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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푸른 땅
게시물ID : readers_236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UO
추천 : 2
조회수 : 33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6/01/22 14:44:32
소년은 동그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소년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별안간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다급한 와중에도 소년은 떠올린 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 뭔가를 중얼거리며 가물거리는 기억을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이! 할아버지이이!"

다급한 소년의 외침이 울려 퍼졌지만 야트막한 정적만이 소년을 반길 뿐이었다. 소년은 거실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자그마한 TV를 잠시 주목했다. TV에서는 온갖 자질구레하고 일관성 없는 영상들이 눈 깜박할 사이에 떠오르고, 또 사라지고 있었다. 소년은 할아버지와 대부분 시간을 이 TV를 보며 지내곤 했다.

"음. 이곳에 할아버지가 없으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소년은 왼손바닥에 오른손 주먹을 탁 치곤 외쳤다.

"그곳밖에 없지!"

소년은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년의 예상대로 소년의 할아버지는 그곳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바닥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백지와도 같은 대지에 소년의 할아버지가 물을 한 움큼 뿌리니 마치 물감이 새하얀 빈 도화지에 번지듯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게 됐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부리나케 달려오는 소년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물 뿌리는 것을 그만두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느냐. 왜 그러니 유오야."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유오를 맞이했다. 유오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거나 슬퍼하곤 했다. 다급하게 뛰어온 유오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이 뭣 때문에 뛰어왔는지 되짚어 보다가 마침내 기억이 난 듯 할아버지에게 매달렸다.

"할아버지! 나 오늘 이상한 꿈을 꿨어!"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상한 꿈이라니?"

유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머리를 쥐어 싸매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이상한 꿈이 아니라... 그래! 엄청나게 멋진 꿈이야. 푸르딩딩하니 최고로 파랗고 멋진 꿈이었어!"

푸르딩딩은 유오와 할아버지 사이의 은어였다. 유오는 때로는 멋지다 혹은 좋다는 의미로 감탄사 대신에 쓰곤 했다. 횡설수설하는 유오의 모습을 보고 빙긋 웃은 할아버지는 유오의 눈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려무나."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유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말했다.

"할아버지 나 말이야 푸른 땅을 봤어! 푸르딩딩한 땅 말이야. 그러니까 흰 땅이나 회색 땅이 섞여 있는 땅이 아닌. 사방이 온통 모조리 푸르딩딩한 땅을 봤어! 봐봐 저기 저 선까지 땅이 전부 푸르딩딩하게 덮여 있었어!"

유오는 지평선을 가리키며 무척이나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유오의 손끝을 따라 멀리 아득하게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유오가 가리키는 손끝엔 티끌 한점 없는 백색의 땅만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무언가 아련한 표정으로 그 끝을 바라보았다. 유오는 여운이 채 가시지 않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모습은 말이야. 마치... 마치. 그래 하늘 같았어!"

할아버지는 다시금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정말 멋진 꿈이야."

"그지? 엄청 멋지지?"

"그래 이제 다른 곳을 가보자꾸나."

할아버지는 유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찬다.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한창때는 주위 백 발자국을 푸른 땅으로 물들이곤 하던 그였다. 할아버지는 지친 몸을 이끌고 흔들의자에 기대었고 유오도 덩달아 옆의 소파에 뛰어들어 앉았다.

삐걱-

흔들의자는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져 볼품이 없는 데다가 갸우뚱할 때마다 삐걱 낡은 소리가 났다.

"이 녀석과 함께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군." 

오랫동안 함께한 의자이다. 이제 그처럼 이 의자도 조금씩 수명이 다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이 가벼운 몸뚱어리를 지탱하는 그의 친구는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지리라. 할아버지는 자신의 옆에서 열심히 TV 채널을 돌리고 있던 유오를 바라보았다. 유오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길은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푸른 땅. 그곳을 그 또한 본 적이 있다.


유오는 채널을 돌리다가 흥미로운 영상을 발견했는지 채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영상이 재생되고 유오는 낄낄거리더니 다시 무심하게 채널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외쳤다.

"유오야!"

할아버지의 고함에 깜짝 놀란 유오는 그제야 자신이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유오는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가 메마른 백색 땅에 조막만 한 손으로 물을 한 움큼 뿌리고 다시 들어왔다. 엄한 표정의 할아버지를 보곤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펴졌다.

"그래. 잘했다 유오야. 언제나 물을 뿌리는 것을 잊지 말려무나."

유오는 할아버지의 칭찬을 듣고는 언제 시무룩했냐 듯이 해맑게 웃었다. 

"응!"


