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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의 피난길(6부-마지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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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4
조회수 : 1965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5/11/25 23: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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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에서 이어집니다. 6부가 마지막이 될 듯 하네요.


 

□ 6월 26일. 임금의 중국 피신 계획이 사실상 거부 당한다.

명나라는 조선왕이 강을 건너 피난 올 경우 관전보(寬奠堡 : 의주에서 동북쪽으로 200리 정도, 현재 수풍댐 바로 위)라는 좁고 비어 있는 관아에 신하들과 호위군사들 100명 만 받아 준다고 한다. 혹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요동으로 몰려들면 왜적들이 바로 뒤따라 들어와 자기네들 땅에서 전쟁을 치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했으리라. 사실상 조선왕의 입국을 거부하는 모양새다.


중국에서 입국 거부를 당하자 실의에 빠진 임금...

“이곳(의주)으로 온 것은 오로지 요동으로 가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요동으로 갈 수 없다면 지극히 위험하니 항해(航海)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은밀히 의논하여 아뢰라.” - 선조실록

(이 말에 논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계쪽으로 도주 하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서해를 통해 남하한다는 말이지 아직까지는 변명치 않다.)

그러나 이제 오갈때도 없는데 끝까지 싸울 생각은 여전히 없다.


임금은 내키지는 않지만 윤두수가 해주를 거쳐 충청도 아산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자고 하는 말에 일단 동의를 표한다.


임음이 이제 오갈때도 없는 처지라 오래 머물 계획을 하니 비로소 피난 갔던 백성들이 다시 의주 관내로 모여들고 장정들도 모여들어 의주 관내가 조금 든든해졌다고 한다.

 

6월 28일. 백성이 임금을 왜적에게 바치다.

왕이 잠시 머물던 숙천 관아 기둥에 임금이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로 도망 갔다고 누군가 적어 놓았다.

경상도 각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고령(高靈)에 사는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

현풍(玄風)에 사는 곽재우(郭再祐), 전 좌랑 박성(朴惺), 유학(幼學) 권양(權瀁) 등

 

6월 29일. 심유경이 조선에 오다.

왜적과 강화조약을 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한다.


지난 5월 7일 벌어진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 승전 소식이 이제서야 의주에 도착하였다.

당시 남쪽 지방의 백성은 물론 관리들까지 임금이 어디로 피신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항복이 임금께 요청하여 관청 건물들을 수리해서 오래 있을 의사를 보이니 아전과 백성들이 과연 조금씩 모여들었으며 호서, 호남, 영남 3도에서는 행재소(行在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급히 사신을 보내어 선유(宣諭)하여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하라고 청하여 대사헌 윤승훈(尹承勳)을 바닷길로 호남에 보내니 이로부터 조정 명령이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6월 말.

왕이 의주에서 장기전 돌입에 대비하고 한 곳에 오래 머무니 드디어 남쪽 지방의 각 지역 전투 상황과 의병들의 전과가 전달 된다.

또한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임금의 명령이 전라도까지 전달됨.

의병장의 전과도 들려 오고 이들에게 전임 관직에 비추어 벼슬을 내리기도 하는 등. 역시 지휘부가 건제하고 또 최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이 지휘부와 함께 한다는 생각만 든다면 어느 정도 의지가 생기는 것 같다.


임금의 귀환

선조 임금은 1592년 4월 30일 한양을 떠나 1593년 10월 4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다.

다시 돌아온 한양의 모습은 참혹했다.

도성 안에는 온통 가시덤불과 잡초로 가득 찼고, 모든 관청은 모두 허물어져서 겨우 장벽만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기근과 도적이 겹쳐서 서울이 외롭고 위태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기와로 이은 집 중 임금이 거처 할 만한 곳은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집 뿐이었다고 한다. 임금은 이곳을 임시거처로 삼고 한양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 당시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에게 먹일 군량미 중 약 500석 정도를 따로 밀봉 보관 하라고 지시한다.

부하들이 이건 (개인적으로 착복 할꺼냐?) 언제 쓰실꺼냐고 물어보자,

"우리 임금이 중국 요동으로 쫓겨 갈 경우 내가 배를 타고 가서 임금을 다시 전라도로 모셔서 여기서 왜구들을 소탕 할 예정꺼임. 이 쌀은 그때 임금이 드실 쌀임. 손대면 곤장 맞는다."

