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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간략히 적어본 만주국의 경제 관련글 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223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8
조회수 : 91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8/05 1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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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의 일본은 이탈리아 보다는 낫다지만 여전히 주요 열강에 비하자면 아직 개발 도상 단계에 위치한 국가였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의 호황을 타고 종래의 농업 중심 에서 공업 중심으로 넘어가고 있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30년 기준으로 섬유 관련이 36%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중공업은 좀 갈길이 멀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발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나름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던바 그러한 흐름에 대소전선의 최전선이자 전진기지였던 풍부한 자원을 기저에 깔고 있는 만주가 빠질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네 만주국은 정치적 측면을 배제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때 확실하게 독립국은 아닙니다, 일본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었고 일본 육군성과 관동군의 이상에 취합하는 국가였지요.

만주국의 설립 이전 관동군과 남만주 철도 주식 회사는 만주 일대의 '점령지'의 개발 계획을 조사한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남만주 철도 주식 회사는 단순하게 코레일 같은 회사가 아니라 철도 주변 지역 일대의 인프라 개발, 영리적 이득의 취득 등을 위한 다종 다양한 사업을 하는 다수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 기업으로 그 경제적 규모는 만주국에 필적할 정도였습니다, 즉 당시에 만주 일대의 국가적 프로젝트를 유일하게 제대로 유치할수 있는 회사로서 빼놓을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요.

아무튼 32년 3월 만주국의 설립 이후 이러한 경제 개발 건설 계획의 초안을 만주국에 전달했고, 이듬해 33년 만주국은 '만주국 경제 건설 정책의 개요'를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이제 관동군의 시각을 엿볼수가 있는바 공영 기업, 회사의 지분이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유사 특수 기업과 만주국-일본 간의 조약, 협력 등에 따라 설립된 정부에 의해 규제되는 특수 기업에게만 중요 산업을 배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 볼수 있듯이 반 자본주의적 성격 아래에 경제 발전의 결과를 특정 계층에만 향유 시켜서는 안되며 기간 산업들은 오로지 정부에 의하여 통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더욱이 하나의 산업에 하나의 기업만이 배비된 것에서 볼수 있습니다만 오로지 하나의 기업만이 그 분야에서의 독점권을 인정받았으며 일체의 시장 형성은 용인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특수 기업, 유사 특수 기업들은 만주국 정부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에서 자본을 출자받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수 많은 특수 기업과 유사 특수 기업들이 설립되어 만주국 정부로 부터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만 경제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에 따른 문제가 예상되고 또 발생되는바 35년에 '육군성'에서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에 '일본'과 만주국의 산업 경제 전반에 따른 장기적 계획을 연구 수립해 줄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만주국의 공공 재정 및 경제 연구협회RIPEJMㄴ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인 36년에 육군성과 관동군에 초안이 제출되게 되었으며 2달 뒤인 10월에 관동군, 만주국 정부, 남만주 철도 주식 회사 의 긴밀한 협조 아래에 만주국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 이듬해인 37년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내용은 이제 한국 전쟁 이후 수립된 경제 개발 계획과 직접적인 군수 물자에 따른 측면을 대한다면 다종 다양한 중공업과 화학 공업의 확충 등 엇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시된지 1년만에 개정안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유는 크게 두가지 입니다.

첫째로 만주국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된 37년에 일본의 공업력 확충에 대한 장기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육군성'은 37년 중순에 중요 산업에 대한 5개년 계획의 개요를 발표, 일본과 만주 일대를 묶어 하나의 경제 블록화를 추구하는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즉 제조업 생산량의 단순 수치 비교로 4배가 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한 나름의 최선의 방책을 수립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중일 전쟁입니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 막대한 자원의 소모에 따라 이를 확충하기 위한 것으로 본디 관동군은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에 그 들이 소모하는 병기며 관련 군수품을 자급 자족하기 위한 이상을 투영하였습니다만 육군성은 원료 산지 및 반가공 제품 산지로서의 만주를 요구 했고, 이 것이 받아들여져 38년 초에 만주국은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을 개정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이 엄청난 국가적 프로젝트가 단순하게 정부 주도의 출자로만 이루어질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뜩이나 돈이 없어 교본에서 설명하는 현실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바람에 중세 수준의 보병 돌격이나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닛산의 아유카와 요시스케, 가와사키 조선소의 마츠카타 고지로, 니혼 질소의 노구치 시타가오 등의 제계 인사들을 초청 현장을 시찰하고 경제 개발 계획의 초안을 공개 자문을 구하고자 한바 이 시찰이 끝나고 귀국한 아유카와 요시스케는 몇가지 문제를 지적하는데 첫째로 '육군성'의 이 경제 계획 및 관리는 정말 기초적인 수준으로 아무런 산업간 조율이나 체계적 분업 관리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른바 Big Push로 산업간 상호 보완을 통하여 서로간의 효율성을 증진시켜 나갈수 있으므로 연관된 기업들이 함께 확장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호 보완은 종래의 국가의 개입이 아닌 민간의 개입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문제는 이제 돈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37년 만주국의 한해 수입은 27억엔에 불과했습니다만 만주국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에는 약 29억엔, 그 개정안에는 약 50억엔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돈이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바 있지만 타 병과와의 공조, 보다 원활한 지휘 통제를 위한 통신 수단의 구비, 지원 화력과 백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야간전의 강조, 그리고 임무형 지휘 체계, 정신력을 뒷받침 해줄 든든한 지원 화력이라는 육군 교리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사각 편제를 돈이 없어 삼각 편제로 수정하는 상황에서 돈을 더 짜낼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라 아유카와 요시스케는 미국에서의 출자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아유카와 요시스케의 지적과 개선안 제시는 '육군성'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 들은 아유카와 요시스케의 닛산이 이 5개년 계획에 참여하여 자동차 및 항공기 산업 분야를 맡아주기를 원했습니다만 아유카와 요시스케는 더 나아가 5개년 계획의 중공업 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고나리를 원했고, 그 댓가로 당시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닛산 그룹 전체를 만주국으로 이전 할것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요구 사항을 조율 한 끝에 37년 10월 첫째로 원철 및 제철, 경금속, 항공기, 제탄 등의 분야를 관할하는 정부와 닛산 그룹이 지분의 반씩을 나누어 가지는 새로운 기업체를 만들며 두번째로 해당 기업은 해외 자본 유치에 주력하고, 세번째로 본 산업과 해당 기업에 대한 만주국의 특별 조치가 보장되며 네번째로 이 산업은 일본 재계에서 뽑힌 적임자인 아유카와 요시스케에게 일임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만주국 중공업 수립 개요가 수립됩니다.

