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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했던 그 양반 3
게시물ID : soda_66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ㅂㅎ한
추천 : 43
조회수 : 851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2/21 10:41:41
주방은 이 고시원의 정글적인 속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공간이다. 그곳엔 성문화된 어떤 규칙도 없지만 오랜 기간 걸쳐 먹잇감들을 두고 발생한 긴장과 싸움 끝에 생긴 관례들이 그곳의 안정을 담보한다.

관례는 나약한 규칙이다. 그렇기에 어떤 관례가 오랫동안 지켜졌다는 것은 그 관례를 수호하는 이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방증이 된다. 2호실 아저씨는 주방의 위대한 수호자였다. 공용 냉장고에 가장 많은 식량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방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2호실의 지리적 이점과 어우러져, 2호실 아저씨가 스스로를 사실상 주방의 관리인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고시원 원장이 사실상 관리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던 이곳 5층에서, 주방을 전담 관리하는 이의 존재는 여러 거주자들의 편리에도 상응했으므로, 고시원 장기거주자들은 주방에서의 2호실 아저씨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서 도맡은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밥을 짓는 일이었다. 고시원 관리자가 사실상 관리를 포기한 이곳 5층의 공용 밥솥은 곧잘 비곤했다. 식대 한 푼이 아쉬운 고시원 입주자들에게 텅 빈 공용 밥솥은 그야말로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해지는 참사였다. 2호실 아저씨는 공용 밥솥이 빌 때마다 관리실에 내려가서 쌀을 받아와서 직접 밥을 짓곤 했다. 밥 안치는 솜씨도 퍽 훌륭했다.

월요일 새벽,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기 위해 2호실 아저씨는 평소처럼 관리실에서 쌀을 얻어와 밥을 안쳐놓고 출근 준비를 마쳤댄다. 취사가 끝날 무렵 2호실 아저씨는 자기 몫의 밥을 덜어가기 위해 밥솥을 열었다. 

텅 비어있었다. 밥솥에 안쳐놓은 밥을 누군가 모조리 덜어 가버린 것이다. 가을 내 열심히 모아놓았던 도토리 창고를 털린 다람쥐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한 겨울을 그 창고를 의지해 든든히 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고스란히 상실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2호실 아저씨가 쌀 얻어오고 밥을 지은 노고는 유난히 서러운 공복감을 안고 막일을 해야 하는 슬픈 아침으로 돌아왔댄다.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서 도맡아 했던 두 번째 일은 주방 청소였다. 주방 바로 앞에 위치한 2호실의 특성상 주방에서 풍기는 음식냄새가 곧 2호실 아저씨의 체취가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2호실 아저씨는 자신의 필요와 공공의 복리라는 명분을 동력 삼아 주방 청소와 관리에 매진했다.

그가 일을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방문 앞 건너편에 보이는 주방의 모습은 처참했다. 깨진 계란 껍데기는, 가스랜지 위에 눌러 붙은 계란 흰자 옆에 놓여 있었고 기름때가 잔뜩 묻은 프라이팬과 접시, 수저는 식탁 위에 고스란히 얹혀 식탁보를 기름으로 불들이고 있었다. 몇 점의 김치 쪼가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 곁엔 장조림 소스들이 꽈리고치 몇 개와 함께 버려져 있었다.

더러워진 주방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2호실 아저씨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그 식기들, 계란들, 김치와 장조림이 모두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2호실 아저씨는 서둘러 공용 냉장고를 열어봤다. 김치는 통째로 사라졌고 장조림은 꽈리고추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어묵볶음도 절반가량이 사라져 있었다. 밥솥은 볼 것도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지라 그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2호실 아저씨의 표정은 아마도 성난 야차 같았을 것이다.

2호실 아저씨는 곧바로 그 양반의 방문을 두드렸다. 입주 첫날부터 1호실 아저씨의 김치찌개를 훔쳐 먹었던 그 양반을 의심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사고였을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가 그랬지? 내놔 내 거 내놔! 문 열어봐!”

그 양반의 방문은 잠긴 채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시원 5층 출입구에 아무렇게나 내동쳐 있는 그 양반의 화려한 갈색구두는 그 양반이 고시원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2호실 아저씨는 더 성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2호실 아저씨는 10분가량을 더 문을 두들기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하지만 그 방엔 역시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다른 사람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갔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리고 저러다가 문이 정말 부서지겠다는 생각이 들 때를 즈음해서 고시원 관리자가 올라왔다. 

관리자 할머니는 아직 월세를 받아내지도 못한 그 양반을 다른 입주자들이 괴롭힌다는 사실에 다소 거북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황을 들어 보니 의심이 충분히 들 법도 한 것 같았다. 관리자 할머니는 “그럼 내가 문 따 줄게 한번 봐봐. 괜한 문 고장 내지 말고”라며 관리실에서 열쇄를 가져와 그 양반의 방문을 땄다.

방 안에선 자는 척 하는 그 양반이 있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양반이 “뭐야 자는데! 들어오지 마!”라고 말했으니 대단히 쉽게 잠에서 깨는 게 아니라면 자는 척 하던 것이었을 게다. 

그 양반은 저 사람이 나를 마구 모함한다며 나는 그냥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잤노라 주장했다. 관리자 할머니가 그러면 2호실 아저씨의 반찬들이 혹 방에 있는지 확인하게끔 방을 좀 보여주면 될 것 아니냐 물었다. 그 양반은 당당하게 “그래! 들어와서 봐! 보고 그거 없으면 한번 봐봐! 내가 이거 경찰에 신고할 거야!”랬다. 그 태도가 퍽 의연해보였다. 2호실 아저씨도 그런 태도에 내심 당황했을 것이다.

과거 1호실 아저씨도 2호실 아저씨의 라면을 훔쳐 먹었던 일도 있었고, 사실 주방에서 누군가가 반찬을 훔쳐 먹는 일은 더러 일어나는 일이다. 그제야 2호실 아저씨는 자신이 너무 섣부르게 그 양반을 범인으로 단정 지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양반의 침대 밑에서 김치 한 통과 메추리알, 돼지고기가 잔뜩 들어간 장조림 한 통이 나왔다. 한 가득 담긴 밥은 아예 대놓고 책상 위에 있었다. 없어진 줄도 몰랐던 수저 한 쌍도 나왔다. 큰 통의 절반 정도가 사라졌던 어묵볶음은 안 나왔다. 참고로 2호실 아저씨의 밑반찬 솜씨가 퍽 괜찮았다. 그 어묵볶음이 참 맛있었던 걸로 봐서 그러했다. 2호실 아저씨 미안해요. 관리자 할머니가 다들 맛 좀 보라고 넣어둔 반찬인 줄 알았어요. 어쩐지 어묵볶음에 멸치도 들어가 있더라니

2호실 아저씨와 그의 밑반찬들이 재회하면서 그 겨울, 사흘의 이튿날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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