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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건 의사 이토 저격 3년형이면 충분 .. 106주년.
게시물ID : sisa_7317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마일015
추천 : 4
조회수 : 84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4/28 16:47:46

벌써 시간이 105년이 흘렀다. 
 201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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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이토 저격 3년형이면 충분" 105년전 변론 발굴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19년 10월26일 금요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것은 20세기 초 최대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저격 당일 하얼빈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도했고 거사에 얽힌 비화들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톱 제목을 ‘이토 죽였다, 한국점령을, 복수하기 위해(Slew Ito to Avenge, Conquest of Korea)라고 단 타임스는 “나는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토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하얼빈에 왔다!”고 안중근 의사의 격정적인 육성을 소개했다. 또한 일본의 가와카미 총영사가 이토 일행의 환영을 위해 러시아 당국에 경호를 완화해 달라고 요청해 안중근 의사 등이 무사히 잠입하는데 도움이 된 사실도 전했다. 저격한 시간은 당초 알려진 오전 9시30분이 아니라 9시였고 이토의 사망 시간도 오전 11시가 아닌, 9시20분으로 나타났다. 2014.03.05. <사진=ko.wikipedia.org> [email protected] 2014-03-05
 
 
안중근장군 사형선고 105년 맞아 美 인디펜던트지 사형선고 부당 변론 소개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것에 대한 선고는 3년형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사실이 105년만에 밝혀졌다.

1910년 2월14일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그에 앞서 변호인들은 비슷한 사건에 대한 판례를 들어 극형이 언도되서는 안되며, 3년정도의 징역형이면 충분하다는 변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뉴시스가 입수한 이같은 내용은 1911년 뉴욕에서 발행된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상반기 연감 집필자였던 존 하이드 디포레스트가 '1910년의 일본(The Japan of 1910)'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이다.

정치인이자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이기도 했던 디포레스트는 이 글에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1910년의 문을 여는 일대 사건'으로 규정하고 변론내용을 상세히 소개해 주목된다.

당시 일제는 러시아인과 영국인등의 무료 변호 자원을 막았으며 심지어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이들 변호사는 일제의 '짜맞추기 법정'에 동원됐으나 비교적 양심적인 변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두 변호인은 재판부에 "(안중근 의사를) 극형에 처하는 것은 오늘날 법의 목적에 상치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일본)를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를 살해하려한 자도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다. (1904년 미국에서) 스티븐스를 죽인 암살자(장인환 의사)도 단지 25년형이 구형됐다"고 형평성을 강조했다.

러시아 황태자 살인미수사건은 1891년 러시아제국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경호를 맡은 순사 쓰다 산조(津田三藏)에게 칼을 맞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당시 소국이었던 일본은 강대국 러시아 황태자를 국빈 대접하며 최상의 예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일본 왕이 나서 거푸 사죄하고 러시아 황태자의 회복을 위해 국민적인 기도회를 연일 여는 등 보복을 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이 때문에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쓰다는 '모살미수죄'로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법무대신이 사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에 대한 선고는 3년형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사실이 105년만에 밝혀졌다. 안중근의사의 사형언도일인 2월14일을 맞아 뉴시스가 입수한 이 내용은 1911년 뉴욕에서 발행된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상반기 연감 집필자였던 존 하이드 디포레스트가 ‘1910년의 일본(The Japan of 1910)’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이다. 또한 싱가포르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이토 저격 두달 후인 1909년 12월21일 “저격자에게 사형이 언도될 것인지는 아주 회의적이다(too doubtful)”라고 언급하는 등 과도한 선고를 경계하고 일제의 짜맞추기식 재판을 예견하는듯한 기사를 실었다. 사진은 스트레이트 타임스. 2015.02.13. <사진=싱가포르국립도서관 DB> [email protected] 2015-02-14

두 변호인은 이토 히로부미 조차도 안중근의사에 대해 관대함을 보일 것이라는 변론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만일 우리가 이토백작의 가슴에 대해 직접 호소한다면 그조차도 관대한 처분을 내릴 것이다. 왜 일본이 열리기를 원하는 안중근에게 그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극형 선고가 도리어 안중근 의사를 더욱 (영웅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는 논리도 폈다. 변호인들은 "판사의 결정은 세계가 안중근을 작게 평가하도록 만들 수 있다. 모든 관점에서 볼때 그에게 3년형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데포레스트는 이 글에서 "안중근은 진정한 애국자로서 자신의 행위를 찬양했다. 그는 순교자로서 두려움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하고 "우리는 (이토) 저격이 한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는 마지막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사형 언도 가능성 극히 회의적" 스트레이트 타임스 

