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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부와 블랙리스트
게시물ID : sisa_881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호호얌
추천 : 16
조회수 : 6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0/07/10 04:12:05

간만에 참으로 탄식이 나올만한 명문을 본다.

이런 글에도 반대먹일 ㅄ들이 없진 않겠다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긁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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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www.ddanzi.com/news/35441.html


단종 1년 계유년 10월 10일의 밤은 유독 어두웠다. 군복 입은 병사들과 평복 차림의 무사들이 에워싼 궁궐에는 관솔불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둠의 칠흑은 불빛을 압도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분명히 빛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살기였다. 이 밤이 가기 전에 몇 몇의 목숨이 없어져야 자신의 안위와 영달이 보장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 그 진두에 임금의 삼촌 수양대군이 있었고, 그 곁에 전직 경덕궁 궁지기 칠삭둥이 한명회가 있었다. 

당장 입궐하라는 어명(?)을 받고 대신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대궐 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당나귀 비슷하게 생긴 청주 한씨 추물 하나가 그들을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의 신호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이 못생긴 꾀주머니는 대소 신료들의 이름이 적힌 두툼한 책을 들추어 살려야 할 이름을 가려내고 죽여야 할 이름을 지워 갔다고 했다. 이른바 살생부(殺生簿)다. 정승 판서 이하 당대를 호령하던 쟁쟁한 인물들이었건만 칠삭둥이 한명회의 고개짓 한 번에 목이 잘려나가거나 철퇴에 머리가 수박이 되었고 손짓 한 번으로 구원을 받아 하늘에 감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명회의 살생부는 진짜로 있었을까? 그 경황 중에 지필묵을 대령하고 정갈하게 먹을 갈아 살생부 책 뒤져가며 이름을 지우거나 동그라미를 쳐 가면서 살생부를 채워 가고 있었을까? 야사에 기록된 이 사실이 과연 틀림이 없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는 하지만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다. 살생부에 따라 사람들이 죽어 나간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머리와 셈속에 따른 결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살생부는 없었을 것이다. 김종서를 위시한 정승들이 안평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기에 어쩔 수 없이 불시에 김종서를 먼저 죽이고 임금에게 고하였다는 자들이, 치밀한 계획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살생부를 굳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그리 많겠는가. 

살생부는 하나의 상징일 따름이다.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리자는 암묵적인 합의였을 뿐이다. 살생부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두고 팔뚝질을 하는 것은 파리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논쟁보다 더 가치가 없는 일이며, 누군가 살생부의 증거가 없으니 한명회가 원래 사람 죽일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사후에 부관참시되었던 한명회의 시체 토막들이 하나로 붙어서 배를 쥐고 웃을 희극이 될 것이다. 이 무가치하면서도 우스운 행동을 지금 대한민국의 자칭 대표방송 KBS의 수뇌부가 벌이고 있다고 하면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그냥 숨죽이고 시청료나 내고 있어야 하나. 

김미화씨가 트위터 상에서 제기한 문제는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믿을 수 없다. 사실 확인이라도 해 달라.”는 푸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쓰리랑 부부에서 한 일자 눈썹을 하고선 음메 기살어를 부르짖던 그 옛날의 코미디언 김미화. 개그콘서트가 막을 올리던 무렵 새까만 후배들과 무대에서 엉켜 막춤을 추던 개그맨 김미화는 KBS에서 기른 사람이었고, KBS를 터전으로 삼던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 자신 KBS를 친정같은 곳이라 일컫지 않는가. 

