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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총화 - 팔공진인 총담(八公眞人 叢談) (3)
게시물ID : mystery_74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마일015
추천 : 0
조회수 : 32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2/29 20:02:54


2) 팔공진인 총담(八公眞人 叢談)


(1) 팔공진인의 소개


眞人姓柳啣成性 號八公 文化人 恒居星州八公山

진인성류함성성 호팔공 문화인 항거성주팔공산

故世人稱八公眞人 時年四百九十六歲 紫霞門人

고세인칭팔공진인 시년사백구십육세 자하문인


진인(眞人)의 성은 류씨(柳氏) 이름은 성성(成性)이며, 호는 팔공(八公)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늘 경상도 성주(星州) 팔공산(八公山)에 사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팔공진인(八公眞人)이라 일컫는다. 올해(단기 4246)년 496세이시며 자하진인(紫霞眞人)의 문인이시다.



(2) 국가의 흥망은 종교에서 기인


眞人曰 帝王之興亡 歷代之隆衰 風俗之善惡

진인왈 제왕지흥망 역대지융쇠 풍속지선악

總由於宗敎之眞僞

총유어종교지진위


진인(眞人)께서 말씀하시기를 “황제 또는 국가의 흥하고 망함과 차례차례로 전해져 내려온 그 여러 대의 성하고 쇠함과 오래 전부터 전해 오며 지켜지고 있는 생활상의 여러 가지 버릇이 되어 버린 형상의 착함과 악함은 모두다 종교의 참과 거짓에서 연유한다.”




(3) 현재는 미래와 과거의 현상


曰 天道有一無二 故無私卽云無私 有何不平

왈 천도유일무이 고무사즉운무사 유하불평

顯世人之禍福 不其善惡應非在 卽乃系三生 現前因果

현세인지화복 불기선악응비재 즉내계삼생 현전인과

將來胎盤 必古人一轍 釋氏地獄輪回之說

장래태반 필고인일철 석씨지옥윤회지설

孔聖必有餘慶 餘蘖之談 近是惟吾神敎 其眞得底

공성필유여경 여얼지담 근시유오신교 기진득저

人與天地共矣 不必論 屑瑣之理

인여천지공의 불필론 설쇄지리


※ 轍∶바퀴자국 철. 瑣∶자질구레할 쇄.


말씀하시기를 “천도(天道)는 단 하나 뿐이고 둘도 없다. 그러므로 사사로움 없이 공평하고 올바름은 곧 무사(無私)라 일컬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세상에 사람의 화(禍)와 복(福)을 나타냄에 그 착하고 악하지 아니한데 응함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곧 전생·현생·후생에 이어져 눈앞의 원인과 결과가 앞으로 닥쳐올 앞날에 태아(胎兒)이다. 반드시 옛 사람들과 같은 자국이다. (먼저 있던 다른 경우와 동일한 길을 밟음을 일컬음). 석가께서 지옥 윤회의 설과 공구(孔丘) 성인(聖人)의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남은 앙화가 있다’는 말씀이다.

요즈음 이것이 오직 나의(우리) 신교(神敎)이니 그 참[眞]을 밑에서 얻어 사람과 하늘이 함께 하니 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나니 수고롭고 좀스러운 이치다.”



(4) 자하진인은 신(神)이며 맘을 변치 말라.


曰 先生 神化 將有亘於萬萬年之度矣

왈 선생 신화 장유선어만만년지도의

更何贊之 知者但膺服 不變其心而已

갱하찬지 지자단응복 불변기심이이

말씀하옵기를 “스승(자하진인)께서는 신격화(神格化)되었고 장차 일 억년의 도수(度數)를 펼 것이다. 다시 무엇을 칭찬할 것인가. 아는 사람은 다만 설득시킴을 받으니 그 맘이 변하지 않을 따름이다.”




(5) 음양(陰陽)의 이치는 만고의 불변


曰 天地雖有 混沌之時 神理正 無沈泯之日 大一歸一

왈 천지수유 혼돈지시 신리정 무침민지일 대일귀일

大三合六 通萬古之不動本理

대삼합육 통만고지부동본리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이 비록 혼돈의 때가 있었고 신리(神理)가 옳아서 잠기고 빠지는 날은 없었다. 큰 하나인 하나로 돌아오니 큰 것은 하늘 사람 땅이 음양이 있음에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고 땅에는 뭍과 큰 바다가 있고 사람에는 사내와 계집이 있어 합하니 여섯이니 아주 옛날로부터 이제까지 움직이지 않는 근본 이치를 통함이다.”




(6) 조광윤의 대륙의 통일


曰 宋時 神市天皇 使司命眞君 下天書于汀州 黔卒王捷

왈 송시 신시천황 사사명진군 하천서우정주 금졸왕첩

以警 趙氏 將有天下之半區

이경 조씨 장유천하지반구


말씀하시기를 “송(宋)나라 때 신시천황(神市天皇)께서 사명진군(司命眞君)으로 하여금 천서(天書)를 정주(汀州) 검은 군졸(軍卒)인 왕첩(王捷)에게 주어 경계하였고 조씨(趙氏)가 장차 천하(天下)의 절반을 차지했었다.”


※ ① 송(宋)∶중국 주대(周代)에 성왕(成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형 미자계(微子啓)로 하여금 은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 봉한 나라.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에 도읍을 두었다. 춘추시대 12제후의 하나가 되어 문화적으로도 번영하였으나 양공(襄公)이 B.C.638년에 초(楚)와 싸워 소위 「송양(宋襄)의 인(仁)」이라는 웃음거리를 남기고 크게 패했다.

※ ② 신시천황(神市天皇)∶신시(神市) 제1세(世) 천황인 환웅(桓雄) 또는 거발환(居發桓) B.C.3898∼3804까지 재위 94년.

