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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today_633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폴딩
추천 : 3
조회수 : 15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2/23 06:15:31
1
지쳐가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오늘, 또 아마도 어제, 그것도 아니면 그제. 언젠가는 무력감이 날 삼키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2
학창시절의 인적성 검사를 비롯한 여러 검사에서 '나는 미래가 오는 것이 두렵다'는 문항에 매우 그렇다를 택한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검사가 필요할 나이는 지났다.

3
살면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이미 지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쁜 징조다.

4
나는 천성이 글쟁이였다. 성공하진 못했어도 글이 남기는 안정감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고 있다. 결국에는 지우더라도 그 때만큼은 해방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게 얼마나 치사한지도.

5
인생이 빠르게 지나간다. 하루하루 살아간다기보다 매일 죽어간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런 말장난을 허망하게 생각할 만큼 나는 많이 허덕이고 있다.

6
돌이켜 보면 나는 좋은 사람이긴 했다.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노력도 많이 했다. 좋은 친구, 좋은 연인 행세를 많이 하려고 했다. 필사적이었던 때도 있다. 그게 지금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손이라도 뻗어보고 싶은데 이제는 어느 방향인지도 잘 모르겠다.

7
남은 인생이 많은데도 잘 쓸 자신은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부터 나는 악착같이 달려들기보다 한 걸음 멀어지는 걸 택했다. 그게 타인일 때는 괜찮았는데 내 인생일 때는 괜찮지 않았다. 벌써 인생이 많이 멀어졌다.

8
아마도 나는 너무 많이 변했다. 정말이 아니라 너무. 고등학생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고, 대학생 때와도 다르다. 나는 더이상 나를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사랑? 그런 건 애저녁에 이미 없었다.

9
아직 남아있는 버릇이 하나 있다. 애저녁은 애초의 잘못이란다. 하지만 그냥 쓰기로 했다. 잘못하고 싶은 기분이어서. 혹은 이미 잘못한 게 많기에.

10
가훈은 칭찬과 감사였다. 칭찬하고 감사하자. 인사도 있다. 자기 전에 아버지한테 경례하면서 칭찬, 하고 말하면 아버지는 경례를 받으면서 감사, 하고 답한다. 그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 가족이 살아왔다는 증거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한 게 3년도 더 됐다.

11
보통은 글을 쓰고 나면 다음날 지운다. 부끄러워져서. 이제는 지우지 않는다. 부끄러워할 마음도 없어서. 나중에 내가 많이 괜찮아지면 이 기록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12
나무위키에서 자살한 인물 목록을 본 적이 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13
언제인가 타블로가 말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중요하다고. 내일, 뭐가 됐든 좋으니 기대감을 가지고 자라고. 나는 요즘 폰게임을 하고 있다. 다음주 화요일에 새 뽑기가 나온다.

14
사랑한다는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언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연애를 할 때 나는 상대를 사랑했을까. 상대는 나를 사랑했을까. 공연히 불안해지고 난 다음에는 생각한다. 내가 모든 걸 망쳤다고.

15
앞으로 가기보다 뒤를 돌아보는 걸 좋아했다. 추억에 잠겨서 청승을 떠는 걸 좋아했다. 그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행복한 기억들을 한 조각씩 줍다 보면 정말 행복해져서, 행복하게 잠들었다. 타블로가 말한 미래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줄곧.

16
언제 인생이 하강곡선을 그리게 됐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신이 나를 만들 때 까먹고 넣지 않은 '나쁜 성격'을 이제 와서 채워버린 느낌이다.

17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나는 나를 특별히 싫어하는 건 아니다. 좋은 점도 얼마든지 있었다. 예전에는 그랬다.

18
책을 안 읽은 지 제법 오래 되었다. 적어도 삼년. 이제는 잘 못읽겠다. 책을 누구보다 좋아하던 문학소년이었는데. 활자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19
대학 때 논픽션 수업을 들었다. 수필을 많이 썼는데 그게 참 좋았다. 나라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은근한 기대감을 안고, 약간 들뜬 마음으로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20
나는 많이 섬세하고 훨씬 많이 나약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성적이었다. 필기구를 모으고, 예쁜 글씨체를 연습했다. 남고였는데 내가 판서를 하면 우리반에 여학생이 있댔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다.

21
내 글씨체는 예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얼마 되지 않는 장점이다.

22
유년시절은 힘들었다. 거의 매일 울었다. 사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때보단 지금이 나은 것 같기는 하다.

23
고등학생 때 키가 많이 컸다. 그때 180을 넘겼다. 신장이 커지면서 다른 아이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때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는 무시당해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내가 밑인데.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성장했다.

24
고등학교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다. 그때의 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를 거다. 동시에 이상한 사람이긴 했다. 어느날 갑자기 묵언수행을 했다. 꼬박 하루동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하루에 한 마디도 안할 때도 있다.

25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십대에 특히 그랬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회의적이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이 될 때부터 사색을 즐겨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내 뇌는 텅 비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절대 아니다.

26
나를 많이 믿었다. 내 능력도 믿었다. 그런데 잘 안 됐다. 그냥 그뿐이다.

27
처음에는 털어내듯이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트북으로 쓸걸. 자야 할 시간은 이미 넘겼는데 자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백수에겐 매일이 방학이니까.

28
방학이라는 표현은 너무 식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백수에겐 매일이 오늘일 뿐이라는 표현이 더 좋겠다.

29
자고 나면 좀 괜찮아질 거다. 그런 식으로밖에 해소할 수가 없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30
언제인가 읽었던 베르베르의 소설이 생각난다. 파괴의 D파였나. 나를 완전히 박살내고 새로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다.

31
나는 노는 걸 좋아한다. 사실 누구나 그렇다. 근데 이제는 노는 것도 질린다. 누군가는 퇴근하길 원하는데 나는 출근하길 원한다.

32
여기까지 썼다가 지우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을 거다. 내가 살아왔다는 흔적을 남길 것이다. 나중에 보면서 낄낄거릴 것이다. 우스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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