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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를 이어폰] 4. 가수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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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목덜미페티쉬
추천 : 0
조회수 : 61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7/20 22:09:23
- 본 소설은 신용재의 솔로앨범 '24'의 수록곡 '가수가 된 이유'를 모티브로 하여 창작되었음을 앞서 밝힙니다.

*

“네, 슈퍼싱어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저음의 bgm과 단독 조명을 받으며 MC는 우렁찬 목소리로 프로그램의 오프닝을 알렸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객석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곳곳에서 들리는 함성은 다른 함성에 묻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되었다. MC는 그 소란 가운데 프로그램 진행방식과 현재까지의 대결결과를 설명했고, 결론적으로 결승만이 남았음을 알렸다. 설명이 끝나자 무대 뒤편의 스크린에서는 결승에서 맞붙을 두 사람의 영상이 대치되어 나타났고, MC는 그 두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외모만큼 감미로운 미성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남자, 제임스 고!”
 
 옅게 진 쌍커풀과 유려한 콧날, 하얀 피부로 언뜻 소녀처럼도 보이는 출연자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자 하이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고, 여러 대의 카메라는 그의 가족들과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여학생들을 클로즈업했다. 제임스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하는 영상이 플레이되자 더욱 거세진 함성은 오히려 노래 소리를 묻어버릴 정도였다. 제임스의 영상이 끝나고 잠시 잠잠해진 객석으로 다른 인물의 영상이 비추었다.
 
 “힘겨웠던 과거를 이겨내고 다시 정점에 서려는 남자, 곽 철웅!”
 
 사각진 턱과 거친 세월을 살아냈음직한 눈빛, 건달의 것으로도 보이는 어깨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자 베이스의 환호성이 울렸고, 카메라들은 가장 돋보이게 응원하는 사람을 찾으려고 방황하는 듯 보였다. 제임스와는 달리 철웅이 노래하는 영상은 나오질 않고 병상에 누워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비추었다. 그리고 침울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철웅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자-
 철웅은 모니터를 꺼버렸다. TV도 꺼지고, 혼자밖에 남지 않은 대기실 안은 이명처럼 울리는 소음들을 제외하고는 적막했다. 철웅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잠시 부비고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크업된 얼굴은 멀끔했지만 붉어진 눈은 가릴 수 없었다. 충혈된 눈은 깊은 불안감을 내포한 듯이 보였다.
 아내가 수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단체합숙을 들어간 후부터 나갈 수가 없었고, 휴대폰은 방송유출을 이유로 압수당했으니까. 수술을 한다는 것도 심성이 곱기로 소문난 조연출이 와서 알려준 것이었다. 원래는 PD가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방송이 끝날 때까지 비밀로 하자고 한 모양이었으나, 조연출은 그래도 알려야할 것 같다면서 몰래 철웅을 찾아온 것이었다. 
 아내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지막 감성여론을 형성해 시청률을 더 끌어올려보겠다는 심산이었는지 PD로부터 카메라를 대동한 병문안을 제안 받았을 때. 2주 전에 찾아갔던 아내는 더욱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철웅 자신도 마지막 자존심인지 평소보다 밝은 모습을 보였고, 아내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괜찮은 척을 했지만 병색이 짙어진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차가운 철제침대에 옮겨져 홀로 수술실에 들어갔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합숙 직전에 의사에게 물었을 때도, 이미 여러 번의 수술과 항암치료로 아내의 체력은 한계에 달해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술을 한 번 더 받는다면.....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미 포기한 음악을 위해 아픈 아내를 홀로 놔두어야 하는 건지 철웅은 자신이 환멸스러워졌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건, 아내의 소원이었으니까.
 