※ ③ 사명진군(司命眞君)∶신명(神名). 주로 생사를 맡아보고 하늘을 돕고 조화(造化)를 행하며 악을 벌주고 착함을 보호한다.

※ ④ 천서(天書)∶도교에서는 옥청원시천존의 말씀한 글을 일컫고 하늘에서 내려온 글을 뜻한다.

※ ⑤ 정주(汀州)∶중국 복건성의 고을 이름.

※ ⑥ 조씨(趙氏)∶서기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오대후주(五代後周)의 공제(恭帝)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운 나라 존속연간 960∼1279년 변경(卞京)에 도읍 하였다.

제8대 휘종(徽宗) 제9대 흠종(欽宗)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북쪽으로 붙들려가기 까지를 북송(北宋) 효종(孝宗)의 아우 고종(高宗)이 남으로 옮겨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하고 원(元)의 세조(世祖)에게 망할 때까지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18대 319년만에 망했다.



(7) 동방의 명장(名將) 조씨(趙氏)가 출현할 것이다.


曰 宋仁孝戊申 又以天書 示于承天門 使其君

왈 송인효무신 우이천서 시우승천문 사기군

以知神道無窮 且現于夢 有神令道 始于東方也

이지신도무궁 차현우몽 유신령도 시우동방야

宋雖得國不正 其受命則天也 後世大震之名將 趙姓可期

송수득국부정 기수명즉천야 후세대진지명장 조성가기



말씀하시기를 “단기 2800년에 또 천서를 승천문에 보이게 하여 그 임금으로 하여금 신도가 무궁함을 알게 하고 또한 꿈에 나타나서 신도로 하여금 동방에 처음 있게 하였다. 송(宋)은 비록 나라를 얻고 바르지 못해 그 명령(命令)을 하늘로부터 받았다. 뒤의 세상 대진(大震)의 명장(名將)은 조(趙)씨를 가히 기약한다.”




(8) 송(宋)은 유선(儒仙)을 숭상


曰 宋仁孝辛亥四年五月 其州城作孔子廟

왈 송인효신해사년오월 기주성작공자묘

敦尙儒術癸丑六年五月 玉淸昭應宮 奉安聖像

돈상유술계축육년오월 옥청소응궁 봉안성상

八月太淸宮又奉安 甲寅七年正月謁老子於毫州

팔월태청궁우봉안 갑인칠년정월알노자어호주

太淸宮加號曰 太上老君 混元上德皇帝

태청궁가호왈 태상노군 혼원상덕황제


말씀하옵기를 “송(宋)나라 명제(明帝) 4년 단기 2804,신해(辛亥)년 5월 그 고을과 성(城)에 공자묘(廟)를 짓고 도타웁게 유술(儒術)을 숭앙했고 명제 6년 단기 2806, 계축(癸丑)년 5월에 옥청소응궁(玉淸昭應宮)에 성상(聖像)을 봉안(奉安)했고 8월에 태청궁(太淸宮)에 또 봉안(奉安)했다. 명제 7년 단기 2807, 갑인(甲寅)년 정월에 노자(老子)님을 호주(毫州)에서 뵙고 태청궁에 호(號)를 더하여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 ‘혼원상덕황제(混元上德皇帝)’라고 높였다.”


※ ① 공자묘(孔子廟)∶공자를 모신 묘(廟). 노(魯)나라 애공(哀公) 때에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 세운 것이 최초이며 당(唐)나라 때 전국의 주(州)‧현(縣)에 건립되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공자 외에 그 제자와 역대의 뛰어난 유자(儒子)도 함께 모셨다. 문선왕묘(文宣王廟)‧문묘(文廟)‧부자묘(夫子廟)‧공묘(孔廟)라고도 하며 한국에도 성균관(成均館) 안에 문묘(文廟)가 있다.

※ ② 옥청소응궁(玉淸昭應宮)∶옥청궁(玉淸宮)으로 원시천존(元始天尊)이 계신다. 삼청궁(三淸宮)의 하나.

※ ③ 태청궁(太淸宮)∶삼청궁(三淸宮)의 하나로써 도덕천존(道德天尊)이 계신다.

(9) 송(宋)때 공자 72제자를 봉하다


曰 仁孝己酉三年夏五月 詔追封玄聖文宣王廟 配享從祀

왈 인효기유삼년하오월 조추봉현성문선왕묘 배향종사

顔閔以下九人 以及七十二人 己酉二年夏五月 加號

안민이하구인 이급칠십이인 기유이년하오월 가호

聖祖爲司命天尊

성조위사명천존


※ 詔∶조서 조, 가르칠 조. 閔∶병[病] 민, 민망할 민, 성[姓] 민.

말씀하시기를 “송(宋) 인효(仁孝) 3년 기유(己酉 단기 274년 5월 여름에 조서(詔書)를 내려 공자 죽은 뒤에 봉(封)하기를 ‘현성문선왕묘(玄聖文宣王廟)’로 신주(神主)를 모셔 문묘(文廟)‧사원(祠院)‧서원(書院) 등에 안자(顔子) 민자(閔子) 등 이하(以下) 아홉 분과 72인에 미치었고 인효 2년(잘못 쓰인 것 같음) 기유(己酉)년 여름 5월에 호(號)를 더하여 성조(聖祖)께서 사명천존(司命天尊)이 되었다.”







