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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시대 3화 "장작림 최대의 적수" 오패부 (下)
게시물ID : history_226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1
조회수 : 86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8/23 09: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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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색 빗금친 부분이 오패부 최대 전성기.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

어쨌든 장작림을 아작냄으로서 오패부는 중국 최대의 실력자가 됩니다. 그의 세력은 산해관 이남의 거의 중국 전역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병력도 50만명에 달하죠. 세계에서는 오패부가 곧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오패부는 한창 기고만장해 집니다. 허수아비 대총통 서세창을 강제로 쫓아내고 여원홍이 대총통이 되지만 여원홍 역시 망신을 주며 쫓아내고는 조곤이 대총통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뇌물이 뿌려지죠. 북경정권을 장악한 다음 천하 통일을 위해 도처에서 다른 군벌들과 싸우며 영토를 확장해 나갑니다.

이렇게 오패부가 독주하자 직계 내부에서 암투가 벌어집니다. 직계는 직계대로 3가지 파가 있었는데 천진파, 보정파, 낙양파였죠. 천진파와 보정파가 손을 잡고 오패부의 낙양파를 견제하다 천진파, 보정파 양측도 갈라서 대립합니다. 이것이 당시 북경정부의 내부 상황이었죠. 더욱이 오패부는 굉장히 오만한 성격인지라 적이 매우 많았습니다. 한번 자기 눈밖에 나면 끝까지 보복했죠. 이런 점은 장개석과도 비슷했습니다.

직군이 내분에다 전쟁으로 피폐해졌을때, 장작림은 와신상담하며 봉군을 철저히 개편하고 근대화시킵니다. 지위가 확고하지 못했던 오패부와 달리 장작림은 만주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감히 장작림의 위치에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제왕이나 다름없었죠. 장작림의 근대화 정책으로 양자의 군사적 격차는 2년만에 완전히 역전됩니다. 또 남쪽에서 와신상담하던 환계군벌 단기서와도 손을 잡아 오패부를 고립시킵니다.

그것도 모르는 오패부는 1924년 9월 8일 미국 타임지 잡지 모델로 자기가 나오자 한창 즐거워 하지만, 바로 다음주인 13일. 철저하게 준비한 봉군의 선제공격으로 제2차 봉직전쟁이 발발합니다. 오패부 역시 장작림과 한번 더 대결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반격합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을때 증원군으로 오던 풍옥상이 북경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남독군이었던 풍옥상도 야심가였는데 오패부의 심한 견제를 받아 하남독군에서 쫓겨나고 북경 육군 검열사로 부임하자 양자의 감정이 악화됩니다. 군비도 주지 않고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풍옥상은 이를 갈면서 휘하 군대를 철저히 훈련시켜 직군 최강의 부대로 만듭니다. 이런 부대가 장작림과 손을 잡고 오패부의 뒷통수를 치게 되죠. 직군은 단숨에 와해되었고 오패부는 겨우 2천명의 병력만 수습한채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도주합니다.영토도 대부분 다 빼앗기고 호북, 호남성만 간신히 확보합니다. 부하인 손전방은 복건성, 절강성 등 양자강 하류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주군이 몰락하자 당장 독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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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상한 걸음거리로 진군중인 오패부 군단. 이들이 맨 총은 독일 마우저 Gew88의 마데 차이나판인 한양식88 소총입니다. 

※ 출처 : 오스프리 맨 앳 암즈

제2차 직봉전쟁에서 단한번의 패전으로 그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집니다. 장작림과 달리 확고한 기반이 없었던 오패부는 재기의 발버둥을 치지만 더이상 장작림과 천하를 놓고 싸울 능력이 없었죠. 더 큰 일은 남쪽에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북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민혁명군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군벌군대와도 달랐습니다. 이들은 돈 한푼에 영혼을 파는 생계형 용병군대가 아니라 "혁명 사상"으로 무장한 근대식 군대였습니다. 지휘관들도 장개석이 직접 키워낸 황포군관학교의 아이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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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방에 요렇게 쪼그라들었음...--; 출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

오패부는 장작림, 손전방과 일단 화해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공동 대응키로 합니다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땅에 이 늑대같은 놈들을 들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장개석은 무한, 한구에서 오합지졸 패잔병인 오패부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합니다. 이것으로 오패부는 남은 기반마저 죄다 잃고 완전히 몰락하죠. 자신도 장작림도 원세개부터 기라성같은 군벌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천하통일을 애송이 장개석이 단숨에 해내는 것을 단지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30년 장개석의 독재에 대항해 풍옥상, 이종인, 염석산 연합군이 일으킨 "반장전쟁" 당시 오패부는 사천에서 또한번 재기를 노립니다. 그러나 장개석이 사천군벌 류상에게 명령을 내려 조기에 밟아버림으로서 오패부의 야망은 꺾이게 되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서북의 감숙성으로 가지만 여기서도 실패하여 북경으로 가서 장학량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장학량은 그를 사부로 모시며 매월 4천위안의 생활비를 주며 부양합니다. 그는 모든 꿈과 희망을 잃은채 신앙생활에 매달립니다. 한때 천하를 노렸고 중국 최강의 남자라 불리었던 영웅의 비참한 말로였죠.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일본은 오패부를 화북 괴뢰정권의 수장으로 만들기 위해 "산포 200문, 소총 10만정, 기관총 2천정, 100만위안의 군자금"을 주겠다고 꼬시지만 반일론자였던 오패부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이후에 남경괴뢰정권의 왕정위도 그를 각료로 끌여들이려고 하지만 역시 거절하죠. 이때문에 일본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1939년 12월 4일. 충치 치료를 위해 일본인 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사합니다.

오패부 역시 전형적인 구식군벌이었으나 제욕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장작림이나 단기서와 달리 적어도 자기 욕심을 위해 일본을 끌어들이거나 나라의 이권을 파는 짓은 하지 않았고 또한 매관매직하지 않고 군비를 빼돌려 개인 축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군벌시대 수장들을 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는....-.-

출처 출처는 욱이님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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