 거칠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한창 가요계를 휩쓸던 2000년대 초중반, 철웅은 신인 중에서는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늑대의 하울링처럼 한이 서린 음색은 물론이거니와 남자다운 페이스로 그는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리 여기저기에서 그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노래방에서는 그의 노래가 애창곡 순위권 안에 들었으며, 행사에서 노래 몇 곡만 불러도 돈 천만원쯤은 우스웠다. 그럼에도 그는 방탕하지 않았다. 성격이 불같기는 했지만 초심을 잃지 않았으며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도덕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한 의원측으로부터 사적인 공연 제의가 들어왔다. 장소는 공연장이 아닌 호화스러운 룸이었다. 자신의 노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기에 철웅은 당연히 응했으나, 그곳에는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제의를 받은 것이 철웅뿐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신인여가수 몇 명이 있었다. 몇 번 인사만 받았을 뿐, 말을 나눠보지는 않은 이들이었다. 다만 순수한 음색과 행동이 눈에 들었던 신인 한 명은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있는 곳은 무대가 아니라 의원들의 옆자리였다. 막 무대에 오른 철웅은 처음에는 어벙벙했다. 하지만 이내 반주가 시작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의원들의 잔에 자연스럽게 술을 따르는 여가수들과 탐욕스럽게 그녀들을 주무르는 손길이 보였다. 
 사태가 파악되자 목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의원들은 그 잘난 권력으로 신인들을 산 것이다. 사람을 돈이나 권력으로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이 의원들에게 잘 보여 이 판에서 입지를 굳힐 기회라며 잘 하고 오라던 매니저의 말이 생각나 꾹 참았다.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노래가 클라이막스로 다다를 무렵, 비명소리와 함께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철웅은 눈을 떴다. 
 
 “이런 씨X 뭣도 없는 X이 빼고 지X이야!”
 
 테이블 구석에는 한 의원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씩씩거리고 있었고, 신인 하나가 뺨을 부여잡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순한 얼굴로 늘 밝게 인사하던 그 신인이었다. 떨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분노를 자각할 새도 없이 그는 테이블로 달려가 그 의원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의원의 멱살을 붙잡고 계속 때렸다. 여자들은 모두 옆으로 피신했고, 황급히 달려온 기도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의원의 얼굴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곧장 그는 연행되어 경찰조사를 받았다. 피해자 측에서 합의의사가 없으니 복역은 피해갈 수 없었고. 결국 그의 가수 인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대중의 시선이었다. 그는 경찰조사에서나 기자들에게나 모든 정황을 사실대로 말했지만,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한 내용은 ‘곽철웅이 술을 마시고 이유 없이 의원을 폭행했다’라는 내용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평소 곽철웅의 행실이 좋지 않았다’, ‘곽철웅이 실은 건달들과 관계가 있고, 마약도 한다’ 같은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까지 부풀려졌다.
 소속사 사장이나 매니저는 법적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여론이라도 안심시켜 보려고 그 자리에 있었던 신인들이나 기자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들 쉽사리 입을 열어주지 않았다. 난생 처음 죄수복을 입은 철웅은 다부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췌해져만 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동안 합의의사가 전혀 없던 피해자가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거액을 내면 합의를 해주겠다는 통보를 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니 가릴 것이 없었다. 철웅은 곧장 수용했고, 거들먹거리며 찾아온 의원에게 무릎을 꿇었다. 기자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신문에는 그 의원이 자신을 이유없이 폭행한 방탕한 가수 하나를 대가 없이 용서해준,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쯤으로 표현되었고 사진은 의원이 철웅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처럼 찍혀 있었다. 실제로는 몇 억 가까이를 합의금으로 지불하였으나 그 내용은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 덕분에 그 의원은 그 해 재선에 성공했다.
 구금에서 풀려난 그 해 겨울, 철웅은 집에 칩거했다. 음악은 이미 뒷전의 일이었다. 집앞을 지키던 기자들마저 떠난 이후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외로웠지만 동시에 사람이 두려웠다.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가 꿈속에까지 이어져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동안 입에도 대지 않던 술병이 방의 빈자리를 메워가고, 담뱃재가 벽 귀퉁이를 누렇게 물들이던 어느 날, 철웅은 천장에 넥타이를 매달았다. 부모도 없이 힘겹게 일군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죽음은 쉽사리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단단히 묶은 넥타이에 목을 걸치는 순간-
 
 ‘띵동-’
 
 벨이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그 맑은 소리에 정신이 아뜩해져서 그만, 그는 의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충격을 막기 위해 반사적으로 내딛은 팔, 고통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아있다는 감각이었다. 그 감각 때문인지 두려움도 없이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인터폰으로 향했다. 그리고 물었다.
 
 “누구.....세요?”
 
