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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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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uphoria
추천 : 10
조회수 : 84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6/04 15: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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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헬레니즘시대의 교육(아테네를 중심으로)


우선 헬레니즘 시기를 알렉산더대왕의 마케도니아제국과 대왕사후의 왕국분열, 그리고 로마로의 흡수까지로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사상가 트리오로 교육철학, 교육사상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을 받은 알렉산더대왕은 그리스를 정복하고, 이를 그리스 밖으로 퍼뜨렸습니다. 곳곳에 그리스문명을 내포하는 도시들을 곳곳에 세웠고, 그중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발전했다고 평가받는 곳이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나일강 삼각주 바로옆에 있는 도시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기, 아테네와 더불어서 학문의 거점지였고, 교육의 거점지였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문헌의 보고였습니다.


헬레니즘 시기 아테네는 1편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신교육의 형태가 무난하게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눈에 띌만한 변화는 없었습니다. 

다만 에페포스(에페보스)가 지원제로 바뀌었고 이들을 위한 전문적 교육이 형성되고 있었죠. 교육은 군사교육과 일반교양교육이 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C경 텔레스가 쓴 글에서, 그 부분이 살짝 언급되고 있습니다.

“에페보스가 되었을 때, 전술훈련, 체력단련, 검술, 체육교사의 혹독한 훈육아래에서 에페보스는 그것을 견뎌야한다. 추가로 그림을 그리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림 그리는 법이 추가된 것 말고는 기존의 신교육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마가 그리스세계를 정복했을 때에도 똑같이 유지됩니다. 오히려 로마 원로원에 의해서 그 정당성을 더 공인 받았습니다. 

기원전 1c 초 로마 원로원에서 제안되 ‘감사결의’에 ‘원로원의 수장은 에페보스단을 기리기 위한 명예 수여 안건을 로마시민에게 제출하여, 그 승인을 받도록 하며, 에페보스 전원에게 끊임없는 수양과 공공정신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에게 금관을 수여하도록 하고, 에페보스를 가르친 검술,궁술뿐만 아니라 모든 조교들에게는 월계관을 수여하도록 한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에페보스를 지원하지 않고, 철학쪽에 더 몰두하고 싶은 청년들은 '아카데메이아'를 다녔습니다. 당시 연령대는 다양했으며,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기하, 천문등을 중요시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아카데메이아정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도 말라 라고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곳을 다니다가, 플라톤이 죽고난 후, 알렉산더대왕의 가정교사로 초빙되어 그를 가르치다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만의 학교를 만들었고, 이것이 ‘뤼케이온’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학제는 일종의 ‘선형’학제[linear education system]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초-중-고-대 6-3-3-4 학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0년 후에는 제논과 에피쿠로스가 아테네에 각각 스토아학교와 에피쿠로스학교를 설립하여, 후에 스토아사상과 에피쿠로스사상을 보급하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군사, 철학뿐만 아니라, 수사학(웅변술)과 문법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 또한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성공한 소피스트, 이소크라테스가 세운 학교가 시초가 되어, 수사학을 전문으로 가르쳤습니다.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문학비평, 변론술, 문법등을 포괄하여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헬레니즘시기에는 알렉산더대왕의 정복과 그리스문명 보급 덕분에 그리스 밖 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곳곳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수사학이 헬레니즘 시기에 퍼진 이유는 이소크라테스가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리포스왕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과 연관이 됩니다.

“왕께서는 그리스라는 세계를 하나로 바라보고, 그렇게 취급하십시오, 그리고 도시들간의 분쟁을 무익한 싸움으로 취급하십시오” 필리포스왕은 이소크라테스의 말을 채택하였고,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정책을 정복전쟁과 함께 퍼뜨려나갔습니다. 

이소크라테스가 세운 수사학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시민적 사상을 함께 채택하여, 거대한 헬레니즘이라는 제국을 세우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 수사학교는 로마인의 주목을 받게되고, 수사학은 로마인들의 주된 교육관심이 되었습니다. 수사학이 로마인의 주된 관심이 된 이유는 실용적 목적이 컸습니다. 그리스의 수사학은 실용적 목적이 있기는 했지만, 철학적 목적에 방점을 두었다. 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한 수사학자의 이야기를 그리스 전체의 수사학으로 일반화 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이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수사학을 가르치는 것은 법정에서 벌금을 안 물기 위함이 아니라, 전인적인 시민을 양성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실제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담는 것이 언어이므로, 이 언어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이성, 인성의 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약적으로 아카데메이아, 뤼케이온,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이 4학교는 아테네를 거점으로 하여, 헬레니즘 시대에 철학적 사상을 보급하는 학교였고, 수사학교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수사학적 기교와, 사상을 보급시켰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은 그리스사상을 보급시키는 학교를 알렉산더 제국내에 전파시켰고, 스토아학파와 수사학교는 로마로 거쳐들어와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2. 알렉산드리아와 자연과학, 그리고 문헌학

그리스가 이런 학문적 풍토였다면, 알렉산드리아는 어땠을까요? 알렉산드리아는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던 곳이죠. 알렉산드리아는 모태가 된 그리스와 교육사적 발달이 상이하게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승과 그리스의 교육풍토는 스승과 제자사이에 긴밀한 연결(문하생?)을 통해 지식의 연구와 전수가 이루어지는데 비해, 알렉산드리아는 문헌학과 주석달기, 번역, 고증등에 촛점을 맞춥니다.

비교적 신생도시이기 때문에 교육적 전통이 마련되어있지 않았고, 나일강을 기반으로 그리스와 동양세계를 잇는 항구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따라서, 실제적인 학문에 중심을 둡니다. 

철학,문학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그 영향으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철학,문학보다는 개인의 연구와 노력이 많이 필요한 문헌학, 번역등이 발전했습니다. 또한 실제적 학문인 ‘자연 과학’과 토지측량에 필요한 수학등이 발달합니다.

이처럼 한때는 아르키메데스의 물리학, 에라토스테네스의 지리학과 지구과학, 히파르코스의 천문학등 자연과학자가 활발하게 연구하고, 집필하던 거점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프톨레마이오스9세가 그리스출신 학자를 추방하여,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이루어지지 않게됩니다. (더 자세하게 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 연구는 1기, 2기, 3기로 표현가능합니다. 1기는 자연과학이 번성하던 시기, 2기는 번역과 고증학, 3기는 학문연구의 암흑기입니다.)
출처 부흥
http://cafe.naver.com/booheong/5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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