당시 일제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 극형을 내리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을 한 기사도 눈길을 끈다. 영국 지배하의 싱가포르에서 발행된 아시아 최대의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이토 저격 두달 후인 1909년 12월21일 보도에서 "저격 재판이 대중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비공개로 열린다"며 "당사국 대표들은 재판정에 입장이 허용되지만 모든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신문은 "일본 당국은 재판내용이 널리 퍼지면 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과정에서 저격자의 방어논리나 영웅적인 언급이 또다른 저격을 촉발하도록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저격자에게 사형이 언도될 것인지는 아주 회의적이다(too doubtful)"라고 언급함으로써 독립군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과도한 선고가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 2월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일주일 후인 2월21일 "이토백작의 저격자에 대한 재판이 마무리됐다. 주모자는 사형이 선고됐고 다른 공모자는 3년형이 언도됐다"고 전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에 대한 선고는 3년형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사실이 105년만에 밝혀졌다. 안중근의사의 사형언도일인 2월14일을 맞아 뉴시스가 입수한 이 내용은 1911년 뉴욕에서 발행된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상반기 연감 집필자였던 존 하이드 디포레스트가 ‘1910년의 일본(The Japan of 1910)’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이다. 또한 싱가포르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이토 저격 두달 후인 1909년 12월21일 “저격자에게 사형이 언도될 것인지는 아주 회의적이다(too doubtful)”라고 언급하는 등 과도한 선고를 경계하고 일제의 짜맞추기식 재판을 예견하는듯한 기사를 실었다. 사진은 1910년 3월16일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보도한 스트레이트 타임스 기사. 2015.02.13. <사진=싱가포르국립도서관 DB> [email protected] 2015-02-14

세계 미디어의 한국관련 기사를 DB화하고 있는 재미언론인 문기성씨는 "안중근 장군의 사형언도일을 맞아 일제의 짜맞추기식 재판을 예견한듯한 한세기전 미디어들의 보도는 사료적 가치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세계 언론의 관심은 계속됐다. 2월21일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저격 당시를 촬영한 동영상의 존재를 언급했다. 또한 뉴욕에서 발간된 사진전문 월간지 포토그래픽 타임스는 1910년판 '외신 다이제스트' 코너에서 "러시아 영화사가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의 회담을 촬영하는 계약에 따라 카메라를 만주 하얼빈의 사이사간(Tsaitsagan) 철도역에 설치했다"면서 동영상의 가치를 소개해 시선을 끌었다.

포토그래픽 타임스는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오다가 한국인 저격자에 의해 총을 맞았다. 그는 숨졌고 두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모든 장면이 동영상으로 촬영됐고 질 좋은 영상 한 세트가 있다. 러시아 영화사는 이 영상의 가치를 15만루블(약 12만달러)로 평가했지만 아직 이를 입수한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한편 스트레이트 타임스는 3월10일 "블라디보스톡에 한국 저격단 조직이 200명이 있으며 이들이 이토 백작의 죽음에 관여했다. 이들 조직은 또한 가쓰라 백작과 하세가와 대장의 암살을 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같은 달 16일엔 이른바 '단지동맹(斷指同盟)'이 보도돼 세인을 놀라게 했다. "뤼순형무소의 재판에서 이토의 저격자 안중근은 왼손 약지 끝마디가 없는 이유를 묻자 섬찟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 봄 십여명의 한국인이 북한의 한 마을 연추에서 극동의 평화를 위해 확고한 노력을 기울이자는 맹세를 하였다. 이러한 맹세의 약조를 위해 각자 약지를 끊었다. 그리고 태극기 위에 혈서로 조선제국의 독립을 의미하는 4개의 한자(大韓獨立)를 썼다." 

3월26일 전격 집행된 안중근 장군의 형집행은 바로 당일 대양주 언론들도 속보로 전할만큼 빅 뉴스였다.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발행된 '디 애드버타이저'는 "일본정치인 이토백작을 저격한 한국인이 어제 뤼순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저격자는 반일주의로 유명한 평양내 한인조직의 '도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명의 지도부는 극비리에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만주에 들어갔다"며 의거 뒷이야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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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106주년 안중근의사…"7발 쏜 뒤 마지막 한발 남긴 뜻은"

2016/03/24 
 
"마지막 탄환, 자결용 아니었다"…어머니 편지도 기록엔 없어
안의사 기념사업회 26일 효창공원서 추모식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안중근은 왜 한 발의 총알을 남겼는가? 7발을 쏜 뒤 안중근은 마지막 한 발에 대해 생각했으리라. 아마도 그 한 발은 자기 자신의 자결을 위해 준비한 탄환이었을 것이다." (한 인터넷 블로그에 실린 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이후 권총에 탄환 한 발이 남았다는 사실을 두고 세간에는 흔히 마지막 한 발은 자결용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24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와 같은 해석은 감동적이지만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외에도 민족의 영웅 안 의사와 관련한 속설 중에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 추측들이 많다.

