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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보았다. (네타주의)
게시물ID : mabinogi_1409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겨울을걷는다
추천 : 19
조회수 : 1225회
댓글수 : 21개
등록시간 : 2016/03/29 12:21:09
어제 밤, 메탈스켈레톤에게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메인스트림 도전은 끝났다.
힘든 여정이었다. 바리던전을 클리어하고, 실패했던 녹색 구슬던전에서 헤비 가고일을 잡아냄으로써 어쩌면 약간은 우쭐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절대 불가능할것 같았던 헤비가고일을 잡아냈으니, 이제 내 마비생활은 탄탄대로로 흘러가, 여신을 구하고 에린의 영웅이 되어
NPC들이 내 활약을 칭송하며 새로 태어나는 뉴비들에게 하는 첫 축복의 속삭임이 내 이름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구슬 던전의 지하 3층. 한 시간을 넘게 사투를 벌인 내 캐릭터의 HP는 빨간색보다 검은색이 더 많았다.
나오의 도움은 없다. 원격 부활은 캐시였다. 망할 넥슨. 하지만 여태 벌인 전투들로 미뤄봤을 때, 이 이상 힘든 몹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다수 인식도 없고, HP 물약은 충분했다. 스테미너 포션 또한 넘쳐났다.
이게 내 방심의 원인이었다.
상자를 열자 몹들이 튀어나왔다. 정신없이 대시어택과 어퍼컷과 드롭킥을 날리며 하나하나 몹을 잡아나갔다. 가끔 무리하게 연계기를 사용하느라 다중인식에 걸리기도 했지만, 공략에서 본 첫 영웅재능 덕에 위기탈출을 얻은 나에게 무서울 건 없었다.
그랬어야 했다.
내 드롭킥을 맞고 날아간 메탈스켈레톤이 피가 거의 없는 상태로 나뒹굴고, 난 디펜스를 걸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허무하게 디펜스를 치는 메탈스켈레톤의 평타를 비웃으며 AI따위.. 날 이기려면 알파고를 들고와라! 하며 평타를 때리는 순간
띵~
영창피아노의 맑은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곧 내 죽음의 선고였다. 병풍 뒤에서 듣는 종소리의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다시 디펜스를 걸려고 했으나 허무한 쿨타임 메세지만 허공에 메아리 치고, 곧바로 카운터어택을 준비했으나 그 땐 이미 늦었다. 메탈스켈레톤의 차가운 칼이 내 오장육부를 뒤집어 놨고, 결국 난 죽었다.
마영전 레이드 솔플에 실패했을 때도, 사이퍼즈를 하며 아무리 열이 받아도 절대 하지 않았던, 20만원짜리 귀중한 내 키보드에 샷건을 치며 하루는 끝났다.

그랬어야 했다.

허무한 마음과 분노에 가득 차 키보드를 어루만지며 마비게시판에 오늘의 일을. 내 분노를. 키보드의 복수를 잊지 않으려 글을 작성하고 남은 시간동안 평화의 마음을 갖기 위해 축포 알바를 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내 화면에 누군가가 나와 친우의 정을 맺고 싶다는 창이 띄워졌다.
누구지? 스팸인가? 요샌 게임 메신저에서도 스팸이 있나? 궁금했다. 일단 친구 수락을 하고 난 후, 메신저 창을 띄워서 누구냐고 물어볼 찰나
"게시판에서 글을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보험 안들어요"
"아니 글 보고.."
"핸드폰 안바꿔요"
"바리던전.."
"종교 안믿어요. 다단계 안해요."
이미 영창피아노의 맑은 팅 소리만 귓가에 맴도는 나에겐 상대의 말이 보이지 않았고, 그런 나에게 침착하게 자신의 목적을 설명한 분은 아재셨다.
본인이 본인을 아재라 칭하셨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해요"
그 시간 11시 30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내 특성상 지금 게임을 바로 끄고 자더라도 1시간에서 2시간은 뒤척일 것이고, 내일 회사에서는 중요한 현장점검과 본사 점검이 예정되어있다. 운전도 내가 해야한다. 그리고 난 스토리를 씹뜯맛즐 하고싶은 성격이라, 영상을 보는데 민폐일 것 같았다.
그리고 혼자서 영창피아노를 깨부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맑은 소리 고운 소리 영창피아노를 헤비메탈 DMC로 바꿔놓기 전에 이 한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제가 12시엔 자야해서요ㅎㅎ..친추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도움이라고 크게 소리지를게요"
사실이었다. 대화를 나눌 때 이미 11시 30분을 지나고 있었고, 난 축포알바만 하고 자야지...이것만 하고 자야지... 하며 전형적인 겜창의 중얼거림을 통해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그런 나에게 신과 같이 다가온 그는,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따온다는 관운장의 스탠스를 뒤집어 쓰고는
"12시전에 다 끝나요. 걱정 말고 빨리 바리로 와요. 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관운장의 스탠스 탓일까. 나는 그의 패기에 짓눌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홀린 듯 바리던전으로 가는 문게이트를 열었다.

