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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북방개척 - 1
게시물ID : history_254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rianjung
추천 : 14
조회수 : 1358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6/02/15 21: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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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태조가 처음 북방개척을 시작했을때, 북방경계는 대동강선(평양이 있는)이 아니라 그 남쪽인 황해도 평산(패강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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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북방개척은 이미 신라때 시작되었습니다. 이 패강진이 신라에 의해 설치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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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가 대동강이남 지역을 경략하기 시작한 때는 경덕왕 (재위 742~765년) 시절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이 지역을 지배하던당나라가 발해의 흥기로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자 신라는 점진적으로 이 지역을 개척해갔다.
8세기중엽부터 9세기 초까지 황해도에 국경 군사도시를 구축하고 평산에 패강진 浿江鎭 을 설치해 국경 수비의 본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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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라하대에 들어서 국운이 기울면서 이 북방개척사업은 방치됩니다. 
신라조정이 경주근처 지키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을때 북방경계선은 실질적으로 대동강이 아닌 예성강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당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고구려유민등의 정치적 지지동원과 막강했던 호족세력 약화를 위해 북방개척이 선언됩니다.
아직 후삼국통일이 되기도 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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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기지 평양 개척 태조는 건국 3개월만인 918년 9월 평양 개척을 선언하였다.
태조는 옛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경략하지 못해이민족이 고려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잦다고 지적한 후 백성을 이주시켜 북방지역의 방위력을 강화해야만 국가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태조가 개경을 수도로 정해 궁궐을 짓고 도시를 조성한 것은 919년 봄이었다. 즉 수도를 결정하는 일보다 평양 개척이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북쪽으로 뻗어나가려는 태조는 왜 전초기지로서 평양을 선택했을까 평양은 낮은 구릉성 산지와 평야지대로 이루어진 곳으로 대동강이 남단으로 흐르며 평원군에서 발원한 보통강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대동강과 합류하는 자연 조건을 가진 곳이다.
따라서 평야가 발달하고 천혜의 수운 조건을 가진 평양은 물자와식량이 풍부해 고조선과 고구려 후기 의 수도로 번영을 누리던 유서깊은 곳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한 이후로 황폐화되어 도시로서의면모를 잃어버렸다.
신라 하대 이후로는 행정력마저 미치지 못해 여진족이 그 지역을 넘나들며 사냥과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이런 평양을 태조가 주목한 이유는 정치 군사적으로 평양이 갖는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평양은 옛 고구려 도읍지로서 고구려 고토를 되찾겠다는 태조의 북진정책 이념과 부합되는 지역이므로 고구려 유민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또 강대한 호족의 도전을 피하면서 왕실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로서 평양은최적의 조건을 구비한 곳이었다.

태조는 25년간 재위하면서 평균 2년에 한번 정도 평양을 순시하였다.
그리고 평양 행차 길에는 북방의 군사요충지를 순찰하고 주변지역에 대한 정찰 활동도 병행하였다.
이는 평양이 북방으로 뻗어나가는 전진 기지로서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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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북방정책의 최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고, 사민정책을 실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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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군사요새화 태조가 평양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평양을 행정 구역으로 편입한 조치였다.
태조는 918년 9월에 평양에 백성을 이주시킨 후 대도호부 大都護府 를 설치하고사촌동생 왕식렴 王式廉 과 광평시랑 열평 列評 을 파견해 방어 임무를맡겼다. 그리고 참좌 參佐 4~ 5명을 두었다 뒤이어 평양을 ‘서경西京 ’으로 승격하였다.

이주 대상이 된 백성은 황주 봉주 鳳州 봉산 해주 배주 白州 배천염주 鹽州 연안 등 대부분 패서 지역 주민이었다.
평양에 대한 사민 정책은 단발적인 조치로 끝나지 않고 꾸준히 시행되어 922년 (태조5년) 서경에 행차한 태조는 관청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재차 패서 출신의 호족 및 여러 군현의 양가 자제를 이주시켰다.

김행파 金行波 와박질영 朴質榮 등 호족 세력의 이주는 이들의 지역적 기반을 활용해서경 경영을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군사적으로 성장하던 패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한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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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수축하고 교육기관도 건립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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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수축은 922년부터 본격화되었다.
평양 내성 內城 은 6년에 걸쳐 완성될 정도로요새화 되었다.
938년에는 나성 羅城 을 축조하여 북진 정책의 전진기지로서 평양의 위상을 한층 제고시켰다.

평양 개척에 필요한 인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930년 (태조13)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고 정악 廷을 서학박사로 삼아 부의 생도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후 성과가 우수하자 곡식을 내려 학보 學寶 를 만들어 학교운영 기금으로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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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평양 북방에 본격적인 진설치와 성수축을 진행합니다.
더불어 중앙군을 파견하구요. 이전 궁예시절에도 진을 설치한바 있었으나 중앙군파견은 없었다는 것을 볼때 이는 매우 강력한 북방개척의 의지표시라 할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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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에서 시작되어 청천강을 경계로 축차적으로 성을 쌓고 진을설치한 태조는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중앙군을 파견해 주둔시켰다.
920년(태조3) 골암성에 개정군開定軍 3천명 928년(태조11) 안북부에 개정군 7백명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929년에 안정진 순안에언수고彦守考 안수진 평남 개천 에 흔평 昕平 흥덕진 평남 순천 에 아차성阿次城, 930년에 마산에 흔행 昕幸 강덕진 평남 성천에 평환平奐 통해진 평남 평원에 재훤才萱 등을 진두鎭頭 로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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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541125980.pdf , 고려시대 군사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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