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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을 진학하고자하는 미래의 후배들에게 쓰는 글
게시물ID : freeboard_13156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가뭐냐
추천 : 0
조회수 : 60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5/19 05: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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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대학원을 진학하고자하는 미래의 후배들에게 쓰는 글
제가 이글을 적은 이유는 제 대학원생활에 대한 자소적인 의미도 있지만 앞으로 대학원 생활을 염두하고 있거나 고민하고 있으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대학원 생활을 솔직히 적어봤습니다.
 

대학원 진학 동기
처음 내가 대학원 진학을 마음먹은 건 201384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대학교 다니면서 나름 학점도 잘 받았고 내세울만한 대외활동은 없지만 동아리 회장도 해보고 과대표도 해보고 후회 없이 대학을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아쉬운 건 내 전공에 대한 숙련도였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대다수 학부수준의 커리큘럼으론 식물하나 제대로 키우기 힘들 것이다.
난 이점이 못내 안타까웠고 고민하다 문득 진짜 내가 어디서 식물 하나는 제대로 키울 수 있게 공부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대학원을 진학하였다.
이후 실험실 선배에게 연락을 취하고 일사천리로 교수님과 상담을 하였다.
4학년 과대표였던 나는 교수님에겐 이미 일면식이 있었고 학과 특성상 몸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아 남학생이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좋은 카드였을 것이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실험실생활이 시작됐고 4학년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진학한 분야는 분자육종으로써 말 그대로 좋은 품종으로 개량하는 게 주목적이며 이를 분자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문 이였다.
진로가 정해진 4학년 2학기 생활은 생각보다 안정적 이였다.
나와 같은 학년들이 앞으로의 진로를 걱정하며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을 때 난 이미 진로가 정해진 셈이었으니 여유로웠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시기가 2년 늦추어 진거뿐이지 언젠간 나도 겪게 될 일이였다.
실험실 왕고가 학교조교 이었던 탓에 원래 활동하던 과대표생활과 실험실 생활을 모두 적당히 조율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금 바쁘긴 했지만 내가 노력한 만큼에 성과를 낼 수 있어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거기다 실험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3살 어린 여자후배와 비공개이긴 했어도 CC까지 되었다(지금은 아니다 T.T).
나의 대학원 생활은 앞날이 창창할 줄 알았던 건 그 당시의 희망상황이기도 했고 착각이었을 것이다.
 
*모든 시작이 그렇듯 최소한 희망이 보여야 앞으로의 일을 도모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희망을 보고 시작했다.
 

대학원 생활에 시작
20141월 시기상으론 겨울방학이긴 하지만 사실상 학부는 졸업한 상황이고 실질적인 대학원 생활이 시작됐다.
대학원에 방학이란 그냥 수업이 없을 뿐 다른 일은 똑같이 진행된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학부시절에 미리 대학원 수업을 연계해서 수강하면 한 학기 빠르게 수료해주는 제도가 있었고 학점이 4.0을 넘기면 한 학기 등록금을 전액지원해주는 장학금이 있었다.
나는 두 가지 모두 해당하는 학생이었지만 그렇다고 돈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자취방 비용도 필요하고 차 후 2개학 기는 등록금을 일부 내야하기에) 알바형식으로 조교 일을 찾아서 신청하였고 결과적으로 조교일도 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는 부모님께 지원받지 않고도 대학원을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했고 앞으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처음에 대학원 생활은 순탄한 듯 보였다.
아직은 초기이기도 하고 일이 그리 힘든 시기도 아니기 때문에 별일 없이 지나가는 듯 했다.
학과특성상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는 3월말인데 이 시기부터 실험용 작물을 비닐하우스에서 제배할 수 있기에 바빠지기 시작한다.
일단 비닐하우스에 작물이 배치되기 시작하면 아침에 가서 물을 주고 통풍이 가능하게 문을 열어주고 양옆에 비닐을 걷어줘야 하며 저녁엔 기온이 떨어지므로 다시 문을 닫고 양옆에 비늘을 차폐해야한다.
사실 모든 생물을 다루는 실험 및 학과가 마찬가지겠지만 생물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주말도 휴일도 없는 법이다.
이때부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짓말처럼 주말이 사라졌다.
당시에 대학원생은 3명이였고 한명은 한 학기 남은 선배 또 한명은 나와함께 대학원 동기로 들어온 한 살 어린 여자 후배였다.
한 학기 남은 선배가 관리할 리가 만무하고 같이 대학원 동기로 들어온 여자 후배는 본인의 재료가 심겨져 있는 게 아니라서 신경 쓰지도 않았다.
결국 이걸 내가 주말에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겐 주말에 늦잠 잘 수 있는 여유도 때론 학교를 벗어나 놀러가는 일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이때까진 좋은 마음으로 한 달 정도 관리를 했던 것 같다.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건 사귄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와 자주 못만나는게 미안했다.
당시 여자 친구는 휴학한 상태였는데 둘이 만나기 위해선 중간지점에서 만나더라도 1시간 정도씩 이동해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여자 친구는 어느 정도 실험실에 상황을 이해고 있어서 내입장에선 다행이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난 아침 일찍 학교로 가서 비닐하우스 문을 연 뒤 데이트를 하러가고 여자 친구를 조금 일찍 들여보낸 뒤 부랴부랴 학교로 가서 비닐하우스 문을 닫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일이 터졌는데 정상적으로 생육하지 못하고 병충해 피해를 입는 재료들이 생기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사실 대학원생이긴 해도 난 처음 관리하는 사람 이였기에 아무리 신경 쓴다 한들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였고 당연히 책임에 화살을 나에게 쏟아졌다.
내가 잘못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 무관심은 크게 질책 받지 않았다는 점이 더 억울했다.
이때부턴 관리하는 일자체가 나에겐 스트레스 받는 일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호의를 베풀어 즐거운 마음으로 했던 일이 나에게 돌아오는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상황자체가 더 짜증났다.
이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반복된다는 걸...
 

