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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의 피난길(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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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4
조회수 : 222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11/25 20: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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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 이어집니다.

<선조실록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13일>
세자에게 임시로 국사를 다스리게 한다고 전교하다

이날 밤에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내선(內禪) 할 뜻을 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대신(大臣)들의 반대를 받아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다. 오늘 이후로는 세자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다스려 관작의 제배(除拜)나 상벌 등의 일을 다 편의(便宜)에 따라 스스로 처결할 일로 대신들에게 이르라.”
하자, 대신들에게 중난한 일이어서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니, 답하기를,
“내선은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내선(內禪) :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줌.

(왜구들에게 고함. 이제 세자에게 조선의 왕위를 물려 준 것 비슷하게 했으니 나는 민간인이므로 나를 추격하지 말고 세자를 추격하라.

나는 비자만 나오면 중국으로 간다. 안녕~~ 데헷^^)


6월 14일. 임금이 중국으로 피신하겠다고 결정하다.

세자(광해군)에게는 남아 종묘의 위판을 들고 강계로 피난 가서 종묘사직을 보전하라고 하다.

영의정 최흥원, 참판 윤자신(尹自新) 등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세자를 배종하여 강계로 가서 보전하도록 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나누어 세자를 따라가도록 하였다. 상이 문밖으로 나와 말을 타고 박천(博川)으로 떠날 무렵에, 상례(相禮) 유조인(柳祖訒)이 말 앞에서 울면서 아뢰기를,
“세자로 하여금 대가(大駕)를 따르도록 하여 환난을 함께 하소서.”
하니, 상이 가엾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서서 위로하고 타이르자 세자가 지송처(祗送處)에 서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였다. - 선조실록 25년 6월 13일.


이날 눈치 빠르게도 임금을 따르던 사관들 조차 이제 조선은 망테크를 바로 타는것으로 판단하고  싹 다 도망쳐 버린다.

당연하게도 사관들이 관리하던 사초는 이미 망한 조선의 것이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깔끔하게 구덩이를 파고 모두 태워 버렸다.

이 사초 소각 사건 때문에 선조 즉위년 부터 임진년까지의 기록들이 아예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선조실록25년.png

​현재 전해지는 선조실록의 모습. 임진왜란이 발발 1592년 선조25년 1월 부터 3월 까지의 기록은 영원히 전해지지 않게된다.

이로써 선조실록은 개판이 되었고 임금은 실록이고 나발이고 그건 뭐하는 물건인지는 모르겠고 박천으로 항망히 떠난다.


사관(史官) 조존세(趙存世)【예문관 봉교 겸 춘추관 기사관.】·김선여(金善餘)【검열 겸 춘추.】·임취정(任就正)·박정현(朴鼎賢)【승정원 주서 .】 등이 도망하였다. 
존세 등은 좌우(左右) 사관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면서 침문(寢門)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상이 자제(子弟)처럼 대우하였다.
이날 밤 네 사람은 상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의논하고는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어둠을 타고 도망하였다. 상이 길에서 자주 돌아보며 사관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선여가 탄 말이 허약한데 걸어서 오느라 뒤에 쳐졌는가.”
하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들이 도망한 것을 알고는 사색(辭色)이 참담하였다. 따르는 자들이 모두 격분하며 매도하기를 ‘뒷날 상이 환국(還國)하시면 이 무리들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6월 기사


이날 선조 임금은 광해군을 강계로 보내면서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형조 판서 이헌국(李憲國), 부제학 심충겸(沈忠謙), 형조 참판 윤자신(尹自新), 동지 유자신(柳自新), 병조 참의 정사위(鄭士偉), 승지 유희림(柳希霖), 우찬성 정탁(鄭琢)등을 붙여준다.

광해군은 이날 운산군(雲山郡)에서 유숙한다.

선조 - 복사본.jpg

​빨간색의 원과 선은 선조 임금의 행차길이다.

청색은 영변에서 세자와 임금이 이별하고 나서 세자의 이동 경로다. 분홍색 원은 함흥. 황색 원은 강계.

선조 임금은 영변에서 생떼 쓰고는 결국​ 의주 방향으로 길을 돌린다.


