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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웃기고 울린 한국 코미디 7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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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릴케
추천 : 1
조회수 : 167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9/27 20:03:38

한국 코미디 탄압과 천대의 70년(1)

코미디·예능은 이제 사람들의 일상에 들어와 있다. 성과 정치라는 금기의 영역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국 코미디 70년은 하지만 탄압과 천대의 시절이 훨씬 많았다. 김희갑에서 김구라까지, 우리를 웃기고 울린 그 역사를 되돌아봤다.

한국에서 정치 코미디를 하는 것은 한때 금기였다. <명랑 히어로>(문화방송)가 시사와 정치 이야기를 다루다 폐지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요즘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정치·시사 이슈가 회식 자리 안주처럼 유통되는가 하면(<썰전>, 제이티비시), 정치인들이 모여 산악 트레킹에 나서는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기도 하고(<최후의 권력>, 에스비에스), 국회의원들이 퀴즈쇼에 나와 시청자들에게 구애를 던지기까지 한다 (<적과의 동침>, 제이티비시).

한국 코미디가 다루지 못할 마지막 영역처럼 여겨졌던 성에 대한 농담도 과감해지고 있다. 티브이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SNL)는 ‘뭘 좀 아는 어른들의 라이브 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19금 코미디를 연마해 왔고, 제이티비시 토크쇼 <마녀사냥>은 아예 성과 연예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한 시간을 가득 채운다. 지상파에서도 한국방송 <개그콘서트> ‘댄수다’ 코너의 춤추는 커플 막시무스(김재욱)와 모니카(허민)는 섹스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찬 대화를 나눈다.

웃음의 도구로서의 성과 정치의 등장. 방송 채널이 늘어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탓이겠지만 ‘이제 이 정도 소재를 다룬 프로그램을 선보여도 되지 않겠는가’라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 코미디와 예능은 이제 한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예술 장르가 되었다. 코미디·예능 프로그램이 드라마를 제치고 방송사의 간판이 된 지 오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 1위는 지난 수년간 유재석의 차지였다. 대중가요, 드라마, 춤, 게임, 요리, 패션, 스포츠, 서바이벌, 군대, 가족, 연애…. 세상 거의 모든 요소들을 먹성 좋게 집어삼키며 외연을 늘려온 코미디·예능이, 성과 정치를 소재로 삼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코미디·예능을 기리는 변변한 시상식 하나 없어서 각 방송사 연기대상 시상식에 들러리처럼 끼워져 기념되던 게 불과 십수 년 전의 일이니, 격세지감이다. 구봉서나 서영춘, 이주일과 심형래, 김형곤과 같은 거대한 이름들이 있었음에도, 코미디·예능이란 장르 자체는 천대를 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힘 있는 이를 비판할 수 없어 대신 슬랩스틱과 자기 비하를 하는 코미디언들에게 저질이란 비난을 던지던 시절, 웃음은 점잖지 못하고 경박한 것처럼 취급되기 일쑤였다.

그 시절로부터 코미디·예능 장르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까지, 우리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것은 언제나 진지하거나 건전하기를 강요당했던, 혹은 마음 놓고 웃을 틈이 없었던 한국의 서글픈 근·현대사와 그 궤를 함께하고 있다.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기 위해,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려보자. 한 70년 정도만.

