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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의 피난길(2부)
게시물ID : history_242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3
조회수 : 228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11/24 00: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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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집니다. 글의 작성 기준은 1부와 동일합니다.

중간에 작성자의 사견이 삽입됨에 주의 하실것이며 욕설도 간혹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5월 1일. 임금이 개성에 도착하다.

임금이 동파관(東坡館)을 떠나 판문(板門)에서 점심을 들고 저녁에 개성(開城) 도착하여 한숨 돌린다.

판문(板門)에서  "풍덕 군수(豐德郡守) 이수형(李隨亨)이 길에서 배알하고 약간의 어선(御膳)을 준비했다. 백관들도 먹었고 아래로 군량과 말먹이까지도 모두 준비해 주었으며 따로 쌀 5석을 바치니 상이 즉시 호위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선조실록

이 부분에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백관들도 먹었고"를 "百官亦得食" "득식"으로 표현한다. 밥을 얻어 먹었다는 뜻이다.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 동파관에 도착하자 한양에서 따라 오던 아전과 병사들이 대부분 도망 간다.

도망병들은 어차피 임금을 호위하자니 보급품도 없이 굶어 쓰리질 지경이고 왜적의 기세가 너무 급박하기도 하여 선조 임금을 거칠게 따라 잡으려는 왜적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살 길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효연(具孝淵)은 언제 갔는지 모르게 도망 갔고 대신 경기 감사 권징(權徵)을 불러 지휘하게 하니, 민가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승지 등이 노하여 꾸짖어도 대꾸도 없었다고 한다. - 기재사초(寄齋史草)

다행히 황해 감사(黃海監司) 조인득(趙仁得)과 서흥 부사(瑞興府使) 남억(南嶷)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도착하였으므로 호위하고 떠날 수 있었다.

내시가 전하기를 ‘궁인(宮人)이 어제부터 끼니를 굶었으므로 조금 쌀을 구하여 시장기를 면해야 떠날 수 있겠다.’고 하였는데,

마침내 서흥 부사가 이끌고 온 병졸이 싸가지고 온 개인 양식을 징발하여 밥을 지어 먹고 출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금이 장단(長湍)에 이르니 황해 감사(黃海監司) 조인득(趙仁得)이 장막을 설치하고 밥도 짓고 반찬도 들여 피난행렬은 다행히 제대로 된 밥을 며칠만에 먹었다고 한다. 

밥도 먹었고 기운도 차린 선조 임금은 호위병력과 장수들 얼굴도 잘 모르는 상태라 가장 믿을만한 신하 중 그때까지 벼슬도 없이 임금을 따라오던 서인(西人) 세력의 핵심인 해원군(海原君) 윤두수(尹斗壽)를 불러 푸른 비단으로 짠 주머니를 풀어 주며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아 호위병(扈衛兵)을 모두 지휘하게 하였다.

당시 붓도 먹도, 종이도 없었고 결재 도장 따위는 어디에 누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라 발령서를 만들어 내려 줄 처지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발령서를 격식에 맞게 쓸 사람 조차도 없었다.

임금이 동파관 청사 뒤에서 출발을 기다리며 초초하게 홀로 서 있으니 한 선비가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불러서 이르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신은 최황(崔滉, 당시 의정부 좌찬성)의 아들 별좌(別坐) 유원(有源)입니다.”라고 하자 ,
“너는 공신의 아들인데, 의리상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걱정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하고, 다시 붉은 가죽 띠를 풀어 주면서,  
(국조인물고 권52. 최유원의 유사에 당시 선조임금은 가죽 띠와 칼까지 벗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띠고 나를 잊지 말라.”고 하였다.  - 기재사초
임금이 왜 자꾸 뭘 벗고 풀어 내려 주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몇 사람 더 지나가면 아예 속옷만 입고 계실 모양새다.
최황(崔滉)은 동인(東人) 계열의 사람이다. 서인(西人)이고 동인(東人)이고 당장 임금 곁에만 있어준다면 그는 충신(忠臣).