솔직히 이정도까지 멀리 내다 볼 만한 혜안이 있으셨던 장군이었다. 그러니 뭐 나라 구했겠지만...


​선조 임금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

(빡치신 분들은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량 조절 실패로 인하여...ㅠ 아주 오래전에 편집했던 평가글을 올립니다.)

"만력(萬曆) 16년(1588, 선조21)에 천자가, 돌아가신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이 대국(大國)을 섬기는 데 충성스럽고 조상을 받드는 데 독실하다는 이유로 특별히 주청(奏請)한 바를 윤허해, 간사한 자가 무함하여 우리나라의 종계(宗系)에 악명(惡名)을 써넣은 것을 사관(史館)에 명해 모두 깎아 내고 바로잡아 천하에 밝게 드러내 보이게 하였다. 이에 우리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200년 동안 원통함을 품은 채 멸시를 받아 오면서도 신설(伸雪)하지 못하였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강한(江漢)에 씻고 추양(秋陽)에 쪼인 것과 같이 환히 빛나게 되었다...(후략)

-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동지춘추관사(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春秋館事) 윤공 선각(尹公先覺)의 신도비명 중.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께서는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법을 미루어 뭇사람을 구제하는 인술(仁術)을 펴리라 생각하시어 의학(醫學)에 마음을 두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일찍이 병신년(1596, 선조29)에 태의(太醫) 허준(許浚)을 불러 하교하기를, “근자에 중국의 방서(方書)를 보니 모두 초집(抄集)한 것들이라 자질구레하여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그대가 제가(諸家)의 의술을 두루 모아 하나의 책을 편집하도록 하라. 그리고 사람의 질병은 모두 조섭을 잘하지 못한 데서 생기니, 섭생(攝生)이 먼저이고 약석(藥石)은 그다음이다. 제가의 의술은 매우 호번(浩繁)하니, 모쪼록 긴요한 부분을 가려 모으라. 외진 시골에는 의약(醫藥)이 없어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향약(鄕藥)이 많이 생산되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는 약초를 분류하면서 향명(鄕名)을 함께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이정구(李廷龜). 《동의보감(東醫寶鑑)》 서문


(전략)...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200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임진왜란 때 구원해 주는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런 거조를 한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의논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후략)

- 심양(瀋陽)에 군병을 보내 돕지 말기를 청한 상소 기묘년(1639, 인조17) 12월. 전 판서(前判書) 김상헌(金尙憲)의 상소 중.


​"右文之化 極隆於宣廟 文藝之士 蔚然羣起"

​(전략)...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교화를 펼친 것으로 말하면, 선묘(宣廟) 때에 이르러서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문예(文藝)에 종사하는 인사들이 무리를 지어 성대하게 일어났는데...(후략) 

- 간이당집(簡易堂集) 서(序) [글쓴이 : 장유(張維, 1587년~1682년)]


"(전략)... 신들이 삼가 듣건대, 세종(世宗)ㆍ성종(成宗) 및 선묘(宣廟) 초년에는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거둥하심은 물론이요, 거기에다가 야대(夜對)를 행하고 또 불시(不時)로 소대(召對)하시는 등 자주 유신(儒臣)을 접하시며 부지런히 강문(講問)을 하셨다 합니다. ...(후략)"

- 계곡집(谿谷集) 수록 사헌부의 차자(司憲府箚) 중.


"듣건대 조종조 때에는 아침, 낮, 저녁 세 차례의 경연을 열고 야대(夜對)까지 열었으며, 선묘(宣廟)께서는 전란 중에도 경연을 폐지하지 않으셨다고 하니, 그 조예(造詣)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후략)"

- 승정원 일기. 현종 11년(1670년) 3월 좌참찬 송준길(宋浚吉)과 임금의 대화 중.


숙종 임금 당시 이조판서 이현일(李玄逸)과 임금의 대화 중.

“옛날 선묘(宣廟) 때에 김성일(金誠一)이 간관이 되어 대신(大臣)이 뇌물을 받은 일을 논척(論斥)하였는데, 영상 노수신(盧守愼)이 이를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묘께서는 그 둘이 다 훌륭하다고 하셨으니, 그 역량과 기풍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랬기에 중간에 변고를 겪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어도 끝내는 옛 강토를 회복하여 오래도록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선조(宣祖)를 본받아 노상(盧相)의 사례로써 대신들을 책려(責勵)하신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갈암집(葛庵集) 선부군(先府君) 가전(家傳)의 묘지문에서.