병조 좌랑 박동량은 임금을 따르는 신하 가운데 6품으로 병조의 낭관(郞官)이었다. 그가 낭관이라는 직책은 각 부서의 실무책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병조의 낭관인 박동량이 당시 이조의 통부(通符, 통행증, 이조의 연락담당)를 차고 예조ㆍ호조의 일도 겸하여 다스렸고, 또 내승(內乘, 임금의 이동을 책임지는 부서)의 사명까지 띠었다.

이공저가 말하기를, 

“공의 재주는 소 계자(蘇季子)보다 훨씬 낫소. 소 계자는 6국의 재상인(宰相印)만을 찼을 뿐이었는데, 공이 다스리는 것은 6조 이외에도 태복시(太僕司)의 일을 더 맡았으니 말이오.” 하자, 일행이 모두 껄껄 웃었다. - 기재잡기

​당시 얼마나 호종하는 신하들이 없었으면 한 사람이 7가지 부서의 실무 책임자를 겸하고있었다.


 

6월 15일. 임금이 박천에 도착한다. 

박천 고을을 향할때 종관(이름도 없는 하급 문관, 무관) 10여 인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는데, 무관은 겨우 5ㆍ6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원래 왕의 행차이므로 선두에는 어느정도 급이 되는 관리가 앞장을 서야 하지만 다들 두려움에 꺼려하고 있다.

 

“나와 그대는 모두 병관(兵官)이고 또 전위대가 너무 허술하니, 앞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곧 어마(御馬)를 매질하며 나갔다. 상이 내관(內官)을 돌아보며 누구냐고 물으니, 아무개 아무개 올시다 하였다. 당시에 시위가 고단하고 취약하며 인심이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 임진강(臨津江)에서 보다도 더 심하였다. - 기재잡기


선조 임금이 박천(博川)에 이르니, 그곳은 백성들이 전과 다름 없이 곳곳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상이 말을 멈추고 이르기를, 

“여러 고을이 다 비었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피란가지 않았느냐?”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군수께서 평양에 계시면서 사람을 보내 효유하여 말하기를, ‘사세가 불리하면 나도 피란하겠다. 내가 피란한 뒤에도 오히려 나갈 수 있으리니, 우선 힘을 다하여 농사를 지으라.’ 하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피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윗사람이 시키기에 달린 것이니, 이는 처사가 마땅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잠깐만? 그럼 임금 당신께서는 어인일로 이리도 백성들을 팽게치치고 혼자 도망을 가시는지...)

이때 중전은 함흥으로 가다가 다시 임금이 중국으로 넘어가니 동반 망명하자는 명이 내려 덕천으로부터 다시 박천으로 돌아오는데 산을 넘고 냇물을 건너 하루에 간 것이 거의 1백 60리가 되었다고 한다. 박천에 도착하니 평양이 함락 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가마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바로 임금을 따라 다시 출발 했다고 한다.


6월 16일. 가산에 도착하다.

박천을 출발 할 때 신하들중 일부가 백성들에게 짐보따리 등을 빼앗긴다.

선조 임금의 행차가 박천을 지날 때 쯤 이때까지 호위하던 장수들도 다 도망가고 대가를 호종한 사람은 오직 내시 5ㆍ6명 뿐이라 한다.

임금을 호종하는 총 인원은 겨우 40ㆍ50인. 하늘에서는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니 이날이 임진강을 떠나던 저녁보다도 꼬라지가 더 말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가산에 도착 할 때 쯤 임금의 말씀을 기록 할 사관들도 다 도망가고 임금 주위에는 하급 관리 몇 몇, 늙은 대신들 약간 남아 있다.

제대로 된 공문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중국으로 공문을 보내고 받아 번역 할 관리도 없었다.