공석 중인 예조 판서에 부제학이던 정창연(鄭昌衍)을 , 홍인상(洪麟祥)을 부제학으로 삼았는데, 모두 구두로 너! 부제학!, 너! 예조판서! 하며 제수 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은 어느 곳을 막아야 하고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으로 피난을 가야 할지만 논의한다.

의주나 경성 등의 지역이 거론 되었으나 선조 임금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장 빠르게 중국땅으로 넘어 가는 길.

 

5월 초하루. 이날의 『선조수정실록』을 보자.

상이 동파관(東坡舘)을 출발하였다. 이날 아침에 임금이 대신 이산해 유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괴로운 모습으로 이르기를,
이모(李某, 이산해) 유모(柳某, 유성룡)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하고, 또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그에게 하문하니,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임금이 이항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거가가 의주(義州)에 머물 만합니다.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자, 윤두수가 아뢰기를,
“북도(北道)는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며 함흥(咸興) 경성(鏡城)은 모두 천연적인 요새로 믿을 만하니 재를 넘어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함경도 두메산골, 4군 6진 방향으로 가자는 뜻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朝鮮)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부(內附, 다른 나라에 들러 붙음. 즉 중국으로 도망간다는 뜻)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하니, 유성룡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유성룡과 반복하여 논쟁하였는데, 유성룡이 말하기를,
“지금 관동과 관북 제도(諸道)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텐데 어떻게 이런 말을 갑자기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산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성룡이 물러나와 항복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자네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瓦解)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항복이 사과하였다. 고 전한다.


용인(龍仁)ㆍ수원(水原)ㆍ광주(廣州) 등 이 왜적에게 점령 당하고 한양의 턱 밑까지 왜구들이 들이 닥치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라 좌수군은 출정 준비를 마치고 좌수영 앞바다에 전원 집결 한다.



5월 2일. 한강 수비가 어이없이 무너지다.

왜적의 선발대가 한강변[漢濱]ㆍ광나루[廣津]ㆍ마전(麻田)ㆍ사평(沙平)ㆍ동작(銅雀) 등에서 일시에 떼[桴. 뗏목]를 타고 마구 건너다.

 

(선조수정실록)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제천정(濟川亭)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쏜 포환(砲丸)이 정자 위에 어지러이 떨어지자,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감히 적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군기(軍器)를 모두 강에다 넣어버린 뒤에 행재소로 후퇴하여 도망하였다.


(난중잡록) 조선군은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언제 혼자 도망치고 없어진지 아무도 몰랐고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도망친 지휘관을 따라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다.


경성 도검찰사(京城都檢察使) 이양원(李陽元)도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이 사라지자 한양을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난중잡록) 5월 2일.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嶺]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켜 동ㆍ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연 사람의 형적이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다.

 

(선조실록) 적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르러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시설이 모두 철거된 것을 보고 의심쩍어 선뜻 들어오지 못하다가 먼저 십수 명의 군사를 뽑아 입성시킨 뒤 수십 번을 탐지하고 종루(鍾樓)에까지 이르러 군병 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 입성하였다.


왜적 입장에서는 한강변 도강과 한양 도성에서 대규모 전투를 각오 하지 않았을까?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수도를 타국에서 점령하는데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입성(入城) 하는 사례가 이렇게 흔한 일인가 말인가?


잠시 숨을 돌릴 틈이 생기자 임금은 임금데로 전란(戰亂)의 책임을 산하들에게 돌리고 신하들은 신하들데로 반대파에게 책임을 돌리는 등 다시 당파 싸움이 시작된다. 배만 부르면 지랄들을 하고 있다.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는데 첫마디가,

“오늘날의 사태를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신하들이 이산해(李山海)가 맨 먼저 파천을 주장했다고 합동으로 이산해를 먼 곳에 유배 보내자고 청하자 선조 임금은 이산해의 삭직(削職)을 명했다.