(10) 동이(東夷)와 중화(中華)가 대동소이


曰 余曾聞於先生 先生曰 麗末後李姓爲國

왈 여증문어선생 선생왈 여말후이성위국

而在朝在野之人 多尙宋國之文華學文然 宋之世非但遼夏

이재조재야지인 다상송국지문화학문연 송지세비단요하

金元之幷立 且得不精 又未統一 安得有華夷之別

금원지병립 차득부정 우미통일 안득유화이지별

以一主而多改年號 可知其不務政本 假作外華

이일주이다개년호 가지기불무정본 가작외화



말씀하시되 내가 일찍 선생(先生) (자하진인)으로부터 듣기로는 선생님(자하진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高麗) 말(末) 뒤 이씨(李氏)의 나라가 되니 조정(朝廷)과 재야(在野)의 사람이었다. 송(宋)나라 문화(文化)와 학문(學文)을 많이 숭상하였다. 송(宋)의 세상은 다만 요(遼)나 하(夏) 금(金)과 원(元)나라들이 아울러 섰으며 또 정(精)을 얻은 것이 아니다. 또 통일(統一)하지 못했고 어찌 중화(中華)와 동이(東夷)가 다른 것이 있겠는가? 한 임금이 년호(年號)를 많이 고쳤고 그 정치(政治)의 근본(根本)에 힘쓰지 않은 것을 가히 알겠도다. 거짓으로 밖으로 화려함을 지었다.”





(11) 영토만 크면 정통인가?


曰 世人不知本源 在何開口 說尊華攘夷之道

왈 세인부지본원 재하개구 설존화양이지도

胡元滅宋爲不祥於道 云 良可悲也 大道盛衰

호원멸송위불상어도 운 양가비야 대도성쇠

都不在世局姑舍 所謂正統云者 只以大有彊域

도부재세국고사 소위정통운자 지이대유강역

定之而秦始皇 滅六國 漢高帝勝强楚殺英雄

정지이진시황 멸육국 한고제승강초살영웅

唐太宗挾夷力而得 因胡亂而失 宋人不費一箭 奪人國

당태종협이력이득 인호란이실 송인불비일전 탈인국

且況所事之乎 天下猶謂之英武 猶謂之正統

차황소사지호 천하유위지영무 유위지정통

然則 五季諸帝有何惡毛 謂之僭名乎 編支那史者

연즉 오계제제유하악모 위지참명호 편지나사자

吾不知其可也 況乎吾震檀 口頭如是乎

오부지기가야 황호오진단 구두여시호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은 본원(本源)을 알지 못하니 어찌 입을 열어 중국을 높이고 우리나라를 더는 도(道)를 말이 있겠는가? 오랑캐 원(元)이 송(宋)을 멸망시키니 상서롭지 못한 도(道)이니 이르기를 어진이는 가히 슬프다. 큰 도(道)가 성하고 쇠하며 도무지 세상 시절을 우선 폐하고 이른바 정통(正統)을 말하는 사람은 다만 크게 나라에 붙은 땅이 큰 데 있으니 정하기는 진시황(秦始皇)이 여섯 나라(초<楚>‧연<燕>‧제<齊>‧한<漢>‧위<魏>‧조<曹>)를 멸하였고 한고제(漢高帝)는 강한 초(楚)를 죽여 이긴 영웅(英雄)이며 당태종(唐太宗)은 동이(東夷)를 힘껏 돕다가 오랑캐(胡)의 난(亂)으로 인하여 나라를 잃었다. 송(宋)은 하나의 화살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과 나라를 뺏았었다.

또한 하물며 볼 일인가? 천하(天下)가 오히려 ‘영걸(英傑)하고 매우 용맹스럽다’말하고 오히려 정통(正統)이라고 일컫는다. 그러한즉 중국의 후오대(後五代)의 모든 임금들이 어찌 악모(惡毛)가 있겠으며 분에 넘치는 이름이라 일컫겠는가? 중국의 사학자(史學者)는 기록한 것을 나는 그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물며 우리 진단(震檀)을 이와 같이 말로 처리하겠는가?”


※ ① 본원(本源)∶강 개울 등 흘러 내려오는 것의 근원. 근본(根本).

※ ② 정통(正統)∶바른 계통. 적장(嫡長)의 계통. 임금의 계통. 사물의 중심이 되는 긴요한 부분.

※ ③ 진시황(秦始皇)∶중국 진(秦)나라의 제 36대 황제. 이름은 정(政). 통일 왕조로 진나라의 시조이다. B.C.221년 전국(戰國) 제국을 평정하여 통일을 완성하고 「황제」라 칭하였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도량형‧문자‧화폐 등을 통일하였다. 법치주의‧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상통일을 기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했으며 만리장성‧교통로‧아방궁 등의 큰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 급격한 개혁을 시도했다.

※ ④ 한고제(漢高帝)∶유방(劉邦)이 초(楚)의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세운 나라(B.C.206∼A.D.220)

※ ⑤ 당태종(唐太宗)∶626∼649. 진(陳)나라 말기 북량(北凉)의 무소왕(武昭王) 고 (暠)의 자손이라 하나 한족(漢族)이 아니고 선비족(鮮卑族)이라는 설(說)도 있다. 수(隋)나라 말기에 태원(太原)의 군벌(軍閥)로서 돌궐졸(突厥族)의 남침을 막고 지방의 치안을 장악하여 차차 세력을 넓히던 이연(李淵∶당고조)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와 더불어 617년 5월에 군사를 일으켜 동년 9월에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 618년 수(隋)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그 손자 공제(恭帝) 유(侑)를 세웠는데 그 이듬해 공제를 협박하여 선위(禪位) 받아 아버지를 즉위케 하고 국호를 당(唐)이라 하였다.

