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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거짓말중에 가장 큰 거짓말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짓말이다.
게시물ID : lovestory_757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06m
추천 : 10
조회수 : 138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9/14 19: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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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불교에서 가장 큰 죄로 꼽는것이 살생,도둑질,거짓말,음란한성생활 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 중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데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었다는 거짓말로
이 큰 거짓말을 하면 아무리 참회를 해도 그 악업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본인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스스로 자기만족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데 방해를 하는것이 일차적인 잘못이겠지만
잘못된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전해서 다른 중생들의 해탈마저 가로막는 죄를 범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 깨달음을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의 기준은 뭔지 참 아리송합니다.

해탈고시(?) 같은 시험이 있는것도 아니고 말이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논의는 한국 불교계의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성철스님을 필두로 한 돈오돈수파와 법정스님을 필두로 한 돈오점수파...
돈오점수는 고려의 스님 지눌의 사상 그대로
돈오(순간적인 깨달음)를 한 후에도 점수(꾸준한 수행)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고
돈오돈수는 점수가 필요하면 돈오하지 못한것이고 돈오했으면 그냥 돈수로 끝난것이라는 이야기이죠...

뭐 저런 말장난으로 그리 큰 논쟁을 벌이나 싶을수도 있지만
사실 이게 어쩌면 불교 수행의 근간과 다름없기에 그냥 허투루 넘어갈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는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최대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법을 설하였으면서도
그에게 도전해오는 외도들의 공격에는 칼같은 논리적 반박으로 응수하기도 했던 달변가였습니다.

하지만 부처가 존경받은 이유는 단지 그의 교리적 완성도때문이 아니라
깨달음 이후 그가 보여주었던 45년간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는 죽을때까지 탁발에 참여하였고
계율을 정함에 그의 독단이 아닌 대중의 뜻을 물어 결정하였고
결정된 계율은 부처 본인도 절대 어기지 않고 가장 철저히 실천하였습니다.
나와 남의 분별심이 없어서 전쟁, 기아, 역병 등의 재난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는데에도 앞장서서 달려갔었죠...
매순간 알아차리는 생활로 다른 이들에게 설법이 아닌 행동거지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았구요...

과연 부처는 그 모든 순간을 수행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죠...'내 나이 일흔이 되니 마음가는대로 해도 (하늘의 뜻에) 거슬림이 없더라...'
부처도 그저 그랬을 겁니다.

돈오를 한 이후에도 개망나니 같은 삶을 산다면 그것은 돈오하지 못한것이겠죠...
하지만 돈오를 한 이후에도 억지로 참고 수행한다는 생각이 남아있다면 그것 역시 돈오하지 못한것이겠죠...

부처는 수행을 현악기에 비유했습니다.
줄을 너무 팽팽하게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게 조이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중도를 이야기했죠...

수행은 집착을 버리기 위한 것이니 수행 자체를 집착해서는 안되는거니까요...

중생을 구제한다는 서원은 그저 언어의 표현을 빌렸기에 중생구제이지
사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기에 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중생을 구제하려는것도 집착이고 아직 구제하지 못한 중생이 많다는것도 집착이죠...

http://todayhumor.com/?freeboard_1044163
예전에 썼던 글인데 다시 좀 재탕해 보겠습니다.

이미 입적하셨지만 생전에 세계4대생불로 유명하셨던 숭산스님은
참선 수행의 결과 알아야 하는건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교 수행은 순간 순간의 알아차림이 연속되는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안다'라고 생각하면 그 알아차림에 대한 걸림돌이 됩니다.

부처는 이 세상에 상주불멸하는 존재는 없어서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을 폈습니다.

나는 내 가족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제 본 어머니와 오늘 본 어머니는 다릅니다.
나는 매일 먹는 밥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침에 먹은 밥과 점심때 먹은 밥은 다릅니다.
나는 내 발걸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첫번째 한걸음과 두번째 한걸음은 다릅니다.

그 모든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 불교의 수행입니다.

하지만 '안다.'라는 생각이 그걸 가로막습니다.

불교 참선 수행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저 그렇게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며 사는것입니다.

http://todayhumor.com/?freeboard_1033905
위 주소의 글을 좀 읽고 와 주셨으면 합니다.

부처는 모든것이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에
분명하게 본인과 본인의 가르침에도 포함시켰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부처가 없다기 보다는
부처라고 할만한 고정된 형태는 없다는 표현이 조금은 더 가까운 말이겠지만
결국 '부처'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에는 여실지견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진실 그대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무위법이라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닌 원래 있는 것... 유위를 멈추면 곧 무위...

여실지견과 무위법은 결국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http://todayhumor.com/?movie_47442
예전에 무아에 대해서 쓴 글인데 위 주소의 글을 읽고 와 주셨으면 합니다.

부처를 부처라고 칭하는 순간 부처의 본질에서 멀어져 버립니다.
무상함을 무상하다고 말하는 순간 무상하다는 본질에서 멀어져 버립니다.

결국 부처는 부처라고 딱히 칭할만한것이 없는것이고
그저 모든 중생 만물이 부처일수도 있고 부처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모래 알겡이 한 알을 모래라고 칭하는 언어言語이전 수준의 본질
개 한마리를 개라고 칭하는 언어이전 수준의 본질
그것이 부처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다시 부처라고 칭하는 순간 그것은 부처가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부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고 말할수밖에 없습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죽음이 나를 부를때 툭하고 털고 일어날수 있으면 된다.'

불교 최초 경전인 숫따니빠따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알았다.'

그저 순간 순간을 알아차리고 청정하고 충실히 살아서
죽음이 찾아왔을때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결국 깨달았다 아니다 라는건
말 몇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게 아니라 본인의 삶으로 증명해 내어야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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