임기가 끝나고 막 돌아온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 신할(申硈)이 수하(手下)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임금을 호위하다.

신할(申硈)은 충주에서 패하여 죽은 신립(申砬)의 동생이다.

선조 임금이 자신을 호위하는 장수들 중 그나마 용맹하고 믿을만한 신할을 곁에 두려 하였지만 아직까지 한양의 퇴각 상황을 모르는 모든 신하들이 신할을 한강으로 보내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우기니 어쩔수 없이 선조 임금은 신할을 한양으로 보낸다.

신할은 형의 복수를 위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왜구를 때려 잡으러 떠나다.

승지 신잡(申磼)과 정랑 이홍로(李弘老)에게 임금이 친히 쓴 교서를 한양으로 보내어 한양의 수비군과 백성들을 독려한다. 

​승지 신잡(申磼)은 신립(申砬)과 신할(申硈)의 형이다.


 

5월 3일. 한양이 왜적에게 점령 당하다.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지 20여일 만에 한양이 점령 당함.

한양 점령 소식을 들은 선조는 잽싸게 짐을 싸서 평양으로 다시 떠날것을 서둘러 재촉하다.


(선조실록) 이때 ​윤두수(尹斗壽)가 “난을 당하면 임금은 마땅히 진려(振勵)해야 하고 신하는 마땅히 사직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성상께서 요동(遼東)으로 건너가실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치첩(雉堞)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천안(天顔)이 초췌함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걱정스럽습니다.”라고 간곡하게 이야기 하나 선조 임금은 단호박도 아니고 단호하게 무시하고 평양으로 출발.

당시 개성의 수비병력은 겨우 9백 30여명이라고 함.​

 

개성(開城)에 도착한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김명원(金命元)에게 명해서 임진강(臨津江)을 차단하게 하다.

좌의정(左議政) 유성룡(柳成龍)은 전란의 책임으로, 우의정(右議政) 이양원(李陽元)은 한양 수비 실패 등으로 경질 시키최흥원(崔興源)을 좌의정에, 윤두수(尹斗壽)를 우의정에 임명하다.

(선조실록의 기록과 다른 기록들이 날짜가 며칠 정도 차이 난다. 난리통에 기록들도 혼란스럽다.)


당시 내의원 부제조(內醫院副提調)로 선조 임금의 피난 길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관리 중 한사람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탁(琢)의 저서인 약포집(藥圃集)의 피난행록(避難行錄)의 날짜별 내용이 좀 더 사실적인듯 하다.

​"5월 1일(경신) 사간원(司諫院)이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를 논박하여, 주상께서 삭탈관작을 명하였다."

"5월 2일(신유) 최흥원(崔興源)이 우상(右相)이 되었다... 주상께서 좌상(左相) 유성룡(柳成龍)의 파직을 명하셨다. 이에 앞서 이미 정철(鄭澈) 등 몇 사람들을 모두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과 도승지(都承旨)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데리고 평양으로 먼저 가게 하다.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을 유배지에서 불러 오다.


하급 관리들과 병사들끼리 밥 해먹는 문제 때문에 칼을 빼들고 임금 앞에서 싸우기까지 하다. 결국 몇 몇의 목을 베고 나서야 진정되다.


황해도(黃海道)에서 6천여 명을 징병(徵兵)하다.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과 좌수사 박홍(朴泓)이 각각 우후(虞候, 병마절도사 아래 서열 2위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 변응성(邊應星),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 풍기 군수(豐基郡守) 윤극임(尹克任), 예천 군수(醴泉郡守) 변양우(邊良祐) 등과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의 고갯길)을 넘어 북쪽으로 벌써 퇴각하였다. - 난중잡록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병사들을 이끌고 올라오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 경성이 벌써 함락되고 대가(大駕,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 같다는 소문을 듣고 병사들을 철수하여 본진으로 돌아갔다. 