"한리학관(漢吏學官, 명나라 문서 번역 전문가) 이재영(李再榮)이 사자관(寫字官)을 이끌고 중도에서 도망가니, 종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계문(啓文)의 규식(規式)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 글을 쓸 만한 사람도 없었다. 하루는 내가(박동량) 자상(子常)ㆍ대년(大年)과 같이 각각 장계 하나씩을 지었는데, 문세(文勢)와 자체(字體)가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자상ㆍ대년은 팔에 병이 나 쓰지 못하여 내 혼자 쓴 것이 10여 편이나 되었다. 대년은 오억령(吳億齡)이다."  - 기재잡기

임금이 평양에 도착한 뒤로 잇따라 적의 정세를 요동에 보고하였으나 이때쯤 부터는 중국으로 공문을 본내는 것도, 또 어떤 절차로 받는 것도 아는 사람이 다 도망가고 없어 중국과의 공문접수, 발송이 엄청나게 지연되고ㅗ 있었다.


 

6월 18일. 명나라 지원군 선발대가 드디어 도착하다.

​요동 유격 사유와 원임 참장(原任參將) 곽몽징(郭夢徵)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평안북도 선천의 임반관(林畔館)에 도착한다.

선조 임금은 당일로 명나라 장수에게 시원스럽게 조선의 작전통제권과 주권을 모두 맡기게 된다.

“한 나라의 존망이 대인들의 진퇴에 달렸으니, 지휘를 삼가 받겠소이다.”

​선조실록에는 곽몽징이 기병 1천 여 기를 이끌고 왔다고 기록 하고, 박동량의 기재사초에는 이날 3천 여 기의 기병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곽몽징이) 운흥관(雲興館)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상이 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

상이 낱낱이 우리 나라의 전후 사정을 말하자, 시종들도 상의 앞에 줄지어 엎드려서 각각의 소견을 말하니, 말들이 대단히 시끄러웠다. 참장 곽몽징이 말하기를, “귀국의 군신이 한 곳에서 떠들어대는 것이 마치 모여서 송사하는 것과 같으니, 너무도 무례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모두 나가라고 명하였다. 총병 이하가 평양이 함락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부산에서 한양까지, 또 개성까지 삽시간에 함락되자 중국 조정에서는 오히려 조선을 강하게 의심한다.

​“조선이 실지로는 왜노(倭奴)와 함께 배반하고는 거짓으로 가짜 왕(王)을 정해 길을 인도하여 쳐들어온다.”는 소문이다.

얼마나 어이없게 털렸으면 이렇게까지 중국에서 의심을 할 수 있을까.​

그날 요동 순안 어사(遼東巡按御使) 이시자(李時孶)가 지휘(指揮) 송국신(宋國臣)을 보내어 자문(咨文)을 가지고 선조 임금을 직접 만나게 한다. 송국신은 그전에도 사신으로 조선에 와서 선조 임금을 직접 본 적이 있어서 명나라 입장에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조선 임금이란 자가 진짜 임금이 맞는지, 혹시 왜구들이 조선과 짜고 가짜 임금을 세워 자기들을 속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송국신이 선조 임금을 만나고 나자 드디어 명나라의 의심이 풀렸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조선 임금과 신하들의 궁색한 모습을 보니 절대로 연극이라 할 수 없지 않았겠나. 

 

평양 함락.

함락이라기 보다는 아무도 지키는 자가 없으니 왜구들은 무혈입성이었다.


광해군 일행에 중전(中殿)을 모시고 함흥으로 가다가 되돌아 온 우의정 유홍(兪泓)이 합류한다.

유홍은 예전 함경도 병마절도사, 회령 부사, 개성부 유수,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도의 관찰사를 했던 인물이다.

​함경도와 평안도 지리는 물론 민심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잘 아는 인물인데 선조를 호종 할 때 보다 앞으로 광해군을 모실때 더 임무수행을 잘하게 된다. 


이때에 대가의 행색이 여느 때와는 달리 대단히 총총하니, 길 가의 인민이 이것을 보고 왜적이 뒤에서 조만간에 추격해 올 것으로 여겼다.

대가가 지나간 뒤로 양민이 물결처럼 흩어져 산골짜기를 메웠다. 그 중에 호적이 없는 천민들은 혼란을 틈타 무리를 불러 모아 관가의 곡식을 약탈해 갔는데, 영변과 곽산이 더욱 심했다. 선천 군수 이형(李瀅)이 조정에 알리기를, 

“선천군에서만도 또한 백여 명이 모여 내일 대가가 출발한 뒤를 기다려 영변의 백성들이 한 짓을 본받으려 하옵니다. 늙은 선비로서는 제재하지 못하겠사오니 이에 대한 조치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무신으로 대치하여 방화 약탈에 대한 걱정을 면할 수 있었다. - 기재사초

(당시 당첨된 무신(武臣)은 송강(宋康)이란 사람이다. 나중에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된다.)