 오랜만의 들어보는 자신의 목소리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데, 수화기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한예선이라고 하는데요.....곽철웅 선배님 계신가요?”
 
 조심스럽고 선한 말투였다. 철웅은 그 목소리에서 와들와들 떨리던 작은 어깨를 생각해냈다. 외면하려고 했던 일들이 다시금 바늘처럼 머리를 찔러댔다. 그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인터폰을 놓으려고 하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 죄송해요 선배님! 힘드신 거 알지만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알아준다는 것이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얼마나 밝은 충격으로 다가오는지 사람들은 알까. 자신도 모르게 철웅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추웠는지 볼이 빨개진 여자가 서있었다. 자그마한 두 손에는 보자기에 싸인 짐이 가득 들려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의 형체에 눈물이 핑-도는 것을 참으며, 철웅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사과드리려고 왔어요. 저, 저번에 그 일.....”
 
 “잘못한 건 접니다. 그쪽이 사과할 이유는 없어요. 그만 돌아가세요.”
 
 단호한 대답에 철웅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떨궜다. 이내 그 작은 어깨가 떨리며 그녀의 신발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그치만, 저 때문에 이렇게 힘드시잖아요”
 
 이 말을 마치고 그녀는 펑펑 울었다. 그 순간, 어이없게도 철웅은 우는 얼굴이 참 예쁜 여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문득 두 손의 짐이 버거워 보여서 짐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한참을 울고 난 뒤, 소매로 얼굴을 슥슥 문지르고 그녀는 훌쩍거리며 물었다.
 
 “혹시.....식사 하셨어요?”

 그녀가 주는 안전한 느낌 때문이었을까.....그는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들어가도 되냐는 물음에, 그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주었다. 순간 천장에 걸려있는 넥타이와 의자가 생각났지만, 그녀는 그걸 보고도 말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역시 긴장한 것 같았다. 그녀는 보자기로 쌓여 있는 짐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황금색 보자기를 풀자 그 안에서는 밀폐용기에 담겨진 김치나 장아찌같은 밑반찬이 나왔다. 그녀가 쌀을 씻고, 개수대에 잔뜩 쌓인 그릇들을 씻는 동안 그는 천장에 걸린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의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대충 집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식탁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밥을 바라보자 철웅은 갑자기 배가 고파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꽤 긴 시간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녀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이라며 말을 떼기가 무섭게 그는 걸신들린 듯 밥을 먹기 시작했다. 혀는 눈물샘과 이어져 있는 걸까, 모든 게 너무 맛있어서 철웅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마잇네요.....너무 마잇.....”
 
 목이 메여서 더 이상 밥을 넘길 수도, 말을 이을 수도 없었다. 흐린 시야로 푹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서 더 크게 울었다. 그가 우는 내내 그녀도 함께 울었다. 철웅은 눈물을 그치고 훌쩍거리며 물었다.

 “대체 예선씨는 왜 우는 거예요?”

 그러자 예선이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선배님이 우시니까 마음이 아파서요.”