건국 초에는 각지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있었으나 차례로 이들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건국과 통일대업은 총명과 지략이 출중한 세민(世民)의 힘이 컸는데 형이며 태자(太子)인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이 시기하자 이들 형제를 죽이고 626년 제2대 황제에 올랐다. 이를 ‘현무문(玄武門)의 난’이라 하며 이세민이 곧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외적(外敵)이던 돌궐(突厥)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종족도 조공(朝貢)하게 되어 국위(國威)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우리 고구려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내왔으며 629년엔 현장(玄 )이 인도여행을 떠났으며(627년도 출발설도 있음) 630년엔 동돌궐(東突厥)을 멸하고 왜(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왜(일본)도 사신을 당나라 파견(제1회 遣唐使) 635년엔 부병제도(府兵制度)를 완성하여 내치(內治)에도 힘써 637년엔 정관율령(貞觀律令)을 제정하여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638년엔 <<씨족지(氏族志)>>를 반포(頒布)하였고 640년엔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두었고 641년엔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吐蕃)으로 출가시켰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에서 유학(留學)을 청해 왔으며 고구려 원정(遠征)(제1차 645 제2차 647 제3차 648)하여 안시성(安始城) 공략에 실패 634년엔 왕현책(王玄策)을 인도에 파견 646년엔 현장(玄 )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완성했고 철륵부(鐵勒部)에 속하는 설연타(薛延陀)를 토벌하였고 647년엔 연연(燕然∶뒤의 安北)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 649년엔 태종이 죽고 아홉째 아들인 고종(高宗)이 즉위하였다.

※ ⑥ 악모(惡毛)∶붓 속에 섞인 뭉툭한 털. 좋은 것을 추려 내고 남은 찌끼. 악(惡)치.

※ ⑦ 진단(震檀)∶우리 나라를 예스럽게 일컫는 말의 하나. 진단(震壇).



(12) 원세조(元世祖)가 정통(正統)


曰 自古簡丹之嚴 帝王不能奪 將相不能奪

왈 자고간단지엄 제왕불능탈 장상불능탈

故 齊崔抒敎其兄而舍其弟 晋董獨書以趙 遁弑君

고 제최서교기형이사기제 진동독서이조 둔시군

今此編諸史則 指纂謂正 以正謂僭 比比 秦漢僞史而尤爲

금차편제사즉 지찬위정 이정위참 비비 진한위사이우위

甚焉 噫 人品之降衰 史筆之無力 實由於秦漢以來

심언 희 인품지강쇠 사필지무력 실유어진한이래

失眞食希假之故也 元世祖滅宋 而幷有四夷 其雄威武力

실진식희가지고야 원세조멸송 이병유사이 기웅위무력

彊場宏闊 猶勝秦漢 以正統大統 爲史家分別則

강장굉활 유승진한 이정통대통 위사가분별즉

此四帝外實無可居於正統 天統之名者乎

차사제외실무가거어정통 천통지명자호


※ 崔∶산우뚝할 최, 높고 가파를 최, 성[姓] 최, 고을이름 최. 抒∶당길 서, 물자아올릴 서, 쏟을 서, 덜 서, 당길 저 ,북 저. 董∶바를 동, 감독할 동, 굳을 동, 연뿌리 동, 비빔밥 통, 고물 동. 遁∶달아날 둔, 숨을 둔, 피할 둔, 끊을 둔. 晋∶나아갈 진, 억제할 진, 꽂을 진, 나라이름 진, 괘이름 진. 弑∶웃사람죽일 시. 纂∶책편찬할 찬,모을 찬, 이을 찬. 食希∶飾 꾸밀 식, 가선두를 식, 문채날 식, 분바를 식, 정제할 식. 宏∶넓을 굉, 클 굉, 넓힐 굉. 闊∶근고할 활, 어그러질 활, 간단할 활 오활(迂闊)할 활.


말씀하시기를 “예전부터 병부[符命]를 엄하게 점고[閱]하면 제왕(帝王)은 빼앗을 능력이 없으며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은 능히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제(齊)나라 최서(崔抒)가 그 형(兄)이 가르침을 그 아우를 두었고 진(晋)나라 동독서(董獨書)는 잉어 속에 칼을 숨기고 조(趙)나라의 임금을 죽였다. 이제 이 편(編)을 모든 역사(歷史)가 즉 지어 가리키기를 정(正)이라고도 하며 정(正)으로써 거짓이라고 일컫는다. 무엇이든지 진(秦)과 한(漢)이 ‘거짓 역사’라고 하며 더욱 심하다.

아아! 인품(人品)의 느리고 쇠하니 역사(歷史)를 적는 붓이 힘이 없어 실제로 연유(緣由)하여 진한(秦漢)으로부터 참[眞]을 잃었다. 거짓을 꾸미는 까닭이다.

원(元)나라 세조(世祖∶쿠빌라이 忽必烈)가 단기 3612년 남송(南宋)을 멸하고 북적(北狄)‧남만(南蠻)‧동이(東夷)‧서융(西戎)을 합함이 있었고 그 무력(武力)이 웅장하고 위엄과 큼직하고 시원스럽게 넓은 영토(領土)를 가졌으니 오히려 진(秦)이나 한(漢)보다 나았었고 이것이 정통(正統)으로 왕위(王位)를 계승하는 계통이니 사가(史家)의 분별하면 즉 이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漢武帝) 송태조(宋太祖) 원세조(元世祖)이 네 황제(皇帝) 밖은 실지로 정통(正統)에 가히 놓을 수 없으며 하늘에 명(命)을 받은 계통의 이름이 아닌가?”


※ 비비(比比)∶흔히. 매양. 모두. 낱낱이. 무엇이든지.

※ ① 한무제(漢武帝)∶후한(後漢)의 시조(始祖)인 유수(劉秀). 한고조(漢高祖)의 9세손(世孫). 왕망(王莽)의 대군(大軍)을 파(破)하고 즉위(卽位)하여 낙양(洛陽)에 도읍을 세우고 한(漢)을 다시 일으켰음.

