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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영의정(領議政) 이야기(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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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7
조회수 : 3774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5/12/05 15: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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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좋으시라고 글자 좀 키웠습니다.^^)



조선의 역대 영의정(領議政)  이야기(2부)


영의정 이유(李瑈)

이유(李瑈)는 1453년(단종 12년) 10월 11일. 37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제배 되어 1455년(세조 1년) 윤6월 11일에 퇴임하였다.

1부에 나온 28세 최연소 영의정 이준(李浚) 다음으로 젊은 정승이었다. 영의정 이유(李瑈) 바로 세조 임금이다.

영의정 해먹다가 바로 임금이 된 유일한 사례다.

계유정난을 성공 시킨 세조는 영의정에 오르며 영경연 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의 벼슬을 받았고 이후 1454년 3월 9일 계유정난에 대한 논공행상인 정난 공신 책봉에서,

분충 장의 광국 보조 정책 정난 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수양 대군(首陽大君)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집현전(領集賢殿) 경연 예문 춘추관 서운관사(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 겸 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 중외 병마 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가 되고 그 공로로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5백 호(戶)를 받게 된다. 그냥 임금 하시지... 니 혼자 다 해드세요.



육조직계제()

​권력 독점과 왕권 강화를 위해 세조 임금은 다시 육조직계제를 실시한다.

세조실록 1년(1455년) 8월 1일

육조의 공사를 직접 계달하도록 승정원에 명하다

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삼공(三公, 3정승) 은 세쇄(細碎)한 사무를 친히 보지 않고, 육경(六卿, 육조판서) 은 그 직무를 나누어서 다스리는 것이 고제(古制)이다. 이제부터 육조(六曹)의 공사(公事)는 직접 계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윤당(允當)합니다.” 하였다.
물론 일부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초기에 시범케이스로 반대하던 하위지(河緯地)를 목베어 버린다는 협박을 통해 신하들의 입을 모두 막았다.


무관 출신의 영의정

무관으로 출신으로 영의정이 되신 할배.

영의정은 보통 젊은 나이에 문과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 등의 청요직(淸要職) 등을 두르 지내고 육조의 각 부서를 한바퀴 돌고 난 다음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무과 출신이거나 아예 문, 무과 과거를 보지 않고 무신벼슬을 하다가 영의정이 되는 희귀한 사례도 있다. 

박원종(朴元宗)

1467년(세조 13년) 출생. 1510년(중종 5년) 졸(卒) 하다.

1509년(중종 4년) 윤9월 23일에 영의정에 제배 되나 그 해 겨울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여 이듬해 1510년(중종 5년) 3월 6일 영가부원군() 김수동(金壽童) 영의정의 자리를 넘기고 그해 4월 17일 사망(병사)한다.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정국공신() 1등으로 우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영의정 제배 당시 43세. 뻔한 이야기지만 반정의 공로로 논공행상으로 영의정이 된 사례.

신경진(申景禛)

1575년(선조 8년) 출생. 1643년(인조 21년) 졸(卒) 하다.

1643년 3월 6일 제배돠었으나 3월 11일.  임명되고 5일 만에 병으로 사망하신 할배. 

평산(平山) 신씨. 그 유명한 ​신립(申) 장군의 아들이다. 나중에 인조 반정으로 정사공신() 1등으로 녹훈 되었고 당시 서인 훈구파 계열의

김류, 이귀, 김자점, 심기원 등과 함께 계파를 주도하게 되고 병자호란 후 혼란했던 분위기에서 청나라와의 외교에 소질이 있어 무신이지만 영의정이 된 사례.



​223회 155명

1401년(태종 1년) 초대 영의정 이서(李舒) 부터 마지막 영의정인 1894년(고조 31년) 김홍집(金弘集) 까지 모두 155명 영의정에 재임 했다

여러차례 영의정에 임명된 할배들 포함 총 223회의 교체가 있었다. 493년 동안이다.

이들 중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원익(李元翼)과 영조 임금 때 김상복(金相福) 할배가 총 5회의 영의정에 제배 되었다.