인사를 간단히 나누고 던전에 들어갔다. 화려한 옷과 게임과 어울리지 않는 스쿠터 펫을 타고 나를 기다리던 그는, 일분 일초가 아깝다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내 생에 첫 파티플레이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수의 플레이를 잘 보고 영창피아노를 깨부술 방법을 연구할 생각에 열심히 달려갔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나는 몹을 하나하나 전부 다 잡고 지나갔는데, 그는 최소한의 열쇠만 얻고 다른 몹은 다 버리고 갔다.
내가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르는 타입이라면, 그는 산을 왜 오르냐. 피하면 될 것을. 이라며 순식간에 던전을 훑어내려갔다.
미친.... 난 왜 저 생각을 못하고 몹들을 하나하나 상대했을까...
고수의 플레이 방식을 보기도 전에, 그는 스쿠터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나보다 먼저 던전을 치고 나갔고, 그의 고마력 스쿠터에 맞서 달리기에 내 비루한 제설용빗자루는 너무 느려터졌다.
그러던 어느 방. 날 죽인 그놈들이 나타났다. 열심히 따라잡은 덕에 겨우 타이밍이 맞은 나는, 그의 전투 스타일을 보고 팅을 막을 방법에 대해 연구하리라 다짐하고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런 내 기대와 달리, 그는 그저 허공을 뱅글뱅글 돌며 총을 쏠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날 괴롭히던 영창피아노의 맑은 소리도, 다중인식의 난해함도 그의 총알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박쥐를 잡듯 그는 메탈스켈레톤을 때려잡았고-총으로 쏴죽였으니 때려잡았단 표현은 적절치 못하지만, 이 단어 외에 내 부족한 어휘력으론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순식간에 던전은 진행됐다. 몹이 정리되는걸 보고 황당함과 허무함과 놀람에 채팅창에 "?" 한 단어를 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다음방으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가 버그를 쓰는건 아닐까... 이게 말로만 듣던 짱깨들이 쓴다는 몹순삭 핵인가... 같은 넥슨게임인 카트라이더의 자석 아이템을 이용해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을 찍은건 아닐까.. 의심하며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순식간에 저세상으로 넘어가고, 녹색 구슬 던전을 격파하고, 검은 구슬 던전 또한 같은 패턴이었다.
그의 공중제비를 견뎌내는 몹은 존재하지 않았고, 운 좋게 범위에서 벗어난 몹들 또한 평타 한두방에 동료와 같이 향냄새를 맡으며 사라져갔다.
마지막 여신의 펜던트 퀘스트를 남겨놓고, 그는 퀘스트 대화를 읽고 온 나를 마치 뒤에서 지켜보기라도 했다는 듯
"도우갈 건방지죠? 중2병 새끼...나를 이겨볼테면 이겨보라니.."
한마디를 남기고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여신을 구하는 마지막 던전이어서 그랬을까. 그는 전보다는 평타의 비율이 높아졌고, 공중제비로 방이 클리어 되지 않자 12시..12시..중얼거리며 스쿠터를 더 빠르게 몰았다. 여전히 빗자루로 따라잡지 못하는 나는, 저 스쿠터는 8기통일거라 믿으며 열심히 쫓아갔고, 어느 새 마지막 보스방에 도착했다.
나는 그에게 영상을 전부 보고싶고, 대화를 씹뜯맛즐 하고싶다고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영상을 지켜봤다.
키홀과 마우러스의 대립. 깨어나버린 글라스 기브넨.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감탄하기도 하고, 기브넨이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을 끊으며 울부짖는 부분에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괴물같은 힘을 보여준 그라도 글라스 기브넨을 둘이 온건 실수였나... 내가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고기방패라도 되어야 하나...
마영전의 글라스 기브넨을 떠올리며 몸서리치다 영상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영상이 시작됐다.
????
??????
그는 파괴의 화신이라는 글라스 기브넨을 단 한방에 제압했다.
아니...파괴의 화신이라며... 에린을 멸망시킨다며... 어쩌면 이 사람이 파괴의 화신인건 아닐까... 어쩐지 던전 중간에 갑자기 100만볼트를 충전하는 모 만화의 전기쥐처럼 몸에 전기를 두르고는 주변 적들을 번개로 몰살시킬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신은 모리안이고 악신은 키홀이고.. 이사람은 악마인가... 내가 악마한테 영혼을 판건가... 이제 난 어떻게 되는거지.. 가진걸 모두 놓고 가면 목숨마저 죽일까...
마지막 스토리에 부녀간의 정을 느끼며 감동받기에 내 충격은 너무 컸고, 내 마음은 공포에 가득 찼다.
대화가 끝난 후 티르코네일로의 귀환.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고 해줬고, 내가 입고 있는 갑옷이 흉하다며 옷을 주고는 떠나갔다.
그 시간이 11시 58분. 그의 말대로 12시 이전에 모든 상황은 끝이 났다.
그가 떠난 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는 마법에서 풀린 신데렐라처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꿈을 꾼 건 아닐까... 어떻게 글라스 기브넨을 한방에 죽인걸까.. 역시 핵인가.. 완전 탐난다.. 아니 신고를 해야하나..
꿈이라고 믿기엔 그가 내게 남긴 아이템과 퀘스트 클리어의 징표인 여신의 인챈트는 내 인벤에서 영롱히 new를 띄우며 빛나고 있었고
메신저 창에 그의 닉네임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결국, 난 인벤정리만 하고 자야지...알바 한 번만 하고 자야지...를 중얼거리다 2시 반에 잠들었다. 명불허전 겜창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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