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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 7. 결전 전야
게시물ID : history_224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5
조회수 : 4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8/12 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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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년
6월에 전라도 지휘사가 “삼별초의 적선 6척이 안행량을 지나 올라간다.”고 보고하니, 경성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다"
"장군 나유를 보내어 장차 군사 1천 5백 5십여 명을 모집하여 삼별초를 전라도에서 토벌하려 하였다. 이때 적이 이미 탐라로 들어가서 내외 성을 쌓고, 수비가 험하고 굳건함을 믿으며 날로 더욱 창궐하여 항상 나와서 노략질하니 연해 지방이 소란하였다." 
8월 삼별초가 전라도의 상공미 8백 석을 약탈하였다.
9월에 삼별초가 고란도에 침입하여 전함 6척을 불태우고, 홍주 부사 이행검과 결성(충남 홍성)ㆍ남포의 감무를 잡아갔다.
11월에 삼별초가 안남 도호부에 침입하여 부사 공유 및 그 처를 잡아가고 또 합포에 침입하여 전함 20척을 불태우며, 몽고 봉졸(烽卒) 4명을 잡아갔다.
왕이 삼별초의 적선이 영흥도에 와서 정박하였다는 말을 듣고, 50기를 원 나라 원수 흔도에게 청하여 궁궐에서 숙직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1273년 1월 삼별초가 합포에 침입하여 전함 32척을 불태우고, 몽고 군사 십여 명을 생포하여 죽였다.

제주도에 전해 내려오는 삼별초에 대한 전설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애월읍 일대에서는 김통정에 대한 부정적인 전설이 내려오고, 삼별초의 영향이 적었던 성산읍 일대에서는 긍정적인 전설이 많다고 합니다. 직접 그들을 격었던 이들과 멀리서 그들이 중앙 정부와 싸웠다는 얘기만 들었던 차이겠죠.

당시 삼별초는 초라한 패잔병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제주도인들에게 그들은 고려 중앙 정부의 압제에서 구해 준 해방군의 이미지이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진도를 잃은 후의 삼별초는 달랐죠. 거기다 항파두리성을 쌓으며 동원된 백성들 중에는 굶어 죽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성주 고인단은 여전히 중립을 표방하며 대촌성 입성을 거부했고, 제주도민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분명 해방군으로 생각해 적극 협조한 이들도 있겠지만, 그들을 제주도 전체의 뜻으로 칠 순 없죠.

삼별초라는 존재나 그들이 내건 명분도 제주도의 호응을 얻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자신들이 정통 고려라는 것, 그리고 목표는 원종 타도와 대몽항쟁 지속이었죠. 둘 다 고려 본국의 사정과 멀고 몽고가 들어오지도 않은 제주도에는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왕온을 잃음으로써 그 중요한 명분도 없어져 버렸죠. 그들은 제주도로 도망 온 반란군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통정은 고려 본토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특히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들을 집중 공격했죠. 수천 석의 쌀이 털렸고, 이는 삼별초 자신은 물론 그들을 지지한 제주도민들에게도 분배됐을 것입니다. 제주도는 농사가 힘든 곳,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이렇게 먹고살기 위한 약탈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벌을 위한 조선소가 있는 고란도(충남 보령 앞바다)를 쳐 부사 이행검을 붙잡아 갔고, 건조 중이던 전함 6척도 불태워 버립니다. 여기에 전주를 직접 공격해 공유와 그 아내를 잡아가기도 했죠. 공유는 진도를 칠 때 미적거렸다고 파직됐던 이입니다. 삼별초와 참 악연을 쌓았네요. -_-; 11월에는 대담하게 합포를 칩니다. 일본 정벌을 위한 기지를 친 거죠. 여기서 전함 20여 척이 불타고 근처 거제도까지 휩쓸고 갑니다. 토벌 직전에도 한 번 더 들이쳐 32척을 불태우고 갔죠.