그런 그가 다큐 프로그램의 나레이터로 등장했을 때 KBS의 고위급에서 대단히 ‘불쾌’해 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프로그램 MC도 아니고 나레이터 정도에 눈살을 찌푸리는 높은 분들 앞에서 “그럼 MC는 괜찮지요?”라고 되물을 직장인이 어디 그리 흔할까.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 사회를 본 이후, 대한민국에서 말빨로 따지면 세 손가락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막말은 커녕 언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평을 받는 개그맨 김제동도 자연스럽게 KBS에서 사라졌다. 여당 국회의원도 “촌스런” 짓에다가 “바보같은” 행동임을 뒤늦게 나마 천명했지만 KBS는 이 촌스런 바보 영구 흉내를 그다지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부끄러워하기는! 한 수 더 떠서 김미화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기염까지 토한다. “블랙 리스트 없다! 있어서도 안된다.”는 게 그 이유다. 

물론 없을 것이다. 나는 KBS가 그렇게까지 바보 천치일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안용지에 제목 블랙리스트, KBS출연 제한 건. 다음의 인물들을 KBS에 출연시키지 않고자 합니다. 사유 1.2.3.달아서 부장 국장 본부장 결재 득하여 사장 사인 받은 그런 ‘블랙리스트’ 따위가 있을 리가 있는가. 그래도 고등교육 받고 전두환 때 “대통령 각하가 출국하시니 해가 뜨고 입국하시니 단비가 내립니다.” 따위의 미사여구를 생산할 줄 알았던 재원들이 아닌가. 나중에 누구 목을 조를지 모를 블랙 리스트 따위를 왜 만든단 말인가. 그냥 한명회가 했던 것처럼 손짓 한 번 헛기침 한 번이면 되는 일을 말이다. 

살생부가 있건 없건 대신들은 죽어 나갔듯이 블랙 리스트에 관계없이 여당 국회의원이 봐도 부당하게 한 방송인은 KBS에서 사라졌고, KBS를 친정으로 여기는 한 방송인은 대체 내가 왜 당신들로부터 배제 대상인가를 묻고 있다. 그런데 시청료씩이나 받는 KBS의 대응은 “블랙리스트 없다. 없는 걸 있다고 했으니 너 명예훼손!!”이다. 그래서 KBS의 명예를 위해서 KBS를 친정으로 여기는 한 방송인에게 소송을 건다. 뭐 이런 칠삭둥이가 다 있는가. 

한명회는 그래도 목숨을 걸고 수양대군을 도왔다.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기습하는데 실패했다면, 그래서 일이 틀어지고 궁궐의 금군들이 수양대군의 입궐을 막았다면 아마 생살부에 첫 번째로 오를 이름은 한명회였을 것이다. 그가 살생부를 작성했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비장한 필체로 쓰여졌으리라. 

하지만 오늘날의 한명회들은 비장함은 커녕 그 경박함이 부관참시되어 불태워진 한명회의 뼛가루 같고 낯살의 두꺼움은 남한산성 성벽 두께보다 더하다. 권력자에 의해 간택되어 낙하산 타고 착륙한 이후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그래 놓고 시청료는 무려 기백 퍼센트를 인상받겠다고 하는 저 인사들에게는 조선 왕조 최고의 영화를 누린 한명회조차 고개를 들지 못하리라. 

한창 권세를 누린 후 한명회는 전원으로 낙향하여 자연을 벗하며 유유자적한답시고 꼴랑 한강 건너에 으리으리한 정자를 지었다. 그것이 압구정이다. 

그런데 그는 자연과 벗하기 위해 압구정을 찾은 적은 없고 명나라 사신들과 질탕하게 노는 장소로만 압구정을 썼다고 한다. 그 간특함과 속없음에 많은 이들이 개탄해 마지 않았고 임금 성종도 못마땅해했다지만 한명회는 거침이 없었다. 이를 두고 한 선비가 남긴 싯귀 중 일부는 이렇다.


 有亭無歸去 (정자가 있어도 돌아가 쉬지 않으니)

 人間眞沐狙 (진실로 갓 쓴 원숭이로다)

나는 문득 이 시를 이렇게 바꿔 보고 싶어진다. 

 有過無悟悔 (잘못이 있어도 깨닫고 늬우치지 않으니) 

 人間眞放猿 (이 인간들 진실로 마이크 들고 방송하는 원숭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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