 

6월 19일. 임금이 성천을 떠나 거련관에 도착하다.

세자는 영변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편지를 써서 종3품 보덕 벼슬을 하는 조정(趙挺)이라는 자에게 편지 전달 임무를 맡긴다.

조정에게 임금이 다시 편지를 써서 회답을 보냈는데 조정은 어미를 찾는다는 핑계로 사라지고 임금의 편지도 깔끔하게 사라진다.

 

이날 평양이 함락당하자 지키고 있던 윤두수가 행재소로 달려왔다. 
윤두​는 일이 이미 틀린 줄을 알고 마침내 성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먼저 나가도록 하고, 이어 군기(軍器) 등 물건을 모두 해자 속에 빠뜨리도록 하였다. 그의 종사관(從事官) 김신우(金信尤) 윤두수에게, 배를 타고 안악(安岳)으로 가면 몸이 무사할 것이라고 하니, 윤두수가 웃으면서 공이나 스스로 떠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행재소로 임금을 뒤쫓아 왔다고 전한다. - 선조실록


6월 20일. 임금이 용천에 도착하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걸음아 날 살려라 피난을 가는 중. 

신하들이 의주부 관원에게 임금은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을 미리 퍼트리라고 한다.​

의주부 관원이 임금이 의주에서 요동으로 건너가기 위한 준비를 들어나게 하게 되면 ​의주 관아 백성들이 동요 하기 때문이라고...


광해군 일행은 영변의 어느 민가에서 잤다.

이날 길을 떠나 천단현(天壇縣, 어디인지 확인 안됨)에 이르러서 적의 많은 군사가 함경도로 곧장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로 피신해야 할지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어떤 관리는 처음 명령을 받은데로 강계 땅으로 가야 한다고 하고 어떤 관리는 관동(關東)의 춘천(春川)ㆍ원주(原州) 등으로 나아가 인심을 수습하고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의견이 정해지지 않자 우의정 유홍(兪泓)이 이미 적들이 관북(關北 함경도)으로 들어왔다는데 차라리 관동(강원도)을 가서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유홍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당시 세자를 따르는 신하는 10여 명 남짓이라 한다.

 

6월 21일. 이순신 등 수군의 승전보가 계속 올라온다.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 3도의 수사들이 연합하여 한산도, 당포, 안골포 등지에서 왜적을 깨트리고 남쪽 바다와 전라도 해안을 지켜내고 왜구들이 해상으로 서해안의 북상을 저지중에 있다.

 

6월 22일. 드디어 임금이 의주에 도착하다.

강 건너면 바로 중국 요동. 명나라 원군도 속속 도착하고, 어차피 사수 하지 못하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지는 것이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중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신하들에게 전한다.

임금이 명나라 장수에게 여의치 않으면 임금은 요동으로 건너 갈 것이라고 미리 귀뜸하라고... 정말 치밀하다.​

신하들이 미리 알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반대를 하는 등 혼란의 도가니.​

선조 임금이 “만약 임시해서 대처하라고 하면 위험이 눈 앞에 닥쳐 미처 강을 건너가지 못할 염려가 있을 듯하다.”

왕권이고 나발이고 일단 지금은 한 목숨 보전하는 것이 가장 큰 화제였다.

 

6월 23일.

임금 부터가 요동으로 망명 할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따르는 신하들은 물론 여력이 되는 백성들 까지도 강을 건널 준비를 한다.

이에 명나라 장수는 조선사람들이 마음대로 강을 건너는 것을 염려하여 강에 정박해 있는 배를 모두 건너편에 정박시켰 버린다. 

​보다 못한 풍원 부원군 유성룡, 예조판서 윤근수 등이 아직 점령 당하지 않은 곳을 임금이 직접 돌아다니며 응원이라도  좀 하라고 간청을 한다. 임금과 신하들이 목놓아 한바탕 목메어 통곡을 하고 나서... 보통 영화나 드라마 같으면 이 정도 상황에서 임금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치밀어 오르고 장엄한 배경 음악이 깔리면서 임금이 뜻 깊게 한마디 해야 하지 않나?