김희갑 구봉서 배삼룡…1세대 코미디언들

세부적 연도나 인물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 코미디의 뿌리를 만담과 악극단에 두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일제 강점 시절,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일제의 수탈로 한이 맺힌 조선 민중의 마음을 달래준 것은 만담과 악극이었다. 극단 취성좌 출신의 만담가 신불출은 천재적인 만담 솜씨로 당대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때마침 불어온 레코드 열풍에 힘입어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며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민족주의적 발언도 불가했던 일제 강점기, 민족의 설움을 만담에 모두 싣기엔 시대적 공기가 여의치 않았다. 신불출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발언을 했다가 곤욕을 겪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억지로 친일적인 내용의 만담을 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악극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악 연주와 연극, 코미디가 한 공연 안에 공존했던 종합 예술 양식이었던 악극은 당대 대중의 중요한 오락거리 중 하나였지만, 일제는 ‘연예계 정화’라는 핑계를 들어 각종 규제를 도입해 연예계를 통제했다. 무대에 서고자 하는 배우는 한 달에 한 번 남산 조선 신궁이나 지방의 신사에 의무적으로 참배를 해야 하고, 공연조차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꾸리지 않으면 무대에 올릴 수 없는 세월이 계속되었다. 공연장마다 순사들이 감시하던 시절, 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풍자나 시대상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불가능했다. 코미디야말로 대중의 아프고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장르이기에, 시대의 모순과 상처를 감춰야 하는 지배세력은 코미디를 억압하기 바빴다.

일제 강점기 민중의 마음을 달래준 것은 만담과 악극이었다 
신불출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발언을 하다 곤욕을 겪기도 했다

구봉서가 ‘구 첨지’로 분해 도시의 모순을 풍자하고 
‘비실이’ 배삼룡은 울분을 푸는 배설의 창구 역할을 했다

정치 사회적으로도 그랬던 것처럼, 문화예술계 또한 해방공간을 자유와 혼란이 공존하는 시기로 기록하고 있다. 철저하게 문화예술을 통제했던 일제와는 달리 미 군정은 이렇다 할 문화정책이 없었고, 일제의 감시와 제약에 시달리던 악극단은 갑자기 풀린 문화정책 앞에서 그 수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해방 이전부터 활동하던 이들이 제약이 사라진 틈을 타 더 활발하게 활동을 펼친 것도 있었지만, 당대 종합 예술의 총아였던 악극단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대거 유입되기도 했던 것이다. 악사 출신의 구봉서가 우연한 기회에 무대에 오르며 코미디배우로서의 인생을 시작했고, 두어 달가량의 시차를 두고 기자 출신의 김희갑이 첫 주연을 맡았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한국전쟁 종전 직후 배삼룡과 서영춘이 무대에 올랐다. 한국 티브이 코미디의 아버지라 불리는 1세대 코미디언들이 바로 이 10년 사이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 1세대들의 코미디가 유독 호흡이 길고 서사구조가 탄탄했던 것은 이들의 출발점이 악극단이었다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시대 또한 그런 덕목을 요구하고 있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을 거치며 한국 대중은 웃음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을 입었다. 극한의 이념대립과 분단,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전쟁, 말 한마디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흉흉한 시대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응어리를 심어놓았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아무리 코미디언이라 해도 필요한 순간에는 진지한 정극 연기로 대중을 울림으로써 그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어야 했다. 서영춘이 쇼 무대에서는 관객을 오열하게 만드는 신파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나, “내가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기니”라는 마지막 대사로 전장에서 스러져 간 청춘의 초상을 담아낸 <돌아오지 않는 해병> 속 구봉서의 열연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웃음 속에 숨겨진 해학과 슬픔은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였다.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 대 ‘유모어 극장’