물론 이원익은 합계 8년 정도로 임진왜란 이후 어수선한 나라의 재상으로 여러가지 일들을 하셨지만, 김상복은 합계 1년 정도 영의정에 재임한 무늬만 영의정이었다. 영조 임금과 맨날 싸우셨다.



각 본관(本) 별 영의정 

전주(全州) 이씨가 왕족답게 11명, 안동(安東) 김씨가 10명을 배출 하였다. 

안동 김씨는 조선 말기 세도정치 시기에 대부분이 영의정을 하였다.

안동 김씨 출신 영으정으로는 중종 임금 때 김수동(金壽童), 인조 임금 때 김자점(金自點),숙종 임금 때 김수항(金壽恒), 김수흥(金壽興), 김창집(金昌集), 철종 임금 때 김좌근(金左根), 김흥근(金興根), 고종 임금 떄 김병국(金炳國), 김병시(金炳始), 김병학(金炳學) 등.


노사신(盧思愼)

교하(交河) 노씨.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물재()이며, 어머니는 심온(溫, 처형 당한 영의정)의 딸.

1427년(세종 9년)부터 1498년(연산군 4년)까지 사셨고 1495년(연산군 1년) 3월 20일에 영의정에 제수되었는데 그해 9월 15일 여러 정치적인 사안으로 영의정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노사신 할배의 15대 손이 반란군으로 나라를 전복 했었던 노태우 전대통령이다. 


최고령 영의정

가장 늦은 나이에 영의정이 되신 할배.

정인홍(鄭仁弘).

 1535년(중종 30년) 출생 1618년(광해군10년) 1월 18일, 84세의 나이로 영의정으로 제배(除拜)되고 85세에 퇴임함. 1623년 89세 까지 사시다가 죽었음.

남명학파()의 대표자 중 한사람.

이 할배는 선조 말년에 이산해(), 이이첨()과 대북을 영도하였고 계축옥사로 영창대군과 그 일파를 제거하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유폐 건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영의정 제배 당시 고향 합천에 있으면서 요집조권( :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를 하였다. 예를 들자면 임금이 당상관의 주요 요직을 임명 할 때는 고향에 있는 영의정 정인홍에게 물어보고 결론 내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임금이 자기 말이나 자기 당의 논의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직한다고 윽박 지르곤 했다고 한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지지 당파들은 서인들에게 전원 축출 당하고 1623년 4월 3일 정인홍은 목을 베이고 죽었다. 

이이()는 일찍이 그에 대해 “덕원(정인홍의 자)은 강직하나 생각하는 계책이 두루 소상치 못하고, '학식이 밝지 못하니' 용병(用兵)에 비하면 돌격장(突擊將) 정도 될 것이다.” 하였다. - 석담일기(石潭日記)

​'학식이 밝지 못하니' : 아마도 정인홍은 정식으로 과거를 보고 벼슬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생원(生員)의 위치에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바로 6품의 벼슬을 받은 것을 이야기 하는 모양이다. 정인홍 할배가 과거도 치루지 않고 처음 받은 벼슬이 무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정5품)이었다.

그러나 역적의 당수라 하여 나중에 시호도 얻지 못하고 후대에 복권도 되지 못한 몇 안되는 정승 중 한 사람이다.


40대 재상

영의정은 학식이 뛰어나고 각 당파의 의견을 고루 수용, 절충하고 임금의 국정 전반에 걸쳐 협력하여 나라를 이끄는 자리이므로 학식도 뛰어나고 두루 명망도 높아야 하고 나이도 보통 60이 넘은 인물이 선정되는게 보통이다.

20대와 30대에 영의정이 된 이준(李浚)과 세조 임금을 제외하고 나머지 40대에 영의정이 된 인물.

이덕형(李德馨) 42세 : 선조와 광해군

​박원종(朴元宗) 43세 : 중종. 위에 무신으로 정승이 된 사례로 소개함.

​심온(沈溫) 44세 : 세종. 1부에서 처형 당한 영의정으로 소개함.

