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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상조에 가입하셨습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13116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데모닉333
추천 : 0
조회수 : 3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5/04 16:3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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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생신을 기념해서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하는 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조카들과 놀아주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생신선물로 봉투를 드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으니 나도 주시겠다며 뭔가를 꺼내 주십니다.

신랑에게는 금색이 번쩍이는 시계를, 저에게는 손톱 반만한 진주가 물린 금색 목걸이를 주셨습니다.

어릴 때 부터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시켜먹었다가는 돈아까운 줄 모른다고 불호령을 내리던,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것도 사치라고 여기며 용돈도 주지 않아서 학창시절 내내 간식이라고는 사먹을 수 없게 했던
그 아버지가 이걸 돈 주고 사셨을 리가 없지만 감사하다며 받아서 집에 갈 때까지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신랑도 착해서 호호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며 차셨을만한 시계를 - 누가 봐도 가품의 가품인 ㅎㅎㅎ- 멋있다면서
집에 갈 때까지 차고 있어 주었구요.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보험상품 가입해서 받은 거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이번엔 상조회사에 가입했다고 하시더군요. (엄마가 몰래 알려주심 ㅋㅋ)

아마 아빠의 인생으로는 돈을 주고 목걸이나 시계를 살 수 없었을 겁니다.
초등교육도 마치지 못하고 주정뱅이 (할)아버지의 빚을 머슴살이로 갚아야했던 당신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을테니까요.

그에 반해 보험은 있으면 좋은 것이고 언제든 해지하면 될 일이니
어느 광고에서 사은품으로 주는 시계와 목걸이를 본 순간 제가 생각났을 겁니다.

어린이날 선물은 커녕 생일 선물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한, 입학/졸업 선물도 한번 제대로 주지 못한.
오빠를 챙기다 뒤쳐져서 결혼할 때마저 쓰던 김치냉장고를 들려보냈던 막내딸과 사위가 생각났을 겁니다.
(그렇다고 오빠가 엄청 받고 자란 것도 아니라는게 함정. 도토리 키재기라 ㅎㅎㅎ)

상조보험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래. 어차피 보험은 필요한건데 겸사겸사 이것도 받으면 좋지. 라고 합리화하며 가입했겠죠.

정식으로 결혼얘기를 말씀드리려고 갔을 때 아빠가 한 첫마디는 이거였습니다.
(사위될 현재 내 남편에게) "이 결혼에 돈 한푼 지원해주지 못하니 돈 바랄거면 당장 돌아가고 아니면 알아서 결혼해라."

무슨 뜻인지 알지만 굳이 저렇게 말을 했어야 됐나 싶지만
따뜻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학대받고 자라면서 책임만 지고 보살핌받지 못한 아빠는 달리 표현할 줄 몰랐을 겁니다.

당시에는 그걸 알면서도 신랑에게 미안하고 나도 너무 가엾어서 많이 울었지만
아마 아빠 자신도 뱉어놓고 매일매일 후회하고 곰씹고 속상했을 겁니다.

진주가 진짜라고 했다는걸 강조하면서, 결혼할 때 목걸이 하나 해주지 못하고 사위에게 시계하나 해주지 못해
미안했다며 어색하고 뿌듯하게 건네주셨습니다.
아마 본인이 먼저 얘기는 못 꺼냈을거고 제가 선물을 드리면 답으로 주려고 했을텐데
조카들이랑 놀아주느라 정신없는 저를 보면서 언제 주나~ 타이밍 재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참 ㅋㅋㅋ 귀엽기도 하고 ㅋㅋ

결혼하기 2,3년전부터 아빠는 나와 엄마를 너무 힘들게 했고 그건 서른살 남짓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시기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축적되어오던 불안과 우울은 극에 달했고 그게 터져서 신랑에게 못나게 우는 모습도 많이 보였지만
결혼을 기점으로 많이 안정이 되어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다보니

결론은 불쌍한 우리아빠네요.

좋은 남편도 아니고, 좋은 아빠도 아니었지만, 참 열심히 살았는데
과로로 여러번을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가 겨우 살아나올 만큼 과도한 성실함으로 살아왔는데
목숨처럼 아낀 딸은 저 살기 위해 아빠와 거리를 두고 아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습니다.(현재진행형)

물론.. 이전에 부모님과 저는 필요이상으로 가까웠고,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는 비정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저 자신으로서는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보지만

아빠의 인생을 놓고 봤을 때 딸에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그 고단함이 모자람만 잔뜩 커지게 해서 딸도, 아내도,아들도 멀어지게 만들었다는게
너무 가엾고 불쌍하고 짠합니다.

좋은 말만 해주고 싶을텐데, 좋은 것만 사주고 싶을텐데, 웃으면서 얘기하고 싶을텐데.
누군가의 칭찬에도 익숙치 않아 혹시나 비꼰것을 칭찬으로 듣고 좋아하면 바보같다고 비웃을까봐
그럼에도 다정한 한 마디에 목이 말라 "그래그래" 한 마디에 넘어가는 

아빠가 준 그 가짜 진주목걸이가 너무 짠합니다.

저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조카들과 오빠를 보면서, 유난히도 딸바보인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나를 저렇게 사랑스러워했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말은 드럽게도 안이쁘게 하는 그 속마음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가끔 아빠가 속상하게 할 때면, 울면서 혼잣말로 할아버지 욕을 합니다.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이 내 아빠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우리 아빠도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을거라고.
정말 밉다고. 꿈에도 나타나지 말라고. 죽어서 만나게되면 죽빵 맞을 준비 하라고, 가만두지 않을거라고.
그런 당신도 아버지라고 우리 아빠는 당신 무덤 앞에서 이제 당신을 이해하노라며 운다고.

그런 저도 못난 내가 튀어나올 때마다 그 속에서 아빠를 만나게 되면
그런 아빠의 모습을 용서..까진 아니더라도 이해하게 되면서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면서 나를 돌아보고 개선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것이 내가 편하는 길이라고 하는 건가봐요.



그냥.. 별거 아닌 살아가는 얘긴데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쓰면서도 몇 번이나 울컥울컥했네요. 어휴 우리 아빠 짠내...
이렇게 내 안에 괴로운 기억 속에서 아빠를 조금씩 안아가면 
언젠가 아빠의 모습에서 더 자유롭고 평안한 내가 될 수 있겠죠.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내 부모같은 부모가 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부모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연휴 건강히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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