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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북방개척 - 2 ( 발해유민 수용 )
게시물ID : history_254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rianjung
추천 : 12
조회수 : 139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6/02/16 16:51:12
태조는 발해멸망 초기에 발해유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남쪽으로 후백제와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북방의 거란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가지 측면에서 이 입장에 변화가 오게 됩니다.

첫번째는 북방변경에 자주 출몰하던 여진족 문제였습니다.
발해가 존속하던 시기부터 남으로 퍼져 나오기 시작한 여진은 고려 건국초에 두만강유역과 그 이남 그리고 압록강 일대에 흩어져있었으나
발해멸망이후 남하하면서 고려의 북방변경을 교란시켰습니다.

둘째는 북방개척을 위해 평양과 그 인근으로 이주시킨 패강진의 군사호족과 백성들로 인해 그 남쪽에 군사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원칙대로 한다면 이 패서지역을 채우기위한 남방지역에서 사민이 필요하겠으나, 당시 백제와의 대치상태를 고려할때 이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 패서지역에서 서북방으로의 사민은 서북방을 강화시키긴 했으나, 동북방이 강화된게 아니었으므로 동여진이 경제적으로 활발한 패서지역으로 접근을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

이 상황에서 패서지역을 수비하기 위한 자원으로서 발해유민의 역할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사에 발해유민이 고려에 투항하는 기록이 나오는 시기는 발해가 멸망하기 전인 925년(태조8년)이었습니다.
발해인의 투항은 태조대에 집중되었고 이후 예종 재위대까지 이어집니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하는 발해 유민을 제한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귀순한 발해 유민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수 만명을 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PNG

일례로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 柳得恭 은『발해고 渤海考 』에서 발해 유민이 10여 만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유민의 합류는 고려의 인구 증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걸로 보입니다.

고려가 발해 유민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후삼국 통일 직전부터였고
태조는 934년에 발해국 세자 대광현 大光顯 의 투항을 크게 환영하였죠.

태조는 대광현에게 ‘왕계 王繼 ’라는 이름을 내려 고려 왕족에 편입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막료와 군사들에게까지 논밭과 집을 하사하는 특전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원보 元甫 라는 벼슬을 주어 북계의 전략상 요지인 배주 白州 황해도 배천 를 지키게 하는 등 각별한 우대를 하였습니다.
출처 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541125980.pdf , 고려시대 군사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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