전라도 방어사(防禦使곽영(郭嶸)도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종사관 이용순(李用諄) 등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으로부터 돌아와 전주(全州)로 퇴각하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까지 도망처 온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의 목을 치다.


임금이 전라도쪽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 할 사람을 구하나 누구하나 사지(死地)로 가기 싫어서 지원자가 없다.

보덕(輔德) 심대(沈垈)가 자원해서 가겠다고 하여 보내다. 심대(沈垈)의 주요 임무는 충청, 전라도 병사들은 그쪽 지방을 지키지 말고 속히 한양을 탈환하고 임금을 모실 수 있도록 각 지역의 장수들을 독촉하는 임무다.

(기재사초)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멀리 강화(江華)로 들어가고, 황해 감사 조인득(趙仁得)이 왜적을 피하여 섬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우부승지 심대(沈岱)를 경기 감사로 삼고, 동부승지 유영경(柳永慶)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심대는 떠날 적에 참판 심희수(沈喜壽)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사람 씀이 이 무슨 짓이오. 나는 사지(死地)로 가고 공은 제 때를 얻었구려.”

하니, 심희수는 대답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조정에서는 공이 매우 의분심이 많아서 평탄하고 험난한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 자급을 올려준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또 자급을 뛰어 올려서 보내는 것이오. 그런데도 감격하고 분발하는 뜻은 갖지 아니하고 먼저 원망하는 빛을 품는단 말이오. 적이 평양에 와 있어서 아침 아니면 저녁에 떠날 것이어서, 군신 상하가 오히려 죽을 곳을 알지 못하는데, 공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시오.”

하였으나, 심대는 그래도 탄식해 마지 않았다. 고 전한다.

오후에 한양으로 갔던 신잡(申磼)이 쫓겨 돌아와 돌아와  “적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습니다.”고 하였다.

선조 임금의 첫 반응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속히 피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 선조실록


신하들이 제대로 준비 해서 저번처럼 밥이라도 굶지 않게 내일 출발 하자고 하나 임금은 주저 없이 "짐 싸서 오늘 밤이라도 출발!!!"


저녁 무렵에 임금의 행렬이 바삐 출발하고 당연히 상하(上下)의 질서도 없이 무척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밤에 금교(金郊)에 도착하여 신하들은 모두가 무려 풀밭에서 노숙하다. (앞으로 자주 풀밭에서 자게 된다.)

이때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도승지(都承旨) 한응인(韓應寅)이 임금의 행차와 만나다.

한응인(韓應寅)을 우의정(右議政)이 된 윤두수(尹斗壽)를 대신하여 순경사(巡警使)로 삼아 호위군을 거느리게 하였다.

 

 

점령 당한 한양 도성안에서는 처음에 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달아나 피난갔다가 얼마 후에 왜적의 선무공작에 도로 모여 방리(坊里)와 시장이 예전보다 더 가득차서 왜적과 더불어 서로 섞여 물건을 사고 팔았다고 한다.

물론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왜적에게 빌붙은 조선사람도 많았고 그 조선사람들이 같은 조선사람을 고발하거나 혹은, 왜적에게 약간의 권한을 얻어 조선사람들 중 의병이나 중요인사를 색출하여 체포하여 죽임을 당하게 하는 사례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백골이 종루(鐘樓) 앞과 숭례문(崇禮門) 밖에 산더미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전라 좌수군은 같이 출전 하기로 한 전라 우수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여도 수군(呂島水軍) 소속의 황옥천(黃玉千)이라는 병사가 출전을 앞두고 자기 집으로 도망 치고 만다.

이순신 장군이 도망친 수군을 잡아와 목을 베다.

 

 

5월 4일. 피난길에 다시 임금과 신하들이 굶다. 

선조 임금이 송도(松都, 개성)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하루는 산골짜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밤새도록 수라를 올리지 못해 촌 여인이 울면서 조밥을 드렸다고 한다.