이항복 45세 : 선조

홍윤성 45세 : 세조

신숙주(申叔舟) 46세 : 세조

김병학(金炳學) 47세 : 고종

홍봉한(洪鳳漢) 49세 : 영조

김수흥(金壽興) 49세 : 현종, 숙종

너무 어린 나이에 정승이 되었다 하여,

흑두 재상(黑頭宰相), 소년 주문(少年主文) 등으로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오성과 한음

선조 임금 당시의 명신이었던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

오성과 한음이라는 제목으로 동화책도 있고 두 할배들의 어릴때 에피소드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사람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매너 때문에 두 분의 아호(雅號)를 부르는 것이거나 자(字)를 부르는 것이리라.

쉽게 말해서 '이이(李珥)'를 직접 부를때 이이라 부르지 않고 '율곡(栗谷) 선생님'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면전에 대놓고 '이이'라고 부르면 아마 싸다구 맞을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덕형의 호()는 한음(漢陰)이라 한음으로 부르면 맞는데 왜 이항복의 호는 백사(白沙)다.(이것 말고도 몇 개 더 있지만)

그럼 '오성과 한음'이 아니라 '백사와 한음'으로 불러야 하지 않나? 이항복의 '오성'은 오성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니 '오성'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럼 이덕형도 한원 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니 '오성과 한원'이라고 해야...(후다닥)

조선 영의정들의 수명

뭐 맨날 조선시대 사람들은 평균 수명이 짧다고 들었는데...

영의정 할배들은 뭘 그리 좋은 것만 잡수셨나 다들 요즘 사람들 만큼 오래 사셨다.

역대 조선의 영의정들의 전체 기록을 계산해 보면 보통 62.7세에 영의정에 제배되고 64.7세에 퇴임하며 재임 기간은 평균 2.02년이었다.

퇴임 후 약 6년의 활동, 혹은 공백 후 평균 71.46세로 사망하였다. 2015년 한국인의 남자 기대수명이 79.0세 라고 한다.

 


​무늬만 영의정

가장 자주 영의정이 교체된 시기는 영조 임금 때였다.

영조 임금이 즉위 한 1724년 부터 1776년(영조 52년) 52년 동안 39 차례의 영의정 교체가 있었다.

당시 한 달도 못되어 영의정이 바뀌거나 당파에 맞지 않는다 하여 취임 조차하지 않고 사직을 해 버리는 등 조선 말기 혼란한 정국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당시 영의정의 평균 재임 기간은 1.3년 정도 였다. 이 기록도 영조 재임 초반 김재로(金在魯)가 9년 정도의 재임기간을 보태였기 때문에 재임 평균치를 올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가장 오래 사신 영의정

1783년(정조 7년) 출생. 1873년(고종 10년) 91세로 졸(卒) 한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할배.

동래(東萊) 정씨. 헌종 14년에 약 2년 간, 그리고 철종 10년에 약 4년 간 두번의 정승 자리를 지내신 할배다.

당시 안동(安東) 김씨와 풍양(豊壤) 조씨 등 세도 정치의 틈에서 "품행이 바르고 어질며 몸가짐이 검약한 데다가 문학과 재주가 있어서 조정에서 벼슬한 지 70여 년이 되었다. 나이와 벼슬이 높았으며 복록을 후하게 누렸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칭송하였다."는 당시 드물게도 후한 평가를 받은 정승이시다. 

2위는 90세로 졸 한 황희 정승 되시겠다.

 

가장 씨발스러운 영의정 

1907년 고종 44년 6월 14일(양력). 고종 황제께서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칠 것을 명하였다.

“짐(朕)이 생각건대 나라를 운영하는 요점은 관제를 정하여 기관(機關)이 각기 제자리를 얻게 하는 데 있다. 이번에 수규(首揆)를 선발하여 내각(內閣)의 신료를 조직하는 것은 전적으로 각국의 문명한 제도를 본받는 것이니, 이제부터 의정부(議政府)내각(內閣)으로 개칭하여 나라의 정사를 혁신하게 한다.  내각은 온갖 정사에 대한 나의 직접적인 처결을 보좌하여 모든 정사를 잘하기 위한 것이니 이번에 그 조직을 개편하여 여러 대신들이 각기 그 중책을 맡게 하고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에게 감독 격려하게 하라..." (후략)

이날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에 임용된 사람은 이완용(李完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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