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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근대화의 정의
게시물ID : history_231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털깎기
추천 : 10
조회수 : 706회
댓글수 : 18개
등록시간 : 2015/09/24 15:06:31
멜서스는 자신의 저서 인구론에서 자신의 정치적 추론을 전개하기 위해 세가지 대전제를 내걸었는데,

1. 인간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대된다.
2.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3. 하위계층은 자신의 경제적 고난을 타파하기위해 아이를 낳고, 이것이 인구증가를 부른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이미 아실겁니다.

이미 혁파된 이론인지라 아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멜서스 트랩은 산업혁명시기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인류의 생산능력이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생산능력이 증대되고 더많은 숫자가 태어나고, 전쟁과 기아 질병에 시달리면서 인구는 줄어들고, 다시금 이 쳇바퀴를 굴린다는 그의 추론이 박살난 것은 산업혁명시기의 어마어마한 생산능력 증대때문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시기 1801년 830만명이던 인구가 고작 50년만에 1680만명에 이르도록 증가하였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단순히 영국이 해당시기 급격히 정력과 번식력이 좋아졌다는 것이 아니라면 식량생산량이 과거에 비해 급증했음을 알려주는 것일 겁니다. 1인당 생산량이 폭증하여 인류의 시계는 미친듯이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근대화 이전에, 저는 근대의 시작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에 이 산업혁명 시기를 들고자 합니다.

제가 말하고자하는 근대화는 이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주장하시는 근대화의 양상은 조선과 영국 산업혁명 초기에 유사하게 일어났을 수 있습니다.
조선은 식민통치를 시작으로 일제에게서 넘겨받은 강한 종의 씨앗과 발전된 농법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는 식량생산량의 증대를 틀림없이 불러왔을 것입니다. 부실한 상업적 구조와 공업적 능력 또한 일변하여, 일제의 수탈을 위한 산업 인프라도 건설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전보다 이촌향도의 형태도 불러왔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를 인정못해서 민족주의 사학의 뜨거운 사명감을 안고 부들부들했다는 게 아닌데, 자꾸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셔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 변화는 틀림없이 존재했으며 이는 GDP성장등 괄목할만한 통계 지표적 성장을 나타내었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럼 근대화는 일어난 것이 아니냐라는 게 질문 아니겠습니까? 근대화는 진행중에 있었다는데에도 동의합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

시간을 뛰어넘어서 1945년 해방의 시기로 가면, 순조롭게 성장세를 보이던 조선의 GDP는 갑작스레 붕괴합니다.
허수열 교수는 이에 대해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은 1941~1945년 사이 전쟁으로 인한 일본 제국주의의 붕괴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고 했고, 김낙년 교수는 1946년 1인당 GDP는 해방 전 정점의 43.5%로 떨어졌다고 밝혔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근대화가 산업혁명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럼 산업혁명이 조선에 얼마나 작용했는가 하는 분석이 지금 필요한 것이 아닌지요? 식민지배 상황에서 분명히 조선의 인구수 또한 증가합니다. 영국의 성장폭보다 낮은 60%선이지만(일제의 인구 조사 초기부터 계산하면 두배입니다만, 초기 데이터의 불신성을 들어 허수열 교수님등은 40%~50%대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괄목할만한 성장임에 틀림없죠.
그래서 영국의 산업혁명과 같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해방 후 GDP변화는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요?

제가 지적하는 첫번째 문제점은 이 사이 있었던 산업기술의 발달은 다분히 일제에 의존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이란 단순히 공장이 늘어나고, 기차가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산량의 압도적 증가는 단순히 인프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기술의 발달과 자본축적 양쪽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된 겁니다.
막상 해방후 생산설비와 산업인프라가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락한 GDP는 분명히 축적된 자본과 기술이 부족함에서 나오는 결과일 겁니다.