코미디 영화나 라디오 코미디극, 쇼단의 공연 등을 통해 대중의 인기를 샀던 코미디 1세대는 60년대 중반 상업 티브이 방송이 개국하면서 하나둘 티브이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비록 티브이 보급 대수는 적은 시절이었지만, 티브이가 있는 집에 온 동네 주민들이 모여 다 함께 방송을 시청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실제 시청자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이미 라디오 코미디극을 통해 방송의 전파성과 그 위력을 경험한 코미디언들은 티브이에 큰 기대를 걸었다. 라디오와 달리 표정이나 몸짓까지 생생하게 전할 수 있었다는 점은 더 큰 메리트였다. 물론 처음부터 티브이 코미디가 성공 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다. 개국 초창기 코미디는 쇼 프로그램의 막간 사이를 채우기 위한 짧은 콩트로 활용되었고, 1964년 김경태 연출이 선보인 <동양방송>(TBC) <웃으면 천국>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이내 폐지되었다. 제대로 된 티브이 코미디의 시작점은, 김경태 연출이 <문화방송>으로 옮겨와 만든 1969년 작 <웃으면 복이 와요>였다.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의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는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미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던 구봉서의 인기가 더욱 확고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사업 실패로 빚을 지고 있던 배삼룡이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 한 번에 재기에 성공했다. 송해와 박시명, 서수남과 하청일 등의 콤비들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고 스타가 된 것 또한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무대만 넓어졌을 뿐, 다양한 웃음을 제약하는 요소들은 그대로였다. 이승만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군사정권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경태 연출이 당시 월간지 <방송>에 적은 글을 한 대목 살펴보자. “(성인 코미디는) 외국 코미디에서는 흔히 다루고 있지만 우리의 윤리관이 용납하지 않고 있다. 정치는 건드리기가 어렵고, 사회문제 또한 같다. 의사를 조금 건드리면 의사협회에서 들고일어나고, 순경을 건드리면 경찰에서 항의를 해오고, 군대를 잘못 다루면 국방부에서 야단이다.”

그러나 1세대 코미디언들은 이런 시대적 제약 안에나마 시대의 울분과 가난에 대한 공포 등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호남형의 외모를 지닌 구봉서가 ‘구 첨지’로 분해 도시의 모순과 비리를 가볍게 풍자하며 시청자들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면, 늘 못나고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던 ‘비실이’ 배삼룡은 보는 이들의 울분을 풀 수 있는 배설의 창구 구실을 했다.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코미디 ‘양반 인사법’은 또 어떤가. ‘양반 인사법’에서 상민인 구봉서와 배삼룡은 서로 양반이라고 속여 혼담을 나눈다. 혹시나 자신이 무식하고 천한 상민인 것을 들킬 것을 걱정했던 둘은 상대에게 얼굴을 숨길 요량으로 등을 대고 돌아앉아서, 중매쟁이가 가져다준 ‘양반 인사법’을 펼쳐놓고 읽기 시작한다. 대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자를 주어 읊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곰방대로 박자를 맞추며 유행가 가락에 맞춰 길고 긴 ‘양반 인사법’을 읽어 내리기에 이른다. 이 유명한 코미디 안에는 출세에 대한 갈망과 허세, 그리고 자신의 출신성분 때문에 혹시나 자식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를 염려했던 당대의 무의식적 불안이 숨겨져 있다.

한편 <웃으면 복이 와요>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동양방송>은 천재 코미디언 서영춘을 영입해 <고전 유모어 극장>을 출범시키며 <문화방송>과의 치열한 경쟁에 나섰다. 그러나 쇼의 개수는 늘었는데 다룰 수 있는 소재는 한정되어 있는 상황은 티브이 코미디 전체의 질 저하를 불러왔다. 여전히 세상은 “그렇게 정치하려면 집에 가 애나 보는 게 낫다”는 송해의 발언 하나 때문에 <문화방송> 라디오 코미디 프로그램 <세상만사>가 하루아침에 폐지되는 야만의 시절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승한/티브이 칼럼니스트
코미디의 기본인 풍자와 현실 반영이 어려우니, 코미디는 자꾸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자학 코미디를 곧잘 선보이던 배삼룡은 “자식들이 닭 알 까듯 한 달에 하나, 두 달에 하나씩 나오기에 도저히 먹고살 길이 없어서 집단 자살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노라”는 극한의 자기 비하 코미디를 선보였고, 다른 코미디언들도 욕설로 점철된 코미디를 들고나오기도 했다. 전 국민의 머리 길이부터 통행 시간, 치마 길이까지 강박적으로 단속에 나섰던 박정희 정권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진 않았다. 딱 2주짜리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문화공보부가 나서서 코미디 프로그램 전면 폐지 조치를 내세운 것은 ‘국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상’만을 담아내길 바랐던 정권의 뒤틀린 문화정책을 잘 보여준다.

이승한/티브이 칼럼니스트

[관련기사] ▷ 한국 코미디 탄압과 천대의 70년(2)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6047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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