임금이 그것을 드시고 이르기를, “이 맛은 팔진미보다 낫다. 조의 귀중함이 이와 같구나, 이와 같아.” 하였다. 백주부 오셨나?

또 하루는 비가 심해 갈 수가 없어서 길가 촌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임금은 방앗간[杵室]에서 자는데 신하들 중 임금 곁에서 따르는 자가 1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신하들은 빗속에 엎드려 종일 굶주렸다.


선조 임금은 왜적에게 쫓기는 와중에 방어 계획이나 남쪽 백성들의 어려움 등은 한마디도 궁금하지 않다.

오로지 평양까지 가는 가장 빠르길이 어디인지. 며칠 더 걸리는지. 한양 백성들이 전부 자기를 배반 했는지. 그런것만 물어본다.


임금의 행차가 흥의역(興義驛)에 머물렀다가 금암역(金巖驛)을 거쳐 평산부(平山府)를 지나 보산역(寶山驛)에서 숙박했다. 

 

 

영남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남원(南原)에 도착하다.

김성일이 애초에 체포한다는 어명에 따라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올라 갔으나 사면을 받고 도로 초유사의 책임을 받게 되었는데, 남원에 도착하여서 비로소 조정이 서쪽으로 옮겼음을 알고 통곡하였다.

영남 지역의 책임자가 도착하자 지역의 분위기가 조금씩 긍정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다.


곽재우(郭再祐)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다.

주력이 북상한 왜적들은 부산에서 최전방까지 10리~4,50리 사이의 주요 길목에 소규모 부대만 잔류 시켜 연락망을 구성한 상태였다.

적의 대규모 부대가 없는 후방에 의병들이 꾸준히 왜적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날 축시(丑時, 새벽 1시 ~3시 사이) 이순신 장군의 전라 좌수영의 수군들이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모두 85척의 배를 이끌고 벼르고 벼르던 왜구 소탕을 위해 출항하다.

4월 30일에 전라남도 해남(南)에서 출항하기로 한 전라 우수군은 아직 도착이 지연되고 있다. 어쩔수 없이 전라 좌수군은 독자적으로 출전한다. 이번 출전에서 거북선은 참여 하지 않다. 출전 첫 날. 전라 좌수군은 왜적의 배를 찾아 천천히 동쪽으로 수색하면서 저녁에 소비포​(所非浦)에서 하루밤을 쉰다.


 

5월 5일. 임금이 하루에 1백 40리를 달려 도망가다.

임금의 행차가 새벽에 보산(寶山)을 떠나 비를 맞으면서 안성(安城)을 지나 용천(龍泉)에서 주정(晝停, 간략하게 끼니를 떼움)하고 해질녘에 봉산(鳳山)에 닿았다.

용천(龍泉)의 관아에서 주정(晝停)하는 동안 좌의정 최흥원(崔興源), 우의정 윤두수(尹斗壽), 좌참찬 한응인(韓應寅), 예조 판서 정창연(鄭昌衍), 우부승지 민여경(閔汝慶)과 가주서 박정현(朴鼎賢), 검열 김의원(金義元) 등 과 회의를 하고 왜적 때문에 중국 황제의 생신 축하 선물은 마련 할 수 없다고 보고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기로 하다. 이런건 절대로 까먹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 놈의 사대.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은 경남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과 백성들을 모으고 도망친 수령들을 불러 독려한다.

전라 좌수군은 당포(唐浦) 앞바다에서 합동작전을 펼칠 경상 우수군과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을 기다린다.

이순신 장군은 그때까지 원균의 경상 우수군이 괴멸된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 

5월 6일.  임금의 행차가 아침에 봉산(鳳山)을 떠나 동선령(洞仙嶺)을 넘어 오후에 황주(黃州)에 닿았다.

황해 감사 조인득(趙仁得)이 임금에게,

​“소신의 생각에는, 대가(大駕)가 이미 경성을 떠났으니 평양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당연하나 지금 행차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인심이 뒤숭숭할 뿐 아니라 백관(百官)과 군마(軍馬)들이 굶주려 뒤쳐져 있습니다.