둘째로 수탈의 존재입니다.
어떠한 산업화 사례에서도 수탈의 모델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태동으로 성장한 자본가 계급은 하위계급인 노동자를 착취하여 그 이익을 불리고 있다는 것이 맑스의 주장입니다. 
조선에도 수탈은 있었으니 동일한 것이 아니냐 하시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자본가 계급의 힘은 지금과 같이 범국가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수탈은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내수 경제에서의 분배문제라는 거죠. 당시의 경제는 말하자면 개발도상국 모델과 같아, 생산요소를 더 투입하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관계였기에 더 많은 노동자를 더 적은 임금을 지불하며 수탈을 가속화할 수록 생산량은 폭증하며 국내의 부 또한 크게 증가합니다.
이렇게 증대된 부를 자본가 계급은 다시 생산요소에 투입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이 수탈의 경우 내수 경제에서 다시금 돈이 도는, 국외로 유출당하지 않는 경우였습니다. 이 자본주의적 변화가 산업혁명을 가속화 합니다.
조선의 경우, 자본가 계급에 해당하는 계층이 일제와 줄이 맞닿아있는 경우도 많았고, 일제 본국의 출신들도 많았을 뿐더러, 무시무시한 공출도 존재했습니다. 말그대로 조선을 밑뿌리까지 탈탈 털어간 일제의 수탈은 즉각 국외로 부를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1941~1945년 마지막 기간은 그 절정을 향해 갈 때죠.
일제가 원하는 정도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일제는 더 많은 생산요소의 투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기술적 발전을 요구하지도 않았고요.
대다수의 비숙련 기술자들에게 기술전수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생산설비를 다루는 기술적 부분 이외의 경영적 능력도 조선에게 이전되었다 평가하기 힘듭니다. 이 수탈기간동안 사라진 부와 축적되었어야 할 기술력의 빈 공간이 1945년 이후 해방 뒤의 한국의 GDP폭락에 영향을 주고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셋째로 사회구조적, 정치적 변화를 수반하기 힘들었다는 겁니다.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벌어진 인류의 변화는 그야말로 다이나믹합니다. 제국주의가 등장한 이유가 바로 자본주의적 경제와 산업혁명의 생산능력 때문이고요,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피폐한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헤겔은 근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1. 종교개혁에 의한 사상적 자유.
  2. 시민사회의 성립에 의한 사회적 자유.
  3. 개인들이 각자의 목적을 마땅히 자유롭게 추구.
  4. 1, 2, 3의 것들을 상호간에 조정하면서 권리로서 보증하기 위한 계몽.
  5. 합리적으로 하나의 관계 = 국가를 형성하며 운영해가는 시대와 [세계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동반하게 된 원인을 꼽으라면 바로 산업혁명일 겁니다. 만약 조선에 일어난 산업화가 영국의 산업화와 동일하다면 어째서 조선에는 이러한 변화가 즉각 나타나지 못했습니까? 식민지배의 영향이겠죠.
주권이 없는 국가와 국민에게 어떠한 피폐한 삶이 던져지는지 조선인만큼 잘 알만한 사람들은 드물었을 겁니다.
지주계급은 대부분 국가반역자이며 친일파들 뿐이고, 엄청난 자산이 일제의 소유로 돌아갔습니다.
영국의 지주계급의 출현과 조선의 지주계급의 출현은 전혀 다른 이유를 바탕으로 했으며, 따라서 성향도 전혀 다릅니다.
근대화의 시작은 산업혁명으로 시작할지 모르나 그 진행은 이후 사회, 정치, 경제적 변화를 낳습니다.
이 부분이 기형적 형태를 띠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는 점차 시간이 늦춰진 겁니다.
눈을 뜬 조선의 민족정신과 시민사회에의 요구는 조선인의 바람이 아닌 미국의 종전선언과 일제의 항복으로 이뤄집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정부의 출범에 비로소 시민사회에의 요구는 이뤄지고, 독재와 산업화를 건너오면서 대한민국은 근대화의 못다한 숙제들을 진행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근대화라는 평가가 어디까지 이뤄지는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근대화라는 성격적 변화가 더디게나마 일제치하 조선에도 일어났다는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다른 나라의 근대화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근대화는 다시금 정부 출범후에 이뤄지기 시작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 근대화라고 통칭하자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오히려 근대화가 아니고 경제적 양상의 변화와 계몽적 인식 변화만을 따로 평가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근대화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고, 다른 근대화와 이 식민지배하의 근대화를 나눠서 분석하면서 근대화라는 것이 대체 언제 이뤄지고 있는가를 아직은 평가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부족한 자료에 죄송함을 표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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