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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0일 날씨 쾌청
게시물ID : military_563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모카초코
추천 : 20
조회수 : 209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6/20 06: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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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곧 6.25고 호국보훈의 달이 끝나가는 이 시점 이런 글 하나 정도는...)

예전에 영화 포화 속으로를 계기로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녔던 어느 학도병의 편지..잘 알고 계실겁니다.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제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린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 내 나는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집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군요.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찬 냉수를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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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도병의 편지의 주인공 학도병 이우근 -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

1950년 북한의 침략으로 6.25가 발발하기 전의 대한민국은 정말 지독했습니다. 장비는 둘째 치고라도 건국이후 최초의 징병검사가 50년 1월에 실시되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죠.

전쟁이 발발하자 병력과 장비 모든 면에서 밀린 국군은 후퇴를 거듭합니다. 이런 상황 하 정부는 다급히 징병을 실시하여 병력을 보충하고자 하였으나
넘치는 피란민과 소집체계의 붕괴 및 미비로 병력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상태에 많은 학도병들이 펜과 책 대신 총을 잡고, 군복이 아닌 교복 차림으로 계급장 대신 "학도의용대"라는 완장을 차고 겨우 사격방법이나 익힌채로 전선에 나갔습니다.

이들 대부분의 나이는 4~6년제 중학생..M1소총이 자신의 가슴팍에 오거나 자신보다 큰...15살 ~ 18살의 까까머리 학생들이었습니다.

IMG_1032.jpg
< 전몰학도병충혼탑 >

이런 학도병들이 최후의 보루로 싸운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포항여중 전투입니다.

위 편지를 쓴 이우근 학도병이 전사하고 영화 포화속으로의 모티브가 되었던 전투죠.

1950년 8월 포항을 지나 부산을 공격하려던 북한군 766유격대를 불과 71명의 학도병이 무려 11시간 동안 막아낸 전투입니다.

실제 참전하셨던 정수득 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의성에는 전국에서 모인 87명의 학도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안동 길안까지 걸어가 3사단으로 찾아갔으나 당시 사단장이던 백인엽 장군은 16명만 받고 나머지 71명에게는 귀향명령을 내렸다고합니다.

이에 나머지 학도병들은 김석원 장군의 휘하에 들기 위해 포항으로 향합니다.

8월 10일 포항역에 도착한 학도병들은 전황에 관련된 브리핑을 받고 포항여중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소대장과 분대장은 투표로 뽑고 저녁에 M1 소총과 실탄 250여발을 보급받았습니다.

11일 밤 적의 포탄이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비상이 걸린 학도병 들은 급히 경계에 돌입합니다.

새벽이 되자 약 20여명 정도의 북한군이 접근을 시작했고 경계 중이던 학도병들은 일제사격을 가해 모두 전멸시키는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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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줄에 학도병들이 보인다>

그 상태로 아침이 되자 다시 한번 적의 공격이 시작되나 별 피해없이 적을 막아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오전 11시 적은 장갑차를 앞세워 전진하기 시작했고 1시간 후..후방이 뚫리면서 전우들이 쓰러졌습니다.

총을 갈겨 적을 쓰러뜨렸으나 곧 손에 관통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13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는데 밤이 되자 호송을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일부 포로가 와~ 하는 소리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면서 호송대열은 혼란에 빠졌고 이 때다 싶은 정수득 님은 재빠르게 탈출해

인근 부둣가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민간인을 만나 옷도 갈아입고 부상도 처치하고 잡도 실컷 자고 이튿날 경주의 야전병원으로 향했으나 중간에 북한군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학생이라고 말하니 통과시켜줬고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죠. 그리고 부상을 입었으니 치료해 달라고 하자 민간인은 치료가 안된다며 거부했습니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으니 전투에서 부상당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던겁니다. 결국 치료를 받지 못한 그는 집으로 내려가 치료를 마쳐야 했습니다.

이 학도병 71명이 벌어 준 11시간..이 11시간은 정말 금쪽과 같은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신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3사단과 미군이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하지만 그 댓가는 컸습니다. 74명중 47명이 채 20살이 되기전에 인생을 끝마쳐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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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학병, 학도의병>

6.25 전쟁 당시 직접 총을 잡고 전투에 참가한 학생들 수 5만명..

후방 혹은 점령지에서 공작이나 선무활동을 전개한 학생들 수 25만명..

조국의 위기를 방관할 수 없어 일본에서 건너온 재일학도의용군의 수 642명..

이들 중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죽어간 의용군의 수 7000명..

이들은 1951년 2월 28일 종군학생복교령이 내려지면서 학교로 복귀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린 뒤였습니다.

또한 이후 개정된 병역법에 따라 다시 한번 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칩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장담하건대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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