※ ② 송태조(宋太祖)∶송(宋)의 태조(太祖). 개국(開國)의 임금. 본 이름은 조광윤(趙光胤) 탁군(琢郡)사람. 성격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와 용감하고 슬기로웠고 후주(後周)의 양위(讓位)를 받아서 제위(帝位)에 오름.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물리치고 법(法)을 존중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교학(敎學)을 진흥하며 형벌을 가혹히 하지 않고 수렴(收斂)을 적게 하여 통일(統一) 왕업(王業)의 기초를 튼튼히 함.

※ ③ 원세조(元世祖)∶1215∼1294. 이름은 쿠빌라이(忽必烈). 송(宋)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국호(國號)를 원(元)이라 하고 연경(燕京)에 도읍(都邑)함. 뒤에 왜(倭)를 친 일이 있고 또 면전(緬甸)‧안남(安南)‧조와(爪蛙) 등을 정벌(征伐)하여 영토(領土)가 아주(亞洲) 및 구라파(歐羅巴) 동부(東部)까지 뻗쳐 강토(彊土)의 넓이는 전고(前古)에 비할 바 없이 컸음.


(13) 순(舜)임금 원(元)나라 청(淸)은 신조(神祖)의 후예


曰 惟我 神祖裔之入支那主天下 始于舜 而中于元

왈 유아 신조예지입지나주천하 시우순 이중우원

終于淸也 朱元璋之謂大震之人 似也非也 其所行所說

종우청야 주원장지위대진지인 사야비야 기소행소설

近似吾曾聞之 南海眞人 朱氏之本 始於高朱蒙云云

근사오증문지 남해진인 주씨지본 시어고주몽운운

疑去上取中苦矣

의거상취중고의


※ 裔∶옷뒷자락 예 변방 예 씨 예 방자할 예 갈 예 흐를 예. 舜∶순임금 순 무궁화 순. 璋∶반쪽홀 장.


말씀하옵기를 “오직 나는 신조(神祖)의 씨가 중국으로 들어가 천하(天下)의 주인이 된 것은 순(舜)임금으로 부터 시작하여 중간에는 원(元)나라였고 청(淸)나라로 끝마쳤다. 명(明)의 주원장(朱元璋)은 우리 동방사람(大震之人)이다 아니다 하나 그의 행동과 말을 살펴 보면 내가 듣기로는 남쪽바다의 진인(眞人)이며 주(朱)씨의 시조(始祖)가 고주몽(高朱蒙)이다 이러이러하다. 의심을 버리고 맞는 것을 찾으려니 괴롭도다.”


※ ① 주원장(朱元璋)∶(1328∼1398) 중국 명(明)의 태조. 자(字)는 국서(國瑞). 안휘성(安徽省) 출생. 미천한 빈농(貧農)의 집에 태어나 원말(元末)의 혼란기에 홍건적(紅巾賊)의 1병졸에서 몸을 일으켜 장강(長江) 일대를 평정하고 남경(南京)을 점령 한(漢)민족을 재통일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했다. 관제(官制)를 개혁하고 재위 31년간에 안으로 다스리고 밖으로 쳐서 많은 치적(治績)을 올렸다.

※ ② 고주몽(高朱蒙)∶동명왕(東明王) B.C.58∼B.C.19(유리왕 1) 고구려의 시조. 재위 B.C.37∼B.C.19. 성은 고(高) 휘(諱)는 주몽‧추모(鄒牟)‧상해(象解)‧도모(都慕)‧동명성왕(東明聖王). 아버지는 동부여왕(東夫餘王) 김와(金蛙)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 류화(柳花).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김와가 즉위하여 류화를 부인으로 삼았으나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해모수(解慕漱)와 가까이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류화를 궁실에 유폐하였다. 류화는 햇볕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와 성장하니 주몽(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 불렀다. 김와의 아들 7형제의 재주가 모두 주몽만 못하였고 왕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남 대소(帶素)는 여러 형제와 신하들과 같이 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난(亂)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구려 성(姓)을 고(高)라 하였다. B.C.34(유리왕 4)에 성곽궁실(城郭宮室)을 짓고 B.C.32 행인국(荇人國)을 멸망시켰으며 B.C.27 북옥저(北沃沮)를 합쳤다. 죽은 뒤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14) 신성(神聖)의 도(道)로써 스승삼어라


曰 人當以神聖之道 爲師一節之士 不足學也

왈 인당이신성지도 위사일절지사 부족학야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마땅히 신성(神聖)의 도(道)로써 스승이 되니 변함 없는 절개(節介)의 선비는 넉넉하지 못한(모자람) 배움(공부)이다.”



(15) 군자는 결백하여 의(義)를 중히 여긴다


曰 凡治國治家 處會之法 不可君子小人勢同

왈 범치국치가 처회지법 불가군자소인세동

氷炭同處必爭 一爭之後 小人必勝 君子必敗 何者小人

빙탄동처필쟁 일쟁지후 소인필승 군자필패 하자소인

貪利忍恥擊之難去 君子 潔白重義 阻之則 引去

탐리인치격지난거 군자 결백중의 조지즉 인거


※ 阻∶막힐 조, 어려울 조, 근심할 조, 그칠 조, 의심할 조..


말씀하시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다스리고 정하여 모이는 법(法)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형세가 같지 않다. 얼음과 숯[氷炭]이 같은 곳에 있으면 반드시 싸우니 한 번 싸운 뒤에 소인(小人)이 반드시 이기고 군자(君子)는 반드시 패한다. 어떠한 사람이 소인(小人)인가? 이익을 탐하고 치욕을 참으며 쳐서 어려우면 도망간다. 어떠한 사람이 군자(君子)인가? 맘씨와 행실이 조촐하고 깨끗하여 아무런 허물이 없고 의(義)를 소중히 여기며 막히면 서로 이끌어 간다.


