 당시에도 매우 기분이 좋았으며, 53세가 되어 내 얼굴이 슬슬 영화 IT에 나오는 광대처럼 변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지금까지도 애정어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대상화'의 끔찍함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헛소리를 받아삼키지 않고, 동시에 자신을 가부장 뭐시기의 피해자로 정의내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주었으면 한다.

나는 나 자신을 피해자로 정의하지 않기에 웃을 수 있고, 농담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에게 좀 꺼지라고 말해줄 수 있다 - 공권력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지 않고 말이다.

여기에는 물론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점이 도움이 된다. 나는 대신 자신을 휴머니스트로 지칭한다. 물론 그 단어에 이미 다른 의미가 있음은 알고 있지만 내가 '개인의 권리', 자궁이 달린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권리를 추구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현재 페미니즘이 되어버린 것과 반대로 가는 것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동등한 권리'를 내세우면서도 동등한 권리의 포장 아래에서 여성들만의 특별한 권리를 요구하기에 바쁘다(참고로 특별 취급을 요구하는것만큼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지 않음을 역설하는 행위도 별로 없다).

페미니즘은 이제 정기적으로 여성을 대등한 인간이 아닌 달걀껍질로 취급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약화를, 내가 '권장된 무기력'(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의 '학습된 무기력'에서 따온 용어)이라 부르는 태도, 어떻게 해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음을 설파하는 운동이 되어버렸다.

현재 페미니즘은 괴이하게도 여성들에게 예민하고 수동적이며 무력한, 권위있는 자들이 대신해서 돌봐줘야하는 존재가 될 것을 강요하는 일종의 가부장주의로 변질되어버렸다. 나는 이런 운동의 일부가 될 생각이 없다. 나는 그닥 페미니스트도, 숙녀도 아닌 관계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씨x 안해.' 당신이 여성이라면 나와 함께하기를 권한다. 페미니즘이 되어버린 '것'에게 'x발 안해!'를 외치라.

이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두려움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이를테면 두 다리로 서서 직장 동료를 마주하고 '나한테 그거 하지 마', 내지는 '날 그런식으로 대하지 마'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들이 당신이 그만두라고 반복해서 말했음에도 해당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건 성희롱이고 도움을 받을 일이다. 그러나 당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성과 대등한 존재, 강한 존재로서 행동한다면 그런 상황에 처할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Clair Lehmann - Quillete 편집장

인간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여길 때 피해자가 된다. 이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다. 폭력이나 심한 대우의 대상이 된 사람들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 설령 그들이 경험한 바가 그 어떤 관점에서 봐도 끔찍한 일들이라 해도 말이다.

사실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심각한 역경을 경험한 사람들일수록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거나 침묵을 지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한 역경을 겪은 이들일수록 피해자라는 딱지를 거부하고 자신들을 '생존자' 내지는 '투사'라 여기는 쪽을 선호하는 일이 많다는 말이다.

나는 호주 남부에 위치한 도시 애들레이드의 경제적으로 빈곤한 동네에서 자랐다. 나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여자아이들은 상당수가 공과금 내기도 벅찬 편모/편부 가정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피해자를 자칭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오히려 남자아이들이 해메는 편이었다. 대마초를 너무 피워 학교에서 퇴학당하거나, 과속 혹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죽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이제 다른 시대의 일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피해자 문화는 독구름처럼 솟구치고 있다. 사람들이 그것이 어떤 지위나 특혜를 가져다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단기적으로 보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피해자를 자처하는 여성들이 그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한다.

사람이 자신의 통제할 수 없는 일(과거에 있었던 일을 포함해서)에 고착되어서 자존감을 느끼는 일은 드물다. 삶의 의미와 만족감은 타인에게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을 직접 '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지 특별 대우나 관심을 요구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피해자 문화를 걱정하는 우리는 그것을 뿌리뽑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우리가 힘과 용기를 이야기하고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여성 선조들은 현대 의학의 도움 없이 일생에 거쳐 다섯, 열, 심지어는 열다섯의 출산을 겪었을 것이다. 귀족 가문의 후예가 아닌 이상 우리 선조들은 농장이나 다른 사람의 집에서 고된 노동을 했을 것이다. 그들 중 대다수는 사유재산도, 학대하는 남편을 떠날 권리도 없었으며 교육을 접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들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웃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이는 현대인의 삶이 힘들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히 힘들고 우리는 힘든 시기를 견디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피해자라 여기지 않는 이상 우리 중 그 누구도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출처 http://quillette.com/2017/11/22/women-victims-four-women-res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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