경성 이하는 왜놈들이 길을 자세히 알고 있지만 서로(西路)는 어찌 그렇게 빨리 올 수 있겠습니까. 평양은 성곽이 험고하니 지킬 만합니다.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거든 궁속들과 하인들을 단속하여 추호도 범하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 은택을 입도록 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중략>

선조 임금의 단호박과 같은 단호한 대답, ​"(임금의 피난길을 방해 하는) 범하는 자가 있거든 내외를 막론하고 다스리라."


이른 아침에 전라 좌수군은 경상 우수군과 만나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겨우 1척의 배를 이끌고 오다. 망연자실하는 전라 좌수군.

그래도 전라 좌수군이 지원을 오고 주장인 경상 우수사가 모습을 나타내자 경상 우수군 중 달아났던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김승용(金勝龍), 평산포 권관(平山浦權管) 김축(金軸) 등이 판옥선(板屋船) 1척에 같이 타고,

사량 만호(蛇梁萬戶) 이여념(李汝恬), 소비포 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 각각 협선(挾船)을 타고,

영등포 만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 지세포 만호(知世浦萬戶) 한백록(韓百祿),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등 이 판옥선(板屋船) 2척에 나누어 타고 오다. 이날은 거제도 송미포(松未浦)에서 하루밤을 묵다.

당시 가장 강력했던 경상도 수군의 꼬라지를 본 이순신 장군은 가슴속으로 얼마나 막막했으랴...


 

5월 7일. 임금이 평양에 도착하다.

4일만에 밥도 굶어가면서 개성 ~ 평양 구간을 바람처럼... 도망감.

 

피난 하던 와중에 시골 촌로가 껍질을 덜 벗긴 현미밥을 진상 하였고 이게 임금의 수라로 올라감. 그정도로 먹을것이 없는 상황.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송언신(宋言愼)이 군사 3천 여 기를 거느리고 임금을 호위하러 나오다.

이로써 한양을 떠난뒤 처음으로 임금의 행차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기재사초에는 임금의 행차가 5월 8일에 평양으로 들어 간 것으로 기록 되었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송언신(宋言愼)이 이끌고 온 군사가 '3천 여 기'라고 기록하는데 선조수정실록에는 평안도의 '토병(土兵) 1천여 명' 이라고 기록한다.

어찌되었든 이 병력들은 평안도 국경지방 출신들이라 모두 오랑캐들을 상대해 본 정예병(精銳兵)이라고 한다.

​ 

임금은 아직 점령 당하지 않은 남쪽 지역의 군사들이 자기를 지켜주기 위해 안올라 온다고... 좀 올라 왔으면 하고 바램.​

 

옥포(玉浦) 해전(海戰)

해전(海戰)에서 처음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라 좌수군과 경상 우수군의 연합 함대가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하다.

7일 이른 새벽에 출전한 수군은 천성진(天城鎭)과 가덕진(加德鎭)을 지나 정오(正午) 쯤 옥포(玉浦)에 도착한다.

선두에서 수색 중이던 좌척후장 여도 권관(左斥候將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과 우척후장 사도 첨사(右斥候將蛇渡僉使) 김완(金浣)의 신기전(神機箭)을 신호이 쏘아 올려지다. 이 신호는 옥포(玉浦)에 정박 중인 적선(敵船) 50여 척을 발견하였다는 신호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배를 발견 하고는 "諸將勿令妄動 靜重如山事" "장수들은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엄중하게 행동하라"

​이 명령과 함께 조선 수군은 대열을 지어 옥포만의 정 중앙으로 돌진 한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이 첫 출전과 첫 전투에서 왜놈들은 지지고 볶아 왜선 26척을 격침 시키고 조선 수군은 무사히 퇴각하여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 정박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군 피해는 보고되지 아니하였다.