※ ① 얼음과 숯[氷炭]∶서로 정반대(正反對)가 되어 조화(調和)되지 못함. 또는 그러한 사물의 비유.

※ ② 의(義)∶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하고 정당한 도리. 오상(五常)의 하나임.



(16) 후천(後天)에 신인(神人)이 천서(天書)를 찾아 사용한다


曰 天之度數之循環正理 詳載在於神祖命祭天之時

왈 천지도수지순환정리 상재재어신조명제천지시

藏于大太 白岩石間 後天必有索用之神人

장우대태 백암석간 후천필유색용지신인

宋之世所謂觀天曆法 芽於天書 然未得縱詳也

송지세소위관천역법 아어천서 연미득종상야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도수(度數)의 순환(循環) 바른 이치는 신조(神祖) 명(命)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이니 큰 태백산(太白山) 바위 또는 돌 사이에 감추었으니 후천(後天)에 신인(神人)이 반드시 찾아 사용할 것이다.

송(宋)나라 세상의 이른바 관천역법(觀天曆法)이니 천서(天書)에서 처음 생겼다. 그러나 아직 얻지 못하여 자세히 모른다.”





(17) 사람의 올바르고 큰 심법(心法)이란?


曰 人之禽氣修精 在淸直勇 淸而不耀 直而不激

왈 인지금기수정 재청직용 청이불요 직이불격

勇而能溫 是人 正大心法

용이능온 시인 정대심법


※ 耀∶빛날 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기(氣)를 사로잡아 정(精)을 닦음은 맑고 곧고 용맹함에 있으니 맑으니 빛나지 않으며 곧으니 심하지(거세지)않으며 날래니 능히 따뜻하다. 이것이 사람의 올바르고 큰 심법(心法)이다.”




(18) 조광윤은 가법(家法)이 아름답지 않다


曰 世人以官爵爲榮 乃知道者之所笑然 贈諡追奪之醜行

왈 세인이관작위영 내지도자지소소연 증시추탈지추행

始于趙宋氏而鄙陋莫甚 作史者往往以宋爲中原

시우조송씨이비누막심 작사자왕왕이송위중원

主大不經矣 我國之人 多稱趙宋 然趙氏之殺弟戮侄

주대불경의 아국지인 다칭조송 연조씨지살제착질

而家法稱美可乎 眞不思之甚也.

이가법칭미가호 진불사지심야.


※ 익(謚)은 잘못 시(諡)가 옳음. 행장 시, 시호 시. 鄙∶더러울(더럽힐) 비, 시골 비, 변방 비, 인색할 비. 陋∶좁을 루, 추할 루, 더러울 루. 戮∶창으로 찌를 착. 질(侄)은 잘못 질(姪)이 옳음. 추(麤)는 추(醜)의 속자 성길 추, 클 추, 거칠(추할) 추.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은 관직(官職)과 작위(爵位)로서 영화(榮華)가 된다 하나 비로소 도(道)를 아는 사람은 웃으며 ‘그렇다’ 하는 바이며 거칠고 경솔히 행동하여 죽은 사람의 시호를 주기도하고 빼앗기도 한다. 처음 시작은 조광윤(趙匡胤)씨이니 행동이 천하고 맘이 지저분함이 극히 심했다. 역사를 짓는 사람은 이따금(때때로)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으로서 중원(中原)의 주인이 된다고 하나 하늘에 상도(常道)에는 어그러진다. 우리나라 사람은 많이 조광윤 송태조를 일컫는다. 그러나 조씨는 아우를 죽이고 조카를 창으로 찔렀으니 가법(家法)이 가히 아름답다 일컫겠는가? 참으로 생각 없음이 심하도다.”

※ ① 영화(榮華)∶귀하게 되어서 몸이 세상에 드러나고 이름이 빛남. 영예(榮譽)에 가득한 행복.

※ ② 상도(常道)∶변하지 않는 떳떳한 도리(道理). 항상 지켜야 할 도리.

※ ③ 가법(家法)∶한 집안의 법도 또는 규율. 가헌(家憲). 가령(家令).

