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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today_620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ir
추천 : 6
조회수 : 1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4/17 02:26:31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농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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