지금 당장은 그 백색의 메마른 땅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물을 머금은 백색 땅은 그 물을 간직하여 인내하다, 언젠가 그 푸른 기운을 펼쳐 보일 것이다.
그렇다. 이 땅은 한번 머금은 물은 절대 잊지 않는다. 영원히 간직하며 그 마음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기에...


"신중해야한단다 유오야."

신나게 채널을 돌리던 유오는 뜬금없이 내뱉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곤 뒤로 돌아보았지만, 할아버지는 그저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다시 TV로 관심을 돌린 유오는 어느 순간 또 어떤 영상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지켜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유오야."

할아버지는 유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유오는 땅을 가리 켜며 말했다.

"여긴 왜 이래 할아버지?"

소년이 가리킨 땅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흰 땅, 푸른 땅과 회색빛 땅이 모두 한데 뒤엉켜 있었다. 흰 땅에서는 어스름 한 푸른 빛과 회색빛이 서로 싸우고 있었고 그렇게 회색빛으로 변한 땅에서는 쓰레기통에서나 날 법한 악취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땅들은..."

할아버지는 그 광경을 보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내쉰 것은 한숨, 아니 안타까움일지도 몰랐다.

"이 땅들은 싸움의 흔적이란다."

"싸움?"

유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유오야."

"응?"

"이 모습이 보기 싫니?"

"..."

유오는 무심코 긍정의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혼돈으로 가득 찬 들판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유오야. 싸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귀를 막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걸어가는 이는 깊은 착각에 빠지기 쉽단다. 사람은 밝은 면만을 보고 싶어 하지만 밝은 면이 있다면 어두운 면이 있는 건 당연한 이치고 그걸 잊어서는 안 돼." 
 
유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새 할아버지는 소년을 배려하지 않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정의'는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단다. 아예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 또한 이 세계에는 존재하고 있지."

할아버지의 눈이 깊은 허공을 짚는다.

"하지만 유오야..."

할아버지는 웃었다. 서글픔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정답이 없다고 정답을 찾는 것을 포기해서야 쓰겠니?"

할아버지는 흰 땅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 줌의 물을 움켜쥐고 허공에 뿌렸다.

"싸우고 말하고 토의하고 문제점을 찾아 협상하고 타협하고 그러다가 보면..."

찬란하게 햇살을 부수며 물방울들이 대지를 적신다.

"정답에 근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언젠가 노인은 꿈을 꾸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노인이 청년이었을 적의 꿈이다. 

드넓은 들판이 시리도록 푸른 물빛으로 물들어 빛나는 그런 풍경. 

유오가 보았다던 그 풍경을 노인 또한 보았다.

어떠한 싸움도 분쟁도 갈등도 없는 그런 지상낙원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곳이 꿈임을 깨달았다. 현실을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었다.

행복만 있는 낙원 따위 존재할 수 없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도 없다. 슬픔 없이는 행복도 없다. 오른쪽이 없다면 왼쪽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노인은 꿈을 꿀 수 있었다.

비록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좇다 보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아! 그 가슴이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던 땅이여!



".... 버지!!!"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더불어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뜬다. 갑자기 들이닥친 빛에 순간 시력이 마비되었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하루가 갈수록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 하루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하늘에 감사했다.

수십 년을 산 노인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저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게 잠이 들듯이 안식에 취하는 것인데...    

"할ㅇ..버지!!!"

밖에서 유오가 기운차게 부르고 있다. 녀석 또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나 보다. 

'아. 내가 없으면 유오 저 녀석은 어찌 될꼬.'

갑자기 찾아온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그래. 살아가야지... 아직 못 본 게 많으니.'

나름 기운차게 몸을 일으킨다. 잠시 찾아온 현기증에 흔들의자의 팔걸이를 잡았다. 흔들의자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신음을 내며 흔들린다. 시야가 잠깐 점멸했다. 머리를 살짝 흔들어 두통을 날려 보낸다.

그때 유오가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평소보다 더 흥분한 모습이다. 저렇게 흥분하는 모습은 흔치 않은데.

"할아버지 어서 나와봐! 빨리!!" 

유오의 재촉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선다. 잘 듣지 않는 몸을 이끌며 천천히 현관문을 나서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꿈을 꾸었다.



눈이 아직 침침하다. 산란하며 부서지는 빛이 망막을 넘어들어온다. 손을 들어 잠시 그 빛을 막는다. 

"할아버지!! 봐봐!"




-지평선 끝까지 푸르게 펼쳐져 

 가슴이 시릴 정도로 빛이 나던




"저기 저 선까지 모두 푸른 땅이야!"



-푸른 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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