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조선호랑이 멸종과정(생태사학자 김동진박사 인터뷰)
게시물ID : history_248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rianjung
추천 : 2
조회수 : 1595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6/01/10 19:32:08
생태사학자인 김동진박사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조선호랑이가 어떻게 멸종에 이르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시네요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725419.html?_fr=sr1
1. 호랑이 주 서식지는 산속이 아니라 습지나 갈대숲이다. 산속은 먹이잡는데 불리하다
2. 조선왕조는 체계적으로 상당한 수의 호랑이를 잡았고, 이미 17세기에는 그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있었다

1389년 80여만결이던 농지는 16세기 후반 150만~170만결로 늘어났다. 야생에 살던 호랑이와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호환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농지확장과 동시에 국가적인 범(호랑이·표범) 포획 작업이 조선왕조 내내 이어졌다. 범 포획 전문 군사조직인 ‘착호군’이 활동했고 호피공납제, 포호포상제, 호속목 등 호랑이 잡는 다양한 제도가 시행됐다. 

중앙집권체제 강화, 관료제 발전 등 조선의 근대성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호랑이와 같은 자연은 ‘관리’받았다. 호랑이의 이동 통로, 서식지 등이 기록됐다. 국가적인 호랑이 퇴치 작업으로 조선 말기 호랑이 개체수는 이미 꽤 감소해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전국 330여 군·현에서 매년 겨울 세달 동안 호랑이와 표범을 매달 1마리씩 사냥해 가죽 3장을 공물과 진상 등으로 바치게 했다. 
성종 때 1만장 넘는 호피가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러한 제도가 200년 이상 안정적으로 시행됐다. 

1670년께에는 우역이 만연하면서 호랑이의 먹이인 사슴과 멧돼지가 전멸했다. 당시 호랑이가 미쳐서 백주 대낮에 마을을 횡행했다는 기록이 여럿 있다.
먹을 게 없어서 마을까지 내려온 것이다. 더이상 호랑이와 표범을 잡기 어려워지자 17세기 초에는 군·현별로 바치는 호피와 표피의 수를 1~2장으로 줄여주고, 1724년에는 호속목(범을 잡지 못한 대가로 내는 벌금) 제도도 혁파된다

3. 조선 호랑이의 멸종은 근대성이 커지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며 빚어진 결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랑이, 표범, 늑대 등 야생동물이 해롭다고 느꼈고 그것을 없애는 데 특별한 거부반응은 없었다. 
1917년 일본인 자본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정호군이 대대적으로 벌인 호랑이 사냥 때도 구경하고 환영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지금과 같은 야생보전 개념이 없었을 때다. 
민중은 호랑이를 영험한 동물로 여겼지만, 호랑이 잡지 말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낭만주의적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