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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즈음에.
게시물ID : gomin_15709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러지말아요.
추천 : 1
조회수 : 25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2/31 00:14:31
#1.

엄마의 손을잡고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정말로 먼 예전이 아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라는 노래를 들으면 괜시리 가슴 속 뭔가가 켕기는 나이가 되버렸다.

그렇다고 내년에 딱 서른이 되는건 아니지만, 예전에 나는 내가 서른살이 된다는걸 상상도 못했었다.

스무살 중반이 되었을때에도, 스무살 후반이 되었을때도

아직 십의자리 숫자는 '2'였기 때문에 그 안도감에 취해 서른살은 내게 먼 이야기라고 스스로 외면했다.

지금도 외면하려고만 한다. 곧 서른인 사내 새끼가 말이다.



#2.

어렸을적 다들 그랬겠지만,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중 하나는 '커서 뭐가 되고싶어?' 였다.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답하는게 뭐 다 그렇듯, 나역시 대통령, 소방관, 선생님, 과학자 등 

지극히 평범하게 주변에서 접할 수 있고 누구나 멋지게 생각하는 직업들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초등학교 졸업할때 까지 어른들은 약속한 것 마냥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난 한번도 '회사원' 이라는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어느날 눈 떠보니 나는 회사원이 되어있었고, 과거의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때가 있다.

난 정말로 내가 회사원이 될 줄은 몰랐으니깐.

늘 내게 기대감을 갖고 거창한 직업들만 말해주던 어른들의 입에서

'회사원'이라는 단어를 들었었다면, 지금 내가 나에게 느끼는 환멸감이 조금은 누그러 들었을까 생각해본다.

생각만 해본다.



#3.

최근에 우연찮게 소개팅을 많이 하게 되었다. 살면서 소개팅 해본 횟수가 두번밖에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누군가를 인위적으로 만난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였는데, 왜 그랬을까 싶다.

괜스레 서른이 가까워지니 조급해진거라고, 그런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스무살 초반즈음엔 누군가를 처음 만나 알고 지내게 되면 나는 그사람의 세가지만 기억하면 됬었다.

그사람의 생김새와 목소리, 그리고 성격.

지금의 나도 그 세가지만 기억하고 싶은데, 이상한 것들이 자꾸 껴들기 시작한다.

그사람과 나와의 나이차이, 그사람의 직업, 그사람의 단점들.

매번 소개팅이 끝나고 나면 '사실 진짜 보잘것 없는건 너잖아. 니가 뭐라고 남의 그런면을 판단하려드냐?'

라고 스스로 묻는다. 집에 가는길에 끊임없이 되뇌이고 묻는다. 그리고 이내 끝없는 자기 혐오에 빠져 일주일 내내 괴로워 했다.

나이먹으면 이것저것 재다가 결혼 못한다. 라고, 꼰대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말이 현실이 되버리는 걸까.

아니면 벌써 나는 꼰대가 되어버린 걸까. 

정말 싫은데 진짜 싫어했는데 그런 사람들.



#4.

초등학교 저학년때 보이스카웃 옷을 입고 다니던 형들의 모습이 멋졌다. 얼른 커서 나도 그 옷을 입고 싶었다.

막상 보이스카웃 옷을 입고 수련회를 떠났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냥 이름만 거창한 소풍이였다.


중학교때 고등학교 형들의 훤칠한 모습을 보며 나도 얼른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고 싶었다.

막상 고등학생이 되니 내가 생각하던 것과 거리가 좀 있었다. 난 공부하는 노예들을 부러워 했었구나.


그래서 얼른 대학생이 되고싶었다. 대학교만 가면 다들 즐겁게 놀거라고 그랬으니깐.

그래 그래도 대학생이 되고나니 숨통이 조금 트이긴 했다. 

입학식 전까진.


스무살 중반, 친구들 하나 둘 취직을 하게되고 나는 조금 긴 백수의 시간을 가졌다.

한달 두달, 반년.. 새벽4시에 잠들고 12시에 일어나는 생활습관에 집은 항상 어지러져 있고. 잔고는 바닥.

취직한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사회인이 되고싶었다. 

일년간의 긴 백수생활을 끝으로 나는 '회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회사원의 삶은, 역시나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꼰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말이 생각난다. '너 학교다닐때가 좋은줄 알아'. '대학생일때가 좋은줄 알아야지'

내가 정말 싫어했던 이들의 말들이 하나 둘 가슴에 와닿고 있다는게 너무나도 싫다. 이럴때마다 자괴감이 심하게 든다.




#5

서른살이면 아저씨인줄 알았다. 돈도 많을줄 알았고, 걱정도 없을 줄 알았다.

적어도 남부끄럽지 않는 신념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요즘 하나 하나 부서지는 신념들을 바라보며 

사춘기를 겪는 소년처럼 하루에도 몇번씩 흔들리고 흔들린다.

나는 이제 그러면 안되는 서른살인데.


내일 고향에 내려가 오랜만에 아버지의 얼굴을 보려고 생각중이다.

그리고 한번도 내게 말 해준적없는 아버지의 서른살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아버지도 나와 같았으려나. 같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 나이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정말 지쳤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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