 저녁에도 밥을 차려먹으라며 예선은 냉장고에 반찬들을 채워넣고 갔다. 오래도록 허기져있던 냉장고도 배가 부른 듯 소음이 줄어든 것 같았다. 다시 집 안이 휑해졌지만 이상하게 그는 몸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주머니 안에 아까 쑤셔 넣었던 넥타이가 만져졌지만, 죽음은 다시 멀게만 느껴졌다. 그날 밤은 술 없이도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예선은 매일 철웅을 찾아와 밥이며 청소를 해주고 갔다. 동굴처럼 어둡던 집안은 다시 본모습을 되찾게 되었지만, 하루는 걱정이 되어 스케줄은 어떡하냐고 물으니 소속사에서 짤린 지 오래라며 싱긋 웃었다. 어차피 무명이었으니 어느 식당에라도 취직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철웅은 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트라우마 때문인지 노래는 나오지 않았고, 대인기피증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지만 삶이 척박해져 갈때쯤이면 늘 찾아오는 예선 덕분에 그때처럼 죽음을 생각나지는 않았다. 죽지만 않으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있다. 철웅은 아파트를 처분하고 남은 돈으로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대인기피증과 발성이 회복되기까지는 2년 가까이의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모든 곡들을 만족스럽게 완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철웅은 이전의 소속사 사장을 만나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사장의 대답은 NO였다. 이미 음악시장의 판도는 어린 아이돌의 후크송으로 바뀌어 있었고, 더 이상 그의 우는 듯한 노래는 상품성이 없었다. 추문으로 연예계를 떠난 가수의 노래라면 더더욱. 철웅은 차라리 그렇게 냉정하게 말해주는 사장이 고마웠다. 그는 보컬트레이너로라도 일해보라는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한달에 180정도 준다는 공장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공장에 들어가기 전날 밤, 철웅은 예선에게 반지도 없이 프로포즈를 했다. 예선의 대답은 YES였다. 
 평범한 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가끔씩 노래를 청하는 공장 사람들이나, 자신을 알아보는 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과거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일마저도 사라져갔다. 일은 힘들었지만 언제나 집에 가면 밝은 미소로 맞아줄 아내가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빠듯한 돈으로도 예선은 지혜롭게 살림을 꾸려갔다. 매일 잠든 아내를 바라볼때면 삶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서로 고생한 결과 작긴 하지만 집 한 채를 매입할 수 있었다. 잔금을 완전히 치룬 날 밤, 철웅은 꽃을 한아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집안에서는 아내가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다. 철웅은 아내를 들쳐업고 혀가 빠지도록 달렸다. 간신히 병원에 도착해서 진통제를 맞고 검사를 했다. 결과는 대장암이었다. 그것도 3기. 철웅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시 이뤄온 생활이 무너진다거나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집은 팔면 되고, 돈은 장기를 팔아서라도 얻으면 된다. 다만 아내가 아파하는 모습이 뇌리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몇 차례의 대수술과 계속되는 항암수술로 인해 밝았던 얼굴은 피폐해졌다. 분명 본인이 가장 아프고 힘들 것임에도 남편을 챙겨주지 못한다고 우는 모습을 볼 때면 철웅은 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 우는 모습이 예쁜 사람들은 울기만 하는 인생을 사는 것일까. 그리도 예쁘고 순수한 소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자신을 만나게 하고 고생을 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죽을병에 걸리게 만드는지.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일의 원흉은 철웅 자신일 것이었다. 차라리 그때 아내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내는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속죄하고 싶었다. 만약 아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여느 때처럼 주사를 맞고 맥이 빠져 TV를 바라보던 아내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철웅은 발견했다. 아내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TV안에서는 몇 년 째 유행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광고하고 있었다. 그 광고를 보던 아내는 버석거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우리 여보가 저기 나가면 바로 우승할건데.....그치?”
 
 철웅이 음악을 포기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수라는 단어는 언급도 하지 않던 아내였다. 하지만 마음이 많이 약해진 탓인지 아내는 그동안 담아두었던 속내를 비춰보였다.

 “늘 미안했어.....나 때문에 여보가 노래를 포기했으니까.....가수일 때의 당신은 참 행복해보였는데.....정말 미안해”

 흠뻑 젖은 아내의 말투에 자칫하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철웅은 이를 앙다물었다.

 “그.....런 말이 어딨어. 난 당신을 만나고부터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어.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해.....”

 “그래도.....”
 
 아내는 힘없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철웅은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나 아내는 자신의 구원이었으니까. 그동안 말도 제대로 못하고 끙끙 앓아왔을 아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더 이상 아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곧장 철웅은 결정을 내렸다.

 “여보, 나 저기 나가볼게”

 철웅의 결정을 들은 아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였다. 음악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세상이 자신의 노래를 필요로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심한 욕을 퍼부으면 망부석처럼 서서 들을 것이고, 돌을 던지면 피를 뿜으며 얻어맞을 것이다. 철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가 자신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뿐이었다.
 
