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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일어나다
게시물ID : readers_230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페레트리
추천 : 2
조회수 : 33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2/09 15: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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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에게 움직일 자유는 없었다. 다만 마음대로 눈을 굴리며 건물 안을 탐닉할 수는 있었다. 욕정에 물든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는 여형사, 낡은 파일 안에 꽂혀진 수많은 A4용지나 스테이플러, 클립 따위의 그런 사소한 사무용품들이었다. 그는 답답한 시야를 풀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오래된 형광등은 이따금씩 깜빡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한쪽 구석에 치워놓은 짜장면 그릇에는 파리가 들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와 머문 곳은 여형사의 입술이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 옆에 살짝 묻어있는 음식의 흔적이 왠지 음탕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여형사의 입술이 떼어졌다.

“아주 악질이네 이 새끼. 이름!”

여형사가 바라보는 모니터 속 커서가 한없이 빠르게 깜빡였다. 여형사는 그의 말을 기다리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톱으로 키보드를 가볍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리가 없던 경찰서 내에 톡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형사가 원하는 대답 대신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강간은 여자에 대한 일종의 통제다.”
“뭐?”

여형사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며 톡톡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예상외의 답변이었다. 아니, 그의 말은 답변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긋나 있었다. 그는 여형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잘 벼려진 그의 눈은 이미 그녀가 초짜이고, 어설프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이곳에서는 혼자였다.

“남자가 행하는 일종의 통제라고. 강간은.”
“이 새끼가 나하고 말장난 하냐? 너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알고 그런 말 지껄이는 거지? 응?”

그렇게 말하며 여형사는 자신의 어설픔을 숨기기 위해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전략적 도발임을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어쨌거나 오늘 하룻밤을 함께 이 경찰서에서 보내야 하는 관계였다. 다만 그 관계는 여형사에겐 무조건적인 상하관계여야 했다. 경찰과 강간범. 사회적이고 암묵적인 관계.

“당연히 알다마다. 공원 벤치에서 중학생을 맛있게 먹은 뒤에, 그 광경을 목격한 지나가던 여대생도 맛봤지. 얼마 후에 좀팽이같이 생긴 짭새 새끼가 내 팔을 꺾으면서 경찰차 속으로 날 들이밀었지. 그리고… 지금 여기서 너하고 이야기하고 있잖아.”

거침없는 그의 말에 여형사 자신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경찰서와 잘 어울리지 않는 ‘짝’ 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놀라며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녀의 몸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톡톡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전보다 빠른 템포였다.

“강간은 언제나 존재해왔지….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야. 그런데 강간의 목적이 단순히 성욕의 해소가 아니라는 거, 너 같은 여자들은 모를 거야.”

그가 마음대로 개똥철학을 읊어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동료 경찰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그녀의 앞에 앉은 범죄자가 수갑을 풀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덮쳐버리는 무서운 상상을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예쁜 여자만 강간을 당한다거나, 옷을 야하게 입어서 당한다거나… 또 뭐야, 야동을 너무 많이 봐서 성욕을 주체 못해서 강간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지. 나만 해도 그렇거든?”
“… 미친 새끼.”
“난 미치지 않았어. 아주 멀쩡하다고. 다만 내가 그녀들을 맛있게 먹은 건 별다른 이유가 아냐. 그년들의 혐오스러운 눈빛을 난 읽었어. 걔들은 좀 통제가 필요한 년들이었지. 남자로서 그런 개 갈보 같은 년들을 어떻게 하면 통제 하에 둘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결국 역사적으로 강간이 가장 효과적이고 옳은 길이더라고.”

여전히 파리들은 윙윙대고 형광등은 깜빡거렸으며 모니터 속 문서에는 단 한글자도 입력되지 못하고 있었다. 궤변을 늘어놓는 그는 아주 차분했다.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후회나 반성도 없었다. 그런 점이 그녀에게는 더욱 공포와 분노를 가져오고 있었다. 톡톡거리는 소리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여형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룻밤에 두 명이나 강간했다면 형량은 과연 얼마나 나올까. 그가 궤변을 이어갔다.

“요새는 지하철에서 치마나 다리만 쳐다봐도 성추행범으로 몰리잖아. 조금만 몸이 닿아도 난리를 피우고 말이야. 수잔 뭐시깽이 하는 페미니스트가 뭐라고 했더라. 모든 남자들은 잠재적인 강간범이고 끊임없이 여자를 강간한다. 그들의 몸으로, 눈으로, 그리고 뻔뻔한 도덕률로? 뭐 그런 식의 얘기였어. 근데 자연스레 눈이 가는 게 강간이냐? 엄연히 다른 거거든. 그러니까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년들은 통제가 필요해.”
“닥쳐! 아까 네 팔 꺾었던 그 형사 전화로 부를 거니까 닥치라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이나 늘어놓고…. 너 같은 새끼들은 다 감옥에서 평생 썩어 문드러져야 돼.”

그녀는 책상 위에 있던 수화기를 들고 동료 형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녀는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한두 번 전화를 걸면 뒤늦게나마 전화를 받을 거라는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면 얼마 후에는 미친 강간범과 단 둘이 있지 않아도 될 것이고, 조서를 쓸 수 있을 것이며, 보고서를 내일 아침에 제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SOS 신호가 가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여자가 강간당하는 건 아니지. 근데 누군가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강간을 당하고 있단 말이야. 그 사실 하나로 모든 여자를 위협하기엔 충분해. 뉴스에 나오는 강간 사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공포에 질리게 되거든. 그게 바로 공포의 효율이지. 난 딱 두 명을 강간했지만 내일 신문과 뉴스에 대서특필 될 테고, 그러면 공포로의 통제가 가능하지.”

여전히 형사는 SOS를 받지 않고 있었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메시지가 나올 때 쯤, 말을 마친 그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번호를 누르다 말고 그녀의 커진 눈이 천천히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놀라움과 의문, 공포가 가득 찬 눈빛이었다. 남자는 길게 펴진 클립과 양 손목을 묶고 있던 수갑을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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