(19) 옛 강토를 찾고 신인(神人)의 나라가 된다


曰 余於壬辰之亂 隱居九月山 淸修菴 經過其亂之有世

왈 여어임진지난 은거구월산 청수암 경과기난지유세

癸巳二月 移居伽倻山 而經三年 其間詳聞諸道

계사이월 이거가야산 이경삼년 기간상문제도

有兵亂之極 欲一次出世 救衆生則

유병난지극 욕일차출세 구중생즉

先生曰 此乃天運 非知道者所關

선생왈 차내천운 비지도자소관

余問曰 此亂將何如乎

여문왈 차난장하여호

先生曰 余思之 有神通謀略者 無幾人而 只有郭再祐

선생왈 여사지 유신통모략자 무기인이 지유곽재우

李舜臣 趙憲 權慄 金德齡諸輩 舜臣憲慄 略通天文地理

이순신 조헌 권율 김덕령제배 순신헌율 약통천문지리

兵機之學 別無神妙之術 德齡 小有神術 薄福之人

병기지학 별무신묘지술 덕령 소유신술 박복지인

必不成功 且性情偏狹 難終命 趙李輩 亦運蹇 不得其命

필불성공 차성정편협 난종명 조이배 역운건 부득기명

但再祐承其母之神術 必見太平而終其命矣

단재우승기모지신술 필견태평이종기명의

今番之亂 國終無事 五六之後 必更有事於四八之間

금번지난 국종무사 오륙지후 필경유사어사팔지간

此亂 跡 則兵不血忍權歸其手矣

차난섭적 즉병불혈인권귀기수의

大震古彊之盡 入其圖籍 後運回于神人之邦矣

대진고강지진 입기도적 후운회우신인지방의


※ 祐∶도울 우, 다행할 우. 慄∶두려울 률, 쭈그릴 률, 슬플 률, 떨 률,송구할 률. 齡∶나이 령. 偏∶치우칠 편, 불공평할 편, 반신 편, 무리 편, 오십명 편,(오십 사람을 한반으로 한 일컬음) 간사한 모양 편, 넓을 편, 한마음 편, 왼쪽획 편(만들은 글자의 왼쪽의 획). 狹∶좁을 협. 蹇∶(다리∶足) 절 건, 험할 건, 교만할 건.∶밝을 섭, 신신을 섭, 오를 섭. 彊∶지경(갈피) 강, 굳셀 강, 변방 강, 한끝 강.


가로되 “나는 임진(壬辰∶임진왜란)의 난리에 구월산(九月山) 청수암(淸修菴)에 숨어 살았다. 그 난리에 세상에 있어 사건(事件)이 지나가는 모양을 보고 들었다. 계사(癸巳∶단기 3926)년 2월에 가야산(伽倻山)으로 옮겨 3년을 지내며 그사이 모든 길로 상세히 들으니 병난(兵亂)의 극함이 있어 한 차례 세상에 나와 중생(衆生)을 구하려고 하였다.”

스승(자하진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비로소 하늘의 운(運)이니 도(道)를 아는 사람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고 하셨다.

내가 물어 말하기를 “이 난리는 앞으로 어떻겠습니까?”

스승(자하진인)께서 말씀하옵기를 “내 생각으로는 신통모략(神通謀略)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만 곽재우(郭再祐) 이순신(李舜臣) 조헌(趙憲) 권률(權慄) 김덕령(金德齡) 등 여러 무리가 있다. 순신 헌 률은 천문(天文) 지리(地理)를 약간 통했고 병기(兵機)의 학문은 다른 신묘(神妙)의 술(術)은 없도다. 덕령이 조금 신술(神術)이 있으나 복(福)이 엷은 사람이라 반드시 공(功)을 이루지 못한다. 또 성질과 심정이 맘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좁아서 천명(天命)을 마치기 어렵다.

조헌(趙憲)과 이순신(李舜臣) 무리는 또한 운(運)이 험하여 그 목숨을 얻기 어렵다. 다만 곽재우는 그 어머니의 신술(神術)을 이어 받아 반드시 태평(太平)을 보고 그 천명(天命)을 마친다.

이번의 난리에 나라는 마침내 아무 탈 없으며 30년 뒤에 반드시 사변(事變)이나 큰 사건(事件)이 다시 동쪽과 서쪽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 난리는 자취와 흔적을 밟으면 병사(兵士)는 피를 흘리지 않고 참으니 권리(權利)가 그 손으로 돌아간다. 우리나라 옛 강토가 다하여 그 지도(地圖)와 호적(戶籍)이 들어오니 뒤에 운(運)이 돌아와 신인(神人)의 나라가 된다.”


※ ① 신통모략(神通謀略)∶계략(計略)이나 계책(計策)이 신기하고도 묘하게 아는 것이 깊어 통달함.

※ ② 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1617(광해군 9) 조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字)는 계수(季綏) 호(號)는 망우(忘憂)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현풍(玄風). 황해도 관찰사 월(越)의 아들.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여러 고을이 연이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의령(宜寧)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싸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서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다. 정유재란(1597) 때도 각군(各郡)이 모조리 함락되었지만 곽재우는 끝까지 의령을 지켰으며 그 뒤 찰리사(察理使)‧절도사(節度使)를 지냈고 1609(광해군 1)에 영남절도사‧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12(광해군 4)에 서울로 불려가서 부총관(副摠管) 좌윤(左尹)을 거쳐 함경감사(咸鏡監司)를 지냈다. 문헌∶『지장집략(誌狀輯略)』.

※ ③ 이순신(李舜臣)∶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때의 명장(名將) 자(字)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변(邊)의 후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 1576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으며 발포만호(鉢浦萬戶)를 거쳐 1586년(선조 19)에 사복시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어 그해 가을 적은 병력으로 호인(胡人)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순신은 홀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명을 탈환하였고 그 일로 해임되었다. 그뒤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珖)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류성룡(柳成龍)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滿浦)첨사‧진도군수(珍島郡守)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과 싸워 도처에서 격파했으니 제1차는 옥포(玉浦)‧적진포(赤珍浦)에서 제2차는 사천(泗川)‧당포(唐浦)‧율포(栗浦)에서 제3차는 한산도(閑山島)‧안골포(安骨浦)에서 제4차는 부산포(釜山浦)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두며 완전히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조정에서는 위의 공으로 그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주고 최초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임명 그러나 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1595년(선조 29) 2월 서울에 압송 고문 끝에 사형을 받게 된 것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의 반대로 사형이 면제되어 4월 1일 권률(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12척의 배로써 8월 15일 적의 대부대를 명량(鳴梁)에서 대파하고 11월 18일 노량(露粱)에서 적을 섬멸하였으나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순신은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위대한 인물이니 명(明)나라 진인(陳璘)도 그를 평하여 <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그를 칭찬하였다. 선조는 특사를 보내어 이를 조문 시호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의 호를 주어 덕풍군(德豊君)에 봉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고향에는 충신문(忠臣門)을 세우고 정조(正祖) 때에는 영의정을 추증 임금이 친히 지은 비문을 하사하였다.

