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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살펴보는 옷치긴 왕가에 대한 두서 없는 정리 아홉번째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229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2
조회수 : 56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9/12 1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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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그러니까 평양 바로 옆을 보시면 강동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수도인 개경 지척에 위치한 곳으로 교과서에는 보통 한 두줄로 끝나는 이야기이지만 지도를 본다면 요수국의 잔당들이 밀고 내려와 벌어진 3년여에 걸친 전쟁이 일어난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요.


고려사 고종세가의 기록을 보면 '12월 초 몽골의 원수인 카진과 질라가 병력 1만을 이끌고 동진의 만노가 보낸 완안자연完顏子淵의 군사 2만명과 합세하여 거란족을 치겠다고 선언하고는 화주和州 맹주猛州 순주順州 덕주 德州 등 네 개 성을 파괴한다음 강동성江東城으로 향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거란의 잔당을 토벌하겠다는 구실로 1218년 고려로 들어온 몽골의 원수 카진과 잘라는 고려의 여러 성을 파괴하고 거란의 잔당들이 웅거하고 있던 강동성으로 진입했는데 이듬해인 1219년 그러니까 고종 6년에 강동성을 함락시켜 3년여에 걸친 거란족의 횡포를 끝냈습니다.

이후 몽골의 원수인 카진과 잘라는 고려 원수부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등과 양국을 대표하여 형제의 맹약을 체결했는데, 이때의 잘라는 물론 본명은 아니고 실제 이름은 이후 1231년 음력으로 8월 28일 고려로 쳐들어 왔기에 유명한 살리타이撒禮塔입니다,

칭기스칸이 서역 정벌을 계획하면서 1217년 이래 금국의 정벌을 잘라이르 가문의 무칼리에게 일임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금국을 정벌하는 작전의 일환이자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던 정고려전征高戰 그러니까 고려에 대한 정벌은 사실상 잘라이르 가문에서 지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 옷치긴은 이 지역의 행정과 재정을 맡고 무칼리는 정복 사업을 맡아오다가 뒷날 그의 후손들이 요동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데 이는 알탄우룩 Altan urug 그러니까 황금씨족을 통한 정책으로 고려의 심왕瀋王 즉 심양왕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며, 이 들 모두가 몽골 고려사와 밀착하게 연계된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고 고려와의 형제 맹약은 1212년 야율유가를 지원해서 금의 변방을 교란한다는 작전과 마찬가지의 선상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 것은 우리가 아는 몽골의 일반적인 전쟁, 즉 약탈전쟁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을 볼수가 있는데 가령 1213년 가을 금 나라를 침입한 몽골군은 하북河北 하남 河南 산동山東 지역 수천리에서 살육과 약탈을 일삼다가 돌아가는등 '사냥'에 앞장선 결과 1207년 금나라 아래에서 약 768만호 정도 되었던 인구가 1230년대 우구데이 칸이 조사한 호구 조사에서는 1백만호로 급감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환경을 보호한것이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말 그대로 쑥을 재배한 결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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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약탈 전쟁을 수행한 원인을 보자면 직접적인 지배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문화적, 사회적, 전략적인 측면에서 훗날의 저항과 보복의 근원을 삭초제근하기 위한 전략적 계산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1219년 몽골이 고려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은 이러한 약탈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1212년 야율유가와 맺은 동맹과 그 성격이 일치합니다, 즉 금나라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몽골은 금 나라 동쪽에 있는 동맹국을 가짐으로서 금나라를 사방에서 압박할수 있는 전략적 효과를 기대한 것이지요.

즉 금나라의 배후에 바로 인접해 있는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서 차후에 재개될 대對 금 공세에 있어 중요한 포석을 다지는 것으로 볼수가 있으며 이러한 관계에 따라 추후 몽골은 동진을 경유하여 일정한 조세와 공물을 고려로 부터 거두는 것을 약정하게 됩니다. 

이 시기는 칭기스칸이 대규모의 서역 원정을 강행하고 바로 금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면서 몽골 제국 전역으로 부터 막대한 군비를 부담하기 위한 착취가 심각했습니다, 또한 항복했던 서하가 칭기스칸과 주력 부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멋지게 뒤통수를 후려치며 금과 연계해 대규모 반격전을 시작함에 따라 무칼리의 고전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따라서 고려에 대한 수탈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나 고려는 언제까지나 전시 체제하의 경제를 아니 그냥 수탈을 버텨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1219년 즉 고종 6년부터 시작된 양국의 이러한 관계는 몽골의 사자 저고여의 피살 사건 직전인 1224년 고종 11년까지 유지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몽골 사신의 왕래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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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11번이나 왕래를 하면서 나온 주된 요구는 황태제 국왕에 대한 공물이었습니다, 특히나 1221년 8월 저고여를 통해 고려에 요구했던 물품은 수달피 1만장, 가는 명주 3천필, 가는 모시 2천필, 솜 1만근, 용포묵龍圑黑墨 1만정丁, 붓 2백자루, 종이 10만장, 자초紫草 5근, 홍화葒花, 남순藍荀, 주홍朱紅 각 50근, 자황雌黃, 광칠光漆, 동유桐油 각 10근 등입니다.

말 그대로 옷감부터 심지어는 기화요초까지 빨대를 있는대로 꽂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 시기 동국이상국집에 남아 있는 고려가 황태제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매양 명을 내려 한없이 요구하니 이 소국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한정된 산물로 무한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못함을 아실겁니다." 라고 말하고 있어 공물 요구에 큰 곤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황태제 국왕의 요구에 고려가 큰 곤란을 겪고 있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또한 일련의 사신파견과 공물 징수를 통하여 황태제 국왕의 세력이 고려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글에 잇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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