당시 수군은 귀양살이 하던 전직 하급장교들 까지 차출하여 전투선을 지휘하고 화포를 쏘게 하는 등 개전 초반부터 총력전을 펼치는 중이다.

 


5월 8일. 선조 임금. 밥투정, 반찬투정을 하다.

피난길이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임금이 드디어...

“어선(御膳)은 생물(生物)로 할 것이며 수량도 풍족하게 하라. 동궁 이하도 다 이 예에 따르도록 하라.”

따위의 음경 같은 소리만 늘어놓고 계신다....

 

한응인(韓應寅)을 제도 도순어사(諸道都巡御史)로 삼고, 부호군(副護軍, 종4품 무반직) 이천(李薦)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아 임진강 방어선의 김명원(金命元), 신할(申硈)에게 지원세력으로 보내기 위해 병력을 모은다. - 기재사초

 

한창 기세가 오른 조선 수군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다. 

전라도(全羅道) 도사(都事, 종5품) 최철견(崔鐵堅)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선조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 갔다는 소식이었다.

전라 좌수군과 경상 우수군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남쪽에서는 밥도 굶어 씨발씨발 하며 왜적의 배를 힘겹게 격침 시키고 있는데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튀다니... 조선은 금방 망하는 건가?


5월 9일. 신하들이 임금에게 경고 하다.

행 대사간(行大司諫) 이헌국(李憲國), 행 대사헌 김찬(金瓚), 집의 권협(權悏), 장령 정희번(鄭姬藩)·이유중(李有中), 지평 박동현(朴東賢), 이경기(李慶禥), 헌납 이정신(李廷臣), 정언 황붕(黃鵬), 윤방(尹昉) 등 이 임금에게,

“삼가 생각하건대, 국운이 극도로 비색하여 왜구가 쳐들어옴에 각 고을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무너지는 판국입니다.

백만 생령(生靈)들의 희망은 오직 전하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는데 수당지계(垂堂之戒)를 생각하지 않고 경솔히 파천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행궁(行宮)의 참담함과 형색의 처량함은 저 천보(天寶) 연간에 있었던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보다도 심합니다.
...<중략>...
아아, 당당한 서울을 죽음으로써 지켰어야 하는데 마치 헌신짝처럼 버린 소인배의 죄악이 이미 가득찼는데도 그를 보호하기에 급급했으며, 묘당(廟堂)의 대신들은 오직 안일을 일삼아 형적(形迹)을 피할 뿐 다시 충의(忠義)를 발휘하여 떨쳐 일어날 생각은 아예 갖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기필코 지키겠다는 전하의 확고한 뜻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들이 가슴을 치며 통탄해 마지 않는 까닭입니다.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이와중에 ​시강원(侍講院, 세자의 교육 담당 부서)에서 세자에게 수업해야 되는데 교육 기자재가 없어서 약식으로 수업 한다고 보고한다.

 

도성 방어전에 투입 되었던 통어사(統禦使) 이성중(李誠中)이 돌아 왔다.

 “3일에 적이 서울로 들어왔으며 도성에 남아있던 이양원(李陽元)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라고 보고 하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이양원을 파직하고 유홍(兪泓)을 우의정 겸 도체찰사(右議政兼都體察使)임명하고 군사 3천을 주어 임진강 방어선으로 출발하라 명하다.



5월 10일. 무과 과거시험을 치룰 것을 명령하다.​

선조 임금은 부족한 병력과 군관들을 확보하기 위해 무과 과거시험을 치루게 한다.

문과(文科) 보다 무과 시험을 우선 하는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은 지금 이 난리 통에 어서 임진강 방어와 한양 수복이 하루라도 급한데 과거는 무슨...

"​과거는 조금 안정된 뒤에 보일 것으로 이미 통유(通諭, 하급 기관에 지시함)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매어두기에 족(足)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라고 신하들이 임금과 상의도 없고 임금의 명령도 없었는데 임금의 명을 거두어 버린다.

