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멀지 않은 미래, 컴퓨터의 성능은 양자공학의 발달로 폭발적인 비약을 이루었다.
하드디스크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더 밀도높은 정보의 저장이 가능해지면서
500원짜리 동전 부피만한 곳에 한 사람의 모든 인격이 저장되었다.
이렇다보니 지구의 모든 정보를 저장하는 데에는 아파트 3채정도 부피의 저장장치만 있으면 충분하였다.
사실 지각 내의 멘틀까지 저장하려면 훨씬 더 큰 부피가 필요하지만 인간에게 필요한 지표면의 정보만 저장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곳을 세컨드 어스라고 불렀다.
이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왜냐하면 이 곳은 컴퓨터의 세계였기 때문에
컴퓨터가 가동되는 한, 정보의 조작만으로 인간은 노화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모든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기물로 구성된 인간이 이 곳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우리들의 인격을 카피한 존재가 이 곳에 사는 것은 가능했다.
세컨드 어스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컴퓨터는 대체로 인간사회연구의 목적으로 가동되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예전에 창업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도전하지 못했다. 내가 만약 그 때 창업을 했다면 성공했을까?'
'내가 만약 그녀에게 고백했다면 우리는 지금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만약 가난하지 않았다면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등등...
위와 같은 연구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심도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다.
세컨드 어스에서는 저런 상황을 만들어서 수백번 시뮬레이션 한다.
그 컴퓨터 안에서는 60억 인구의 인생이 수백번 시뮬레이션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단지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를 뿐이다.
이후로도 더 발달한 형태의 3번째, 4번째 지구들이 속속 등장하였고
엄청난 부자는 자신만의 지구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인격 정보를 데이터로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1년마다 데이터로 저장시켜야 했다.
초기에는 늙어 죽을 때까지 데이터로 저장시켰으나 요즘에는 영아에서 30살까지의 데이터만 저장하면 되었다.
30살 이후의 인격은 30세 이전 인격의 컴퓨터 데이터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유추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어딘가에서 부자가 자신의 사랑을 끝끝내 받아주지 않은 연예인의 인격을 몰래 입수하여서
또 다른 지구에서 그 여자의 인격을 마음대로 조련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도 들려왔다.
부자는 또 다른 지구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니터로 출력하여 볼 수 있기 때문에
간접적인 욕구의 충족이 가능했다. 평소라면 다른 지구의 시간은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므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값을 순간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시간값을 조절해서 실시간으로 맞춘 후에 데이터를 입력하면
그에 대한 실시간 반응도 볼 수 있었다. 즉,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개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무서운 물건일 수 있다. 지금도 어쩌면 나의 또 다른 자아는
부자의 저장고 안에 들어가서 영원한 삶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일 뿐이고 오지랖이다. 데이터로 구성된 가상의 자아는 유기물인 나와는 다른 존재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들을 신경쓸 여유가 없다. 우리들에게는 한정된 시간과 기회만이 있을 뿐이니까.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은 짝을 찾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들은 이 모험에 실패하고 만다.
연인끼리 상처받아 헤어지고, 결혼이 파탄나는 것이 그것이다.
때문에 세컨드 어스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짝 찾기'가 되었다.
세컨드 어스에서는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나와 가장 잘 맞는 상대를 골라준다.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1억명의 이성과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본래대로라면 현실의 시간에서는 10년 가량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경우, 만남의 시작부터 복구할 수 없는 불화가 일어난다. 이 경우는 전체를 시뮬레이션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시뮬레이션 시간이 급격히 감소된다. 대체로 6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근데 세컨드 어스에서 28세까지의 사랑에 대한 결과값만 볼 수 있도록 지정한다면 1개월만에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
인생 전체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므로 시간이 대폭 줄어드는 것이다.
(짝 찾기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대부분의 나이가 20~25세이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값이 나왔다.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짝. 그녀의 이름은 미양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후보자들이 몇명 있는데 그녀와의 만남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다면
다른 후보자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면 된다.
그녀도 결과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찬찬히 훑어 본다. 학력도, 나이도, 사는 곳도.
그녀도 나의 사진을 찬찬히 훑어볼 것이다.
---------------
길게 쓰니 힘들어서 쉽니다. 재밌으면 나중에 더 쓸게요
창작글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