기세가 크게 꺾였음에도 김통정은 현상 유지보다는 공격을 선택합니다. 한반도 코 앞인 진도가 아닌 멀리 떨어진 제주도라는 게 큰 이점이 되었죠. 어쨌든 고려 땅에서 그들보다 해전에 능한 병력은 없었고, 바다는 여전히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지킬 게 없으니 게릴라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고려든 원이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공격은 고려와 몽고가 제주도를 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전함을 불태운 이유 중에 그것도 있겠습니다만... 모든 걸 불태울 능력은 되지 못 했고, 해전 없이 상륙만 허용해도 위험한 상황이었죠. 그리고 그 때 여몽연합군은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원과 삼별초 양쪽에 치여 가면서도 고려는 계속 일본 정벌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미 나라의 재정이 떨어질대로 떨어져 재무를 맡은 강위찬, 문습규가 머리를 깎고 도망갈 정도였죠. -_-; 세금도 동나고 관리들에게 월급을 주기는커녕 그들에게 물자를 걷었는데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독촉에 지친 그들이 사직을 청했는데 허락하지 않자 승려가 되겠다며 간 것이었습니다.

원나라는 이런 사정은 무시한 채 계속 정벌을 독촉했고, 12월에는 지네 궁궐 지을 목재까지 요구합니다. 그리고, 삼별초 2차 토벌은 이 때부터 계획됩니다. 적이 영흥도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고려군도 아닌 원나라 군사들에게 궁궐 호위를 요청해야 될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원에서 요구한 것은 병력 6천과 격군 3천이었습니다. 거기에 말먹이와 군량을 모두 고려에서 부담하게 했죠. 이걸 보급하기 위해 별감들이 전국에 파견됐고, 백관들에게 말먹이를 부담시킵니다. 

1273년 2월, 이렇게 토벌군은 조직됩니다. 관리들에게 술과 말을 거두고 민가의 말을 여윈 말과 바꿔 가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은 모든 걸 긁어 모은 원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거부해 봐야 원은 원대로 압박할 것이고, 삼별초는 그나마 있는 것들까지 약탈해 갈 테니까요. 날짜가 적혀 있지 않지만 이 때 왕실의 토지를 관리하는 내장택에서조차 쌀이 다 떨어져 원종은 저녁을 굶어야 했습니다. 

김방경은 총사령관이 되어 부월(도끼)을 하사받은 후 정예 기병 800을 데리고 흔도와 합류합니다. 김방경과 흔도, 홍다구, 다루가치 이익 등으로 구성된 여몽연합군은 총 만이천에 이르렀고, 여기에 160척의 대함대가 집결했습니다. 이후 일본 정벌 때의 지휘부 역시 이와 같았죠. 

원종은 토벌 전에 세자 왕심을 원에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합니다. 울릉도에서 벌목하기로 한 것을 취소할 것, 원군이 제주도를 친 후 약탈을 금지할 것, 각자의 무기를 스스로 마련할 것 등이었죠. 진도에서의 일이 다시 벌어지면 안 됐을 테니까요. 거기다 제주도는 진도와 달리 한참 멀리 떨어진 곳, 삼별초를 토벌하려다 민심을 더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세자가 쿠빌라이 칸의 딸과 결혼하며 부마국이 된 상황, 끌려가더라도 이를 최대한 이용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야 고려 왕조도, 고려 백성들도 조금이라도 더 숨통을 트고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서해도(황해도)에서 오던 전함 27척이 큰 바람을 만나 침몰했고, 경상도에서 오던 27척도 침몰해 버렸거든요. 군량도 부족해 김방경이 전라도의 쌀을 군량으로 돌리자고 건의할 정도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전라도의 쌀은 개경으로 오게 하고 대신 경상도에서 오는 조세를 군량으로 보충하게 합니다. 

4월, 마침내 160척의 전함이 출격합니다. (이 수가 이전에 침몰한 54척을 합친 건지 뺀 건지는 모르겠네요) 이번에도 그들은 거센 바람에 휘말립니다. 이 때 "여러 도의 전함이 모두 떠내려가고 침몰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피해를 알 순 없습니다. 김방경과 흔도는 추자도에서 바람이 멈추길 기다려야 했죠.

이후 일본 정벌 때 하필 여름철을 노린 것을 고려의 음모로 묘사해 일부러 원군을 패배하게 하려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상황을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죠. -_-; 때는 초여름, 아무리 급했다 하더라도 이런 시기에 제주도로 대규모 함대를 보낸다는 것은 자살행위거든요.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제주도로 간 게 다행입니다.

한편, 제주도의 김통정 역시 토벌군이 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요격을 시도할 수 없었죠. 마지막까지 결사항전, 이 외에는 삼별초가 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삼별초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출처 pgr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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