*내가 이 때 느낀 건 호의를 베풀어서 일 많이 하면 결국에 총대맬일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냥 남들만큼만 하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본인이 한만큼만 생각하지 타인이 한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잔인한 5
5월하면 가정의달이기도 하며 본격적으로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에게 5월은 언제나 좋은 이미지였다.
본인의 생일이 5월 초에 있기도 하고 따듯한 봄기운과 더불어 대학교에선 축제도 있고 재밌었던 시기였지만 대학원에서 맞이한 5월은 너무나도 잔인하였다.
알바식으로한 조교일이 본격적으로 바빠진 시기였기도 했으며 실험실에서도 본격적인 파종에 앞서 할 일도 많았고 나에게 맡겨진 실험들도 본격적으로 해야 했던 시기라 일이 겹쳤다.
여담이지만 대학원생에겐 출근은 있어도 퇴근은 없고 하교만 있다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아침에 나오는 건 칼 같지만 퇴근에 개념이 모호한 게 현실일 것이다.
나또한 9시에 출근해서 저녁에 집에가는건 정해지지 않았었지만 저녁시간에 마냥 노는 것도 아니라 공부도하고 일이 미흡했던 건 보충해서 처리하고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늦게 귀가하는걸 감안했지만 이시기에는 자의든 타의든 강제적으로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12시에 하교하여 귀가하는 생활을 하였다.
심지어 주말에도 똑같이 9시에 나와 12시에 집에갈 정도로 정말로 할 일이 많았다.
당시에 내가했던 조교일은 진로교과목 상담조교였는데 이일은 학생들이 학과 수업이 비는 공강시간에 이루어져야만 했기 때문에 9시부터 17까지 정해진 시간에 해결해야했다.
물론 이시간은 실험실에서도 많은 일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이 때문에 실험실구성원들은 물론 지도교수까지도 불만이 많았다. 당연하지만 한참일 해야 되는 시간에 한명이 빠져있는 것이니 불만이 쌓였을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처음에 시작할 때 양해를 구하고 모두 동의하에 한일이지만 항상 들려오는 말은 같았는데 이렇게 까지 해야 될 줄은 몰랐지라고 얘기하였다.
그러다 보니 실험실에서 공동으로 해야 되는 일은 언제나 내 조교일이 끝나고 내가 실험실로 돌아오면 시작되었고 다른 대학원생들이 맡은 본인의 임무는 내가 조교 일을 가는 동안 하였기 때문에 내 임무는 언제나 진도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내 임무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외선에 피해를 받은 식물을 조사하는 일과 또 하나는 통계분석 이였다.
자외선에 피해를 받은 식물 조사는 순수하게 관찰하며 측정하는 몸을 쓰는 일이였고 통계분석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계속 값을 입력하고 프로그램에 명령어를 집어넣어 결과를 도출하는 일이였는데 두일 모두 나에겐 처음 경험하는 일이였기에 효율적이지도 못하고 오래 걸리기도 했다.
그 진도를 따라잡으려면 남들보다 늦게 집에 가야했고 주말에 나와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말에 내 실험을 진행하려다보니 실험실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됬지만 학교생활을 하면서 친해진 여러 후배들을 자체적으로 불러 실험하는걸 도움 받고 나는 감사에 대가로 밥과 술을 사주면서 일을 해결하곤 했다.
이 때 내가 잘못 판단한건 너무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실험실에서 공동으로 해야 되는 일은 내가 부재중일 땐 내가 없다고 하지도 않았으며 내가있어야 시작했으므로 할 도리는 했고 내임무는 손 벌리지 않고 내자체적으로 해결했으니 당당했어도 되는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생각해보면 나는 자만하게도 항상 미안해했다.
사람이 계속 미안해하면 도리어 진짜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된다는 걸 몰랐었다.
실험실원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내 탓이 되어버렸다.
정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엄청 스트레스 받는 시기였지만 나에겐 목표가 있었고 꿈이 있었기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다만 술과 담배에 의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평소보다 흡연 량이 늘었고 매일 맥주를 1L씩 마시지 않으면 피곤한데도 잘 수없었다.
그리고 상황 때문에 못보는거긴 하지만 여자 친구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고 본가에 못간지도 오래되어서 부모님도 그리웠다.
 