 오랫동안 노래를 쉬었기에 연습을 많이 했지만, 심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것은 새삼 떨렸다. 철웅이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있던 심사위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 일이 있던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겉치레인지 진심인지 모르게 ‘이런 분을 우리가 심사해도 되는지’ 등의 말을 했지만 눈빛에는 약간의 의뭉심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철웅이 노래를 시작하자 그들의 입은 벌어지기 시작했고, 여성 심사위원 한명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까지 했다. 노래가 끝나자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그 침묵을 깨며 한 심사위원이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철웅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아내를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정은 덧붙이지 않았다. 지원서에 예전의 이력을 기록했으니, PD가 자세히 조사해 놓았을 것이었고 방송에서 말이란 것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지냈는지 등의 간단한 질문이 몇 개 들어왔지만, 그는 간단하게 필요한 말만을 했다. 심사위원들도 그간의 사정을 짐작했는지 깊게는 묻지 않았다. 결과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합격이었다.
 철웅의 합격 사실을 듣고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철웅도 나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웅의 방송분이 나간 직후 대형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는 ‘곽철웅’과 그가 부른 노래가 상위에 랭크되었고, 유튜브에서는 그의 동영상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인터뷰 요청이 물밀 듯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고, 슈퍼싱어 담당 PD에게 개인사는 방송에서 모두 말할테니 방송에 나가는 동안 인터뷰를 막아주는 것과 ‘악마의 편집’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았다. 철웅이 이번 시청률의 핵심임을 간파했기에 PD는 이례적으로 참가자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방송에 적응했는지, 본선에서 철웅은 더 엄청난 무대를 보여주었고 당당하게 합격했다. 슈퍼싱어 방송팀은 철웅의 실력은 확실하게 시청자에게 어필했으니, 이제 그를 완벽한 우승자로 만들 무기를 준비했다. 그들은 철웅이 연예계를 떠난 이후부터 현재 암에 걸린 아내의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물었다. 방송이 또 이상하게 편집되어 나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방송은 그가 대답한 그대로 방송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철웅과 마찰이 있었던 그 의원이 성추문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일이 있었기에, 모든 상황을 파악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철웅에 대한 동정여론이 형성되었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덕분에 철웅은 거의 걸림돌이 없이 ‘최후의 10인’에 뽑혔고, 결승전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생명이 막바지에 달했다는 연락을 받자 철웅은 머리가 하얗게 지워지는 것 같았다.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지만, 만약 그런 존재가 생명을 관장한다면 한 번 쯤은 믿고 싶었다. 철웅이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는 순간 대기실 문이 열리고 스탭이 이제 방송에 나가야 함을 알렸다.
 그는 스탭을 따라 어두컴컴한 무대 뒤편에 다다랐다. 그리고 MC가 이름을 호명하자 허정거리는 발걸음으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엄청난 환호성이 그의 귓가를 울렸지만 조명이 너무 눈부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빛이 오히려 고통스럽던, 혼자였던 그때가 생각나 잠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무신경한 MC는 개의치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멘트를 읊었다. 
 
 “네, 결승전의 미션곡은 바로 신용재의 ‘가수가 된 이유’입니다. 두 분 모두 가수가 되려는 이유가 있으실텐데요. 우선 제임스 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임스가 마이크를 건네받자 뒤편의 스크린에서는 기타를 치는 어린 시절의 사진부터 제임스를 응원해주는 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임스는 자신이 가수가 되려는 이유는 꿈과 그 꿈을 응원해주는 팬들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멘트를 끝내자 발랄한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제임스의 대답은 매끄러웠다. 애초에 작가들이 써주는 멘트였기에 외우기만 하면 별 문제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철웅은 넋이 나간 듯 갑자기 그 멘트가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멍하니 서있던 철웅은 MC가 재차 불렀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관객들은 의아한 눈으로 철웅을 바라보고 있었다. MC가 철웅에게 마이크를 건네주며 물었다.