“신(臣)이 듣건대, 선묘(宣廟)께서 편찮으실 때에 신하들이 입시(入侍)하였더니 무명에 물들인 포장을 치고 무명 바지를 입으시기까지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신하들의 조복(朝服)이 감히 오늘날처럼 고울 수 없었고, 환시(宦侍)들은 감히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합니다. ...(후략)

- 숙종실록 17년(1691년)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숙종 임금에게 사치의 풍조를 말하며.


(전략)... 선묘(宣廟) 초에 신분(申濆) 등 1천여 명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자, 선묘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함은 겉가지를 가리지 않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충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어찌 꼭 정적(正嫡)이어야만 하랴?’ 하셨으니, 이에서 대성인(大聖人)의 지공지정(至公至正)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후략)

- 영조실록 즉위년(1724년). 서얼 출신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의 상소 중.


(전략)... 선묘조(宣廟朝)의 고사(故事)로써 말하건대, 왕자와 옹주방에서 절수한 곳과 내려 준 물품이 매우 간략했는데, 그 후에 자손이 번성하자, 세상에서 이르기를, ‘절약(節約)하여 복(福)을 받았다.’고 했으니, 그 말이 자못 이치가 있습니다. ...(후략)

- 영조실록 4년(1728년). 주강(晝講)에서 지경연사(知經筵事) 서명균(徐命均)이 문의(文義)의 말.


“경의 말이 진실로 좋기는 하나, 《대학》 서문에 이르지 않았던가. ‘총명 예지(聰明睿智)가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그를 명하여 억조 인민의 군사(君師)로 삼는다.’ 하였으니, 진실로 천하 사해의 일인자(一人者)가 아니면 본디 위에 있는 도통을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천하(天下)를 자기 집안의 소유로 삼은 이후로는 진실로 복희(伏羲)·신농(神農)·요(堯)·순(舜)의 하늘을 이어 법을 세우던 때와는 달라졌다. 경이 전석(前席)에서 선정(先正)이 임금께 고한 말을 외워 아뢰니, 내가 진실로 감탄이 된다. 그러나 나같이 부덕한 사람을 어찌 감히 선묘(宣廟)의 융성한 시대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후략)

- 정조실록 22년(1798년) 희정당(熙政堂)에서 조강(朝講) 겸 차대를 행하던 정조 임금의 말씀 중.


(전략)... 이유원이 아뢰기를,
인재가 배출된 것은 융성하던 선묘(宣廟) 때에 많았습니다.”

- 고종실록 11년(1874년) 도제조(都提調) 이유원(李裕元)과 임금의 대화 중.


"(전략)... 대개 선정(先正)의 학문은 위로는 공자와 맹자(孟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미묘한 학문을 계승하고, 그것으로 기강을 세우고 천리(天理)를 밝혀서 우리 선묘(宣廟) 때의 밝고 융성한 교화를 도왔으며 만족과 화합을 가져왔습니다. 이 때문에 도통(道統)의 전수는 백 년이 지나면서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후략)"

- 고종실록 23년(1886년)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의 상소 중.


“옛날 융성하던 우리 선묘(宣廟) 때에 지극한 교화가 빛나고 성대하여 여러 현인(賢人)들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는 유학을 흥기시켜 도학(道學)이 백대의 종사(宗師)가 될 만한 사람도 있으며, 왕실을 도와 한 시대의 공신으로 될 만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후략)" 

- 고종실록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安鍾悳)의 상소 중.



정리하자면

1. 문치의 융성

2. 임란 극복 및 사대(事大)

3. 본문에는 없지만 종계변무(宗系辨誣)

4. 검소

5. 다산(多産)

6. 이이(李珥)나 이순신 등 문무의 명신(明臣) 발굴

옛날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생각하셨네요. 



처음 이 글을 정리하게 된 계기가 역사게시판에 어느 분이 스셨던 "임진왜란때 선조가 도망가지 않았다면...."의 글이었습니다.

과연 선조가 한양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에 대한 답은 이 글을 통해 어느정도 제 나름데로 정리가 되네요.

그 글의 해답은 저 혼자 간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생각들이 있으실테니...



(추천도 좋지만 비공도 있고 댓글도 많은 글이 되도록 늘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댓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랍니다.^^)

(긴 글 읽어 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력이 되면 태조 임금의 함흥차사 이야기를 편집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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