이 장면에서 선조 임금이 한마디 하신다.

“명나라 장수에게 말하여 강 저쪽에 정박해 있는 배의 절반을 나누어 강 이쪽에 정박시키게 하고(나는 강 건너 갈 것이다!!!), 짐 실은 말들은 본 고을에서 조처하게(알아서 짱박아 놓고) 하고, 호위하는 병마는 이웃 고을에서 뽑아(의주 쪽 백성들이 혹시 반란이나 명령 불복종을 할지도 모르니) 시위하게 하라.”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 일 뿐...


광해군 일행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전부 노숙을 하였다고 한다.


대가가 용만관(龍灣館)에 당도하여, 목사가 거처하던 곳에 행궁(行宮)을 정하고 거처하였다.

이때 성중의 백성은 모두 흩어졌고, 닭ㆍ개 등이 한 마리도 없었고, 새도 날지 아니하여 황량한 산의 폐사(廢寺)와 같았다. 종관(從官) 수십 인이 행궁 근처 인가에 나누어 투숙하였다. 거의가 처량하고 궁핍하여 단지 한두 노복만을 데리고 있었다. 이성중(李誠中) 부자는 단지 종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때로는 끼니를 걸러서 남에게 의지하여 날을 보냈다. - 기재사초

​(이성중은 당시 비변사의 당상관이었다.)


 

6월 24일. 왕은 계속 강을 건너고 싶다고 이야기 하다.

선조 임금이 왜구를 어떻게 물리칠까 하는 고민은 전혀 없고 어떻게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서 요동으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자,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 신하들이 임금에게 제대로 돌직구를 날려주기는 하나 통하질 않는다.

 

중국 황제가 군자금으로 우선 은 2만냥을 보내준다.

보통이면 이 군자금으로 양식의 여유가 있는 고을에서 군량미를 사온다거나 말이나 소를 사오거나 각 지방의 의병이나 관군 모집에 사용해야 정상이겠지만 임금은 이 귀한 은을 자신을 호위하는 신하들과 군사들에게 먼저 나눠 줘 버린다.

이거 좀 나눠줄테니 도망가지 말고 나 좀 잘 지켜줘~. 신하들은 그거 그렇게 쓰지 말고 좀 아껴뒀다가 진짜 필요 할때 쓰자고 한다.

임금 말씀이 “호종한 사람들에게 주더라도 여분이 있다!!!.”고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큰소리를 친다.

 

6월 25일. 정주 판관, 맞아 죽다.

정주 판관(종 5품 정도) 김의일(金毅一)이란 자가 관청의 곡식을 훔쳐 내서 사사로이 사용하다가 풍원 부원군 유성룡한테 들켜서 즉결처분으로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때려 죽여 버렸다.


당시 임금이 서울부터 의주까지 한번도 도망가지 않고 호종한 신하들을 종시호종(終始扈從)이라 하여 공식적으로 그 이름을 남겨둔다.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윤두수(尹斗壽)ㆍ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전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ㆍ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ㆍ판윤 박숭원(朴崇元)ㆍ공조 참판 이충원(李忠元)ㆍ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

도승지 유근(柳根)ㆍ부제학 이국(李)ㆍ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ㆍ좌승지 홍진(洪進)

사예(司藝)ㆍ심우승(沈友勝)ㆍ장령 정희번(鄭熙藩)ㆍ병조 좌랑 박동량(朴東亮)ㆍ정언 이광정(李光庭)ㆍ평안 병사(平安兵使) 신잡(申磼) 집의 구성(具宬)ㆍ도정(都正) 안황(安滉)ㆍ응교 이유징(李幼澄) 이하 문신

호조좌랑 한연(韓淵)ㆍ군수 기경복(奇景福)ㆍ도사 여정방(呂定邦)ㆍ판관 최응숙(崔應淑) 등 이하 무신.

모두 24인이었다. - 기재사초 별록.



(6부도 있습니다. 준비 중입니다. 분량조절 실패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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