◇ 안중근 "재판서 이토의 죄악을 하나하나 진술하려 했다"

사업회가 지난해 펴낸 안중근 자료집 중 '안중근 신문기록'을 보면 안 의사는 거사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뒤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好雄) 검사의 신문에 한결같이 자결할 마음이 없었다고 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 의사는 검사가 "권총 한 발을 남긴 것은 결행한 후 자살할 작정이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묻자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안 의사는 "이토의 목숨을 빼앗으면 나는 법정에 끌려나갈 테고, 그때 이토의 죄악을 하나하나 진술하고 나 자신은 일본 측에 일임할 생각이었다"며 탄환 한 발이 남은 것은 "이토가 이미 쓰러져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재판정에서도 안 의사는 "죽는다는 생각은 없었다"며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안 의사는 거사 전에 '쥐도적(鼠竊) 이토'라는 표현이 들어간 노래 '장부가'를 지어두고 자신이 조사를 받으면 자연히 이 노래가 신문사로 흘러들어가 보도될 것으로 예상하는 등 체포되고 나서 조사와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의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안 의사는 의거의 목적을 이토 제거보다 재판투쟁에 뒀다"며 "재판을 통해 일제의 한국침략 상황을 세상에 알리려고 이토를 처단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재판 이후 영국 신문 '더 그래픽'은 1910년 4월 16일자 기사에서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으며 그의 입을 통해 이토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안중근 의사 [연합뉴스DB]
◇ 어머니 편지도 기록 없어…"독서 못 마쳤으니 사형 늦춰달라" 발언도 허구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에 게재된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다. 안 의사의 어머니다운 강개가 느껴질 만큼 감동적인 편지이지만, 이 편지 역시 구전되는 것일 뿐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는게 사업회 설명이다.

다만 1910년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조 여사가 일본 헌병대에서 "중근이가 이번에 행한 일은 생각한 지 오래된 일이다. 러일전쟁 이후로 밤이나 낮이나 말을 하든 일을 하든 오직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생각 뿐이었다"라고 진술했다는 기록이 있어 조 여사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사형집행일에 안 의사가 독서를 끝마치지 못했다며 5분만 집행을 늦춰달라고 했다는 일화도 여러 책에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지만, 실제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형집행 당시 안 의사는 '동양평화만세' 삼창을 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하고 대신 천주교도임을 참작해 잠시 기도할 시간을 얻었다는 것이 현재 있는 기록의 전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변호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졌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 전 대통령은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이었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전명운 의사에 대한 법정 통역을 거부한 바 있는데, 이를 안 의사에 대한 변호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 뤼순(旅順)에서 마차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길 [연합뉴스DB]

◇ "틀린 속설 바로잡으려면 자료집 편찬 중요"…26일 효창공원서 추모식

사업회는 안 의사에 대한 모든 자료를 망라한 '안중근 자료집'을 38권 규모로 편찬하고 있다.

지난해 1차분 11권이 발간됐고 올해 2차분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내후년에는 완간하겠다는 계획이다.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해 사업회가 자체 예산으로 준비해오다 다행히 지난해 서울시의회가 인쇄비 예산을 지원해 책을 찍을 수 있었고, 올해는 원문해독과 번역 등 사업비 예산도 추가로 지원받았다.

윤원일 안중근평화연구원 부원장은 "안 의사는 잘못된 속설들로 인위적으로 미화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가 존경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며 "감동적인 일화를 자꾸 만들면 역사를 감상적인 수준으로 만들어 자칫 국수주의가 될 우려가 있다"고 경계했다.

윤 부원장은 그런 의미에서 연구자와 대중이 안 의사와 하얼빈 거사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안중근 자료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업회는 안 의사 서거 일인 26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안중근의사 순국 106주년 추모식'을 연다.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 묘역 옆에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안장한 삼의사묘역과 함께 안 의사 유해를 찾았을 때 모셔오기 위해 마련해둔 안 의사의 가묘가 있다.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 [연합뉴스DB]



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3/23/0200000000AKR201603231934000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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