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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 믿는 자의 지옥, (스포일러 주의)
게시물ID : movie_568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romet
추천 : 9
조회수 : 10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5/12 02:09:09

누가복음,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는 그에게 증거를 보여달라 요구하고, 그 증거로 예수는 못에 박혀 구멍 뚫린 손과 발을 보여준다. 사지와 옆구리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까지 집어넣어본 도마는 그제서야 자기 앞에 선 그 남자가 예수임을 믿는. 도마의 일화에서 보듯이 믿음 또한 증거를 통한 추론을 전제한다. 비록 그 증거가 비신자의 눈에 비논리적이고 다소 황당해 보일지 몰라도, 신앙도 나름의 내적 논리를 갖춘 추론의 결과물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까지 종교와 신학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근거다.

 

곡성의 한 농촌, 마을 사람들이 두드러기가 나며 하나 둘씩 실성해 주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은 가해자가 환각 버섯을 잘못 먹은 탓이라 결론을 내리지만, 어수룩한 경사 종구’(곽도원)는 조사 과정에서 이 사건이 음험한 분위기의 일본인(쿠니무라 준)의 소행이라는 증언을 듣는다. 처음엔 그를 둘러싼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코웃음을 치나 계속되는 증언들과 자신에게 벌어진 비현실적인 일련의 사건 때문에 점차 일본인을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일본인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물건과 자신의 딸의 실내화까지 나오자, 그는 일본인이 범인임을 확신한다. 종구가 일본인과 마찰을 빚자마자 딸은 귀신에 들리고, 때마침 등장한 일광 도사의 조언으로 종구는 일본인을 직접 죽이고 만다. 그때 영화는 죽어가는 일본인의 처절한 저항과 눈물과 함께, 이를 멀찍이 지켜보는 동네 광년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외지인을 이렇게 적대해도 괜찮은가 불편했던 관객들은 그가 흘리는 눈물과 그녀가 영화 중반부부터 일본인을 압박하는 모습에 마치 그녀가 진정한 흑막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확답을 주질 않는다.

결국 절정부에 이르러 ‘종구는 위태로운 가족의 목숨 앞에서 일본인과 여인 중 누구를 믿어야 할지에 대해 선택을 강요 받는다. 일광 도사는 그 여인이 범인이라 지목하고, 여인은 일광 도사와 일본인이 한패니 그들을 믿지 말라 한다. ‘종구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방법이 없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여인의 뒤편에 떨어져 있는 딸의 머리띠. 그제서야 종구는 여인이 지금껏 죽은 이들의 물건을 갖고 있었음을 떠올리고, 그 증거를 토대로 일광 도사의 말을 믿기로 결심한다. ‘닭이 3번 울기 전에일광도사를 믿어버린 종구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귀신에 홀린 딸이 가족을 모두 살해하였고 일광 도사는 일본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은 이의 시신을 여유롭게 사진에 담아간다. 3일만인지 몇 일만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멀쩡히 살아있는 일본인은 악귀의 모습을 한 채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러 온 신부를 비웃는다. “증거를 보여주면 의심을 거두겠다? 그럼 어디 나의 손을 보아라그 흉측한 손에는 예수님마냥 못 박힌 구멍이 나있다.

 

<곡성>은 굳이 비약을 보태자면 신앙추리물이라는 기묘한 장르다. 비현실적인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예수 앞에 선 도마마냥 증거를 찾아 무엇을 믿어야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수많은 떡밥들을 던져준다. 그렇게 감독이 던진 증거를 토대로 관객이 종구와 함께 나름의 추론을 내리면, 나홍진 감독이 우리의 뒤통수를 신나게 갈기는 것이다.

종구와 우리가 틀렸던 이유는 결코 증거불충분때문이 아니다. 영화와 일본인이 비웃는 것은 다름아닌 증거를 해석하는 주체인 우리들의 불완전함이다. 우리는 흔히 증거가 있으니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믿음에 따라 증거를 재편한다는 표현이 옳다. 산에 올라갔다가 악귀를 봤다는 건강식품점 주인이 내놓은 증거는 텅 빈냉장고였다. 자신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지금도 산에 안 올라갔겠냐는 그의 말은 악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순환논리다. 종구가 최종결정을 하게 도와준 딸의 머리핀도 그런 의미에서 다를 바가 없다. 여인을 의심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은 갑자기 나타난 머리핀의 존재로 확신을 얻는다. 그 순간 관객과 종구의 머리 속에서 일본인의 집에도 있던 실내화 혹은 일광도사가 입은 훈도시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진다. 정체를 확인해보고 인간이 맞다면 돌아가겠다는 신부의 말에 악귀는 누가복음을 인용하며 너는 의심을 확신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냐고 비웃는다. 이때 관객들은 당혹스러워진다. 한번 증거에 뒤통수를 맞은 우리들은 악귀로 돌변한 일본인의 외양을 보고도 쉬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다. 우리는 스크린으로 일본인의 정체와 사진을 찍는 일광 도사의 모습을 확인했으니 그들이 범인이라 확신해도 되는 것일까. 기이하게도 일광도사와 일본인이 주술의 도구로 쓰는 사진은 보았으므로 존재한다는 서구적 합리성을 대변하는 매체다.

영화가 끝나고부터 믿는 자와 의심하는 자 모두에게 지옥, 나생문이 시작된다. (정말 이 영화와 <나생문>은 닮은 점이 많다.) 과연 연약한 우리들은 예수라 주장하는 자가 구멍 뚫린 손을 보여주었을 때, 곧이 곧대로 이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 보잘 것 없는 육신의 상처가 우리에게 신의 존재에 대해 무엇을 말해준다는 것일까. 우리의 이성은 어떻게 이리도 하찮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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