※ ④ 조헌(趙憲)∶서기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의병장. 자(字)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백천(白川). 응지(應祉)의 아들. 1567년(명종 22) 식년 문과에 급제 교서관(校書館)에 속했다가 정주교수(定州敎授)와 파주(坡州)교수 1572년(선조 5) 홍문관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이 옳지 않음을 극간(極諫)하다 파면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의 따를만한 것을 조목조목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뒤에 박사(博士) 호‧예 이조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통진(通津)현감으로 잘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내노(內奴)를 취조중 장살(杖殺)하고 부평(富平)에 귀양갔다. 1581년(선조 14)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全羅都事)로 나가 소(疏)를 올려 연산군 때 공안(貢案)으로 민폐가 되는 점을 개혁할 것을 청하고 율곡(栗谷)등 어진 선비들과 깊이 사귀었다. 1582년 보은(報恩)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충(表忠)할 것을 청하고 1586년 공주제독(公州提督)이 되어 선비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원근(遠近)에서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공이 있었으나 순찰사(巡察使) 윤선각(尹先覺)의 시기를 받고 홍성(洪城) 지방에 옮겨가서 의병을 모아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금산(錦山)에서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적과 싸우다 700 의병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율곡의 문인(門人)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으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율곡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행조(行朝)에서는 봉상첨정(奉常僉正)에 임명 이에 또 이조참판동지경연 의금부춘추관사(吏曹參判同知經筵 義禁府春秋館事)에 추증 1604년(선조 37) 이조판서를 가증(加贈)하고 그 사당이 설립 1609년(광해군 1) 표충(表忠)이라는 액(額)이 하사 1663년(현종 4) 고경명(高敬命)‧류팽로(柳彭老)와 함께 모신 금산 순의단(殉義壇)에 액(額)을 하사 1734년(영조 10) 일찌기 그가 질정관(質正官)으로 있던 1574년(선조 7)에 수사(手寫)한 「조천록(朝天錄)」이 왕명으로 간행 1754년(영조 30) 영의정이 추증 뒤에 공자묘(孔子廟)에 함께 모셨다. 그는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사충신(壬辰四忠臣)의 하나다.

※ ⑤ 권률(權慄)∶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선조 때의 도원수.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본관은 안동(安東). 철(轍)의 아들. 1582년(선조 15) 식년(式年) 병과(丙科)에 급제 예조좌랑‧호조정랑의 벼슬을 지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광주(光州)목사로 군병을 모집하여 방어사 곽영(郭嶸)에 예속되었다. 용인(龍仁)싸움에서 패했으므로 다시 광주(光州)에 가서 천여 명의 군병을 모집하여 남원(南原)싸움에서 적을 대파하고 나주(羅州)목사가 되어 부임전에 전라도순찰사가 되었다. 전주에서 병사 만 여명을 인솔하고 수원 독산(禿山)에 진치고 적의 서진(西進)을 막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어검을 하사하여 군율을 엄정하게 하였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의 싸움에서는 2천 3백명의 관군과 오백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왜병 2만 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첩(大捷)의 공으로 6월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전군(全軍)을 지휘 1596년 충청도관찰사에 취임하였고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의 하사(下賜)를 받았다.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을 추증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의 추봉(追封)을 받았다.

※ ⑥ 김덕령(金德齡)∶1567(명종 22)∼1596(선조 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字)는 경수(景樹)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본관은 광산(光山). 붕섭(鵬燮)의 아들. 어려서 글을 배워 장성하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1593년(선조 26)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돈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서 왜병의 호남 진출을 막고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걸쳐 대군을 무찔렀다. 호익장군(虎翼將軍)이라고 사호(賜號)를 받았으나 1595년(선조 28)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 적의 책략으로 적장과 통한다는 말이 나와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에 지쳐 옥중에서 죽었다. 1681년(숙종 7) 그 억울함이 알려져 병조판서로 추증(追贈)되고 광주(光州) 의열사(義烈祠)에 배향(配享)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20) 사람과 귀(鬼)가 같은 길로 펼치다


曰 戊子之歲 余侍坐先生 先生偶然歎曰 余觀天象

왈 무자지세 여시좌선생 선생우연탄왈 여관천상

東洋不過五六年 大有兵火 五十年間 人不得安靜之志

동양불과오륙년 대유병화 오십년간 인부득안정지지

然 西洋不過三十年 一大革命 人畜多傷 其時東洋

연 서양불과삼십년 일대혁명 인축다상 기시동양

別無大損 年當赤鼠 天下大一動之象 而繼此五年

별무대손 년당적서 천하대일동지상 이계차오년

선人鬼同路矣 生者幾何 汝亦知之乎 余起而問救人之道

선인귀동로의 생자기하 여역지지호 여기이문구인지도


※ 鼠∶쥐 서, 우물쭈물할 서, 산이름 서, 좀도둑 서, 근심할 서.∶베풀 선, 구할 선, 펼 선, 굳셀 환.


왈(曰) “무자(戊子)의 해에 나는 스승(자하진인)을 모시고 앉았는데, 스승께서 뜻밖에 마치 탄식하여 말씀하시옵기를 ‘내가 하늘의 상(象)을 관찰하니 동양(東洋)은 30년을 지나지 않아 큰 병화(兵火)가 있으며 50년간 사람들이 편안하고 조용한 뜻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서양(西洋)은 30년을 지나지 못하여 하나의 큰 혁명(革命)이니 사람과 가축이 많이 다치며 그 때 동양(東洋)은 큰 손해는 별로 없고 병자(丙子)년에 당하면 온누리에 큰 하나의 움직이는 상(象)이며 이어서 5년이 되면 사람과 귀(鬼)가 같은 길을 구하도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떠한가? 너는 또한 알겠느냐?’하셨다. 나는 일어나 사람을 구하는 길(道)을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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