선조 임금은 그냥 아뢴데로 하라고만 하다.

 

이와중에 홍문관 부제학 홍인상(洪麟祥), 부응교 윤담무(尹覃茂), 교리 이상홍(李尙弘) 등 은 평양에서 할 일도 없으니 경연(經筵)이나 하자고 임금에게 졸라댄다. 나라의 수도를 빼앗기고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고 장수들이 퇴각 하는 이유가 다 경연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하며...

간절히 원하면 경연이 도와줍니다.? 

유홍(兪泓)이 임진강 방어선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발바닥에 종기가 나서 가지 못한다고 전하다.

이 소리를 들은 대사헌 이헌국(李憲國)이 큰 소리로 꾸짖기를, 

“공은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데도 정승의 자리를 받았으니 은혜가 지대한 것인데, 겁이 나서 가지 않고 발바닥에 종기가 났다고 변명하니, 진실로 연석에 나타난 기생이 발병을 핑계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과 같소. 공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소.” 하면서 마구 때릴 기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 기재사초

선조 임금이 이 광경을 보고 쓴 웃음을 지으며 제도 도순어사(諸道都巡御史) 한응인(韓應寅)이나 먼저 출발 시키라고 명하다.

드디어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 송암(松庵) 김면(金沔)이 합천(陜川) 숭산동(崇山洞)에 모여서 의병(義兵) 궐기를 모의하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을 규합할 계획을 세운다.

​ 

5월 11일. 나라에 결재 도장도 없다. 

이조(吏曹)에서 새로 발령을 해야 하는 종이와 붓과 먹은 어찌어찌 구했는데 관원에게 찍어줄 발령서의 도장도 챙겨 오지 않아서 발령서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승정원 승지의 작은 개인 도장을 하나 빌려 이조의 결재 도장으로 찍기로 한다.

 

제도 도순어사(諸道都巡御史) 한응인(韓應寅), 방어사(防禦使) 이천(李薦)이 군사 5천을 이끌로 출발하기전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다.

선조 임금이 한응인에게 술을 하사 하는데 전장으로 신하들을 보냄이 많이 미안하였나 보다. 자신의 존호(尊號)를 삭제하라는 명을 내리다.

 


5월 12일. 피난 중에도 당파 싸움을 하다. 

당파가 다른 신하들에게 이미 삭직(削職, 계급이 이등병으로 강등 됨.) 당한 이산해(李山海).  그를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삭직(削職)만으로는 부족하니 율(律)에 의거해서 중죄를 주자고 임금에게 졸라댄다.


한양을 점령한 왜적이 일단 임진강을 건너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시기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지내야 할 담당 관료들이 도망 가고 없었어 타 부서 직원을 차출하여 제사를 지내기로 함.

(기재사초)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보고, 

“신이 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 이하 여러 장수 20여 인과 군사 1천여 인을 거느리고 임진(臨津)을 고수하고 벽제(碧蹄) 등에 매복을 설치하여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이양원(李陽元)도 이일(李鎰)ㆍ신각(申恪) 이하 장수들 10여 인과 군사 5천 여 인을 거느리고 대탄(大灘)에 주둔하여 진격을 도모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니,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가 모두 즐거워하면서 머지 않아 임금이 환궁하게 될 것이라고 뜨거운 김칫국 부터 마시고 있다.

 

당시 임진강 방어를 담당한 장수들.

대탄(大灘) 방어 - ​이양원(李陽元), 이일(李鎰), 신각(申恪), 김우고(金友皐) 

​임진(臨津) 방어 - 한응인(韓應寅), 김명원(金命元), 권징(權徵), 신할(申硈), 이빈(李薲), 이천(李薦), 유극량(劉克良), 변기(邊璣), 이성임(李聖任) - 임진강 방어전도 글로 한번 엮어 보면 대단히 재미나게 빡칠듯 하네요^^*


(3부로 넘어가야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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