 “곽철웅씨는 다시금 가수가 되려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스크린에서는 과거 철웅이 가수였던 시절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때의 일이 부질없는 꿈같이 느껴졌다. 이제 너무 오래전 일이어서 무엇 때문에 가수가 되려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정점에서 추락할 때의 그 허탈감뿐이었다. 과거에 활동했을 때의 사진이 이어지는 동안 철웅은 침묵했다. MC는 조금 당황한 듯 대본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금 철웅을 부르려고 했다. 그때, 아내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철웅의 눈 앞에 아내와 함께 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가수가 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대본과는 다른 멘트에 MC는 흘끗 PD를 바라보았고, PD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그대로 놔두라는 듯 턱짓을 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러분의 환호성도 지금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고, 몇 억원의 우승상금도 제 눈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슈퍼싱어에 참가하게 된 것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것도, 생활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밑바닥부터 지금까지 내내 구원이 되어준 아내의 소원이기 때문이었죠. 40여년의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로지 아내의 얼굴과 아내와 함께 한 시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내가 수술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의 수술로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정말 많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저는 손 한 번 잡아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못난 남편이죠. 그런 남편을 위해 젊음을 헌신한 아내를 위해 저는 노래밖에는 들려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저를 응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문자투표에서 저를 찍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무대를 후에 제 아내가 볼 수 있도록.....진심으로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객석은 조용해졌고 철웅은 눈물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MC는 잔기침을 몇 번 한 뒤, 조금 젖은 목소리로 잘 들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 무대가 세팅되고, 제임스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 노래에는 불리한 음색이었지만, 편곡이 부드럽고 애잔하게 되어서인지 꽤 괜찮은 무대가 되었다. 제임스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철웅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제임스의 노래가 끝나자 철웅은 주먹을 꽉 쥐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철웅은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밝은 조명이 비추는 모든 광경을 또렷하게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잔잔한 전주가 흘러나오고 이내 노래가 시작되었다.   

인터넷에 나를 쳐보면 이제 내 노래가 나와
내가 왜 굳이 이렇게 가수가 된지 넌 알까
유명하고팠던 이유는 오직 단 하나뿐이니까
니가 날 보고 날 알아듣고 내 생각하라고
TV에 나와 노래해 혹시 니가 볼까봐
날 들으면 날 본다면 날 찾아줄까봐
기를 쓰고 노래해 그 옛날의 널 위해
그때 다 하지 못했던 내 맘을 담아서
이렇게 노래해
 
 1절을 마친 철웅은 잠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그 광경에 철웅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노래를 끝마치고 돌아가면 아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반겨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양된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노래에 집중하려고 눈을 감는데, 구석에서 불안한 표정의 조연출이 PD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느닷없이 달려드는 불안감을 떨쳐낼 새도 없이 2절이 시작되었다.

못해부터 살다가까지 니가 없던 건 없으니까
솔직히 터놓고 말해 모두 너와 내 얘기니까
내 노랠 듣고 내가 울고 내가 슬퍼하고
혼자 미치는 나의 이유를 넌 알 것 같은데
TV에 나와 노래해 혹시 니가 볼까봐
날 들으면 날 본다면 날 찾아줄까봐
기를 쓰고 노래해 그 옛날의 널 위해
그때 다 하지 못했던 내 맘을 담아서

 2절이 끝나자마자 거세지는 드럼소리가 곡의 하이라이트를 알렸다. 2절에서 약간 음정이 흔들린 철웅은 내내 자신을 쫓아 달려온 불안감에게 반격하려는듯, 음을 내질렀다. 

내 아픔과 내 눈물과 내 진심을 다해
내 맘 전한다면 너에게 들릴까

 온몸을 내던진 공격에 천적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늑대는 감았던 눈을 떴다. 철웅의 시선이 PD를 향했다. 그런데 그 서릿발처럼 냉정하던 PD의 시선이 철웅을 피해 도망치듯 떨어졌다. 음이 멈춰있는 그 짧은 시간에 철웅의 정신은 재앙을 감지한 날짐승처럼 푸드드, 날아가버렸다. 철웅의 눈빛은 이제 텅 비어있었다. 커다란 반주와 함께, 철웅은 거대한 빛이 자신을 덮쳐옴을 느꼈다. 눈알이 타는 듯한 고통이었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비명에 가까운 음정이 그의 목에서 터져나왔다.

이 몇 분짜리 노래가 별거 아닌 가사가
니 귓가에 니 마음속에 울려 퍼지기를
미치도록 기도해 제발 니가 듣기를
이런 내 맘이 들리면 너 돌아오라고
눈물로.....

 노래해, 마지막 세 음절을 남기고 그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앞에는 마이크 한 대 밖에 없었지만, 그는 흡사 죽은 암컷을 앞에 둔 늑대같았다. 
 반주마저 모두 끝난 고요한 무대에는 철웅이 울부짖는 소리만 서럽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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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당신과 나를 이어폰'의 김고든(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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