이에 따라 닛산 본사는 만주국의 수도 신킹으로 이전하는 한편 만주국 중공업 개발사 관리법에 따라 만주국의 특수 기업으로 등록되었고, 닛산의 사명은 만주국 중공업 개발사 MHID 로 개명되게 됩니다, 그리고 만주국으로 부터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로 부터 Showa Steel, Manchuria Coal Mining, Manchuria Light Metals, Dowa Auto mobile 을 인수 하는 한편 Manchuria Mining, Manshu Magnesium, Dongbiandao Development, Manchuria Aircraft Manufacturing 등을 설립하여 대규모 중공업 기업체를 이룩하는데 문제는 이후의 상황이 아유카와 요시스케나 육군성이 예상한 그 것 처럼 이상적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중일 전쟁이 장기화 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 이후 고노에 후지마로 수상이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고 선포한 이래에 단기 결전은 꿈도 못꿀일로 변해버린게 문제인데, 중일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사실상 파탄이 나버렸고, 이미 시행되고 있던 국제 무역 및 자본에 대한 제제가 더욱 가열차게 변해버렸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만주국의 경우 일본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75%에 달할정도로 매우 높았던 터라 전쟁이 장기화 되며 자본주의는 사라지고 계획 경제만이 남은 일본의 수출입 통제는 만주국의 경제에 더할나위없는 큰 타격을 안겨주었고 직접적인 외화와의 교환이 불가능하기에 일본을 거쳐야 했던 외국 자본의 도입이 사실상 무산됨에 따라 개발 5개년 계획은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물자 징발과 통제를 더할수 있겠지요, 38년 6월 일본의 물자 징발령에 따라 만주국은 일본의 물자징발령에 대한 민주국의 기여에 대한 제반 지침을 수립합니다, 예컨데 물자 징발령에 전적으로 협력하겠다는 것으로 일본과의 이어진 회담을 통해 합의한 내용을 보면 기존의 외국으로 부터 수입해온 전략 물자중 선철, 석탄, 식량 등은 일본의 요구에 되도록 따르도록 하며, 산업 개발에 필요한 장비의 대부분은 일본을 통해서만 수입하도록 한다는 것이 그 것입니다.

이에 따라 38년 8월에 자체적인 물자 징발 계획을 수립하는데, 국민들의 생계는 유지하며 개발 5개년 계획은 차질없이 이행하되 일본이 수요를 맞추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참 이상적이기 그지 없는 계획인데 아무튼 계획 위원회의 물자 징발령을 수립하기 위해서 공식적인 매뉴얼을 본다면 수요는 1. 군부 2. 공공재 3. 특수 기업 4. 사기업으로 나누어졌고, 공급은 1. 생산, 2. 재고 및 비축분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당연히 수요가 공급보다 많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보충할 파트도 상세히 나누어진바, 1. 신규 생산 2. 절약, 대체품 3.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4. 중국내 점령지로부터의 수입 5.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이 그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물자 징발령의 원인 자체가 일본으로 부터의 수입 제한, 외화 문제로 인한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제한 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약 즉 배급제가 필수적이었고, 메뉴얼과 계획도 이러한 배급제의 골격을 짜올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38년부터 일체의 국내 및 국제 무역, 거래는 특수 기업인 일본 만주 무역상사 JMT 에 맡겨졌고, 가격 통제는 정부의 통제를 받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이듬해인 39년 분배 체계 준비에 대한 개요가 수립되며 생필품, 전략 물자등 국내의 모든 물자는 국가의 계획 및 통제 시스템에 따라 분배되게 되었으며 정부 주도 시스템으로의 이행은 MHID 즉 만주국 중공업 개발사와의 역할을 중복되게 하여 큰 갈등을 빚게 된바, 이후로도 여러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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