*바쁜 일보다 진짜 무서운 건 사람들의 뒷 담화다. 충격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딜 가나 비슷하더라.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여름과 농번기
5월말에서 6월초가 되면 대다수의 작물들이 파종을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몸을 활용해야되는 시기가 오는데 5월 한 달을 쉬는 날 없이 15시간씩 일하고 술담배에 의지한 내 몸은 언젠가 부턴가 피곤에 절어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어깨와 허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종에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일이 너무 바빠 어머니 생신에도 찾아가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 파종이 끝내고나니 여유가 찾아왔다.
사람이 너무 바빴다가 풀어지니 갑자기 한없이 풀어지기 시작하면서 너무 바빠서 생각할 겨를도 없는 5월과는 달리 별별 생각이 다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대학원생들이 대부분 느끼는 거겠지만 생각한 것보다 대학원생활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상당히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면서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여기를 떠나야해라는 생각이 들며 자퇴도 고민하였다.
이 때 자퇴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한데 온라인 게임 던전앤파이터를 다시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게임이 몰두하여 귀가 후 미친 듯이 게임을 즐겼고 업무시간엔 몰래 게임정보를 찾아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농번기는 여유가 생겼을 뿐이지 일이 쉽지는 않았다.
더운 날씨 탓에 평소보다 더 일찍 실험포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고 중간에 낮잠을 자곤 했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좋았다.
조금이라도 힘들면 집에 가서 던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대학원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때론 생각지도 못한 것에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대학원생활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다 한들 최소한으로 취미생활을 즐기는 게 좋다.
 

대학원 동기 여후배 A
석사생활도 2학기 차에 접어들어 해오던 일도 많이 진행되었고 숙달되었다.
휴학했던 여자 친구도 복학하면서 많은 위로가 되어 나름 할 만해진 시기였다.
위에 한명 있던 선배가 수료하면서 실질적으로 남은 대학원생은 나를 포함한 두 명 이였는데 여기서 또 갈등이 생겼다.
나이나 학번은 내가 선배지만 실험실에 먼저 들어온 기수는 대학원동기인 여후배 A였다.
1학기 때는 아무래도 1년이나 나보다 먼저 활동한 A가 많은걸 알고 있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나를 무시하기도 하였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지도교수는 나에겐 니가 랩짱(실험실 왕고, 책임자)이라고 하였고 A에겐 니가 먼저 들어왔으니 니가 랩짱이다라고 각각 말하였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원체 타인에게 맞춰주는 편이라 내버려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A가 실질적인 랩짱이 되었다.
문제는 하고싶은데로 하는 건 A지만 총대는 내가 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마 교수입장에서야 내가 남자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니까 그랬던 거 같은데 이 상황이 웃긴 건 뭐냐면 어차피 하고싶은데로 하는 건 A기 때문에 내가 혼나봐야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점은 하도 불합리해서 교수에게 대놓고 얘기까지 했으나 되려 A하나 컨트롤 못한다고 욕먹긴 했지만 교수가 문제를 인식하고 바뀌긴 했다.
아예 A가 정식적인 랩짱이 되고 교수는 A에게 다이렉트로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고 모든 일이 A위주로 진행됐다.
교수입장에서야 일 잘 진행되는 거 같고 실험실도 점점 성장하는 거 같아서 좋아보였겠지만 A에 진행방식은 그리 올바른 방향은 아니었고 처음엔 나만 그렇게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엔 실험실 구성원 모두가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에 실험실이 엄청 성장하긴 했는데 겉으론 성장해보였지만 실속 없이 뻥튀기 된 부분이 없지 않아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암세포 같은 존재였는데 원래 암세포가 정상세포보다 잘 자란다.
실험실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생긴 문제는 나중에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하는데 차후에 서술될 것이다.
여담이지만 군대에서 제일 극혐했던 선임유형이 나없으면 너희 어떡할래?’, ‘다 너희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라고 하던 사람들이였는데 A가 전형적인 꼰대 선임스타일이었다.
 정말 저 두 멘트를 토시하나 안틀리고 표정변화없이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A가 랩짱이니 나는 물론 학부생들도 피곤해 질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나하나 없어도 다 잘돌아가더라. 이는 사회에 어디서도 적용되더라. 그러니 자만하지 말자
 

아픈 가을
어렸을 때에는 환절기마다 감기를 달고 살았고 비염도 있어서 고생했지만 군에서 전역한 후 강원도 인제에서 군 생활을 해서인지 2년 넘게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러다 가을에 빠르게 익기 시작하는 조숙종을 수확하면서 감기에 걸렸다.
병원을 찾아 갔더니 코에 물혹이 있다고 하고 비염도 많이 악화되었다고 진단을 받았다.
일단 휴식을 취해가면서 치료하자는 진단을 받았는데 이 때 일이 한건 터졌다.
바로 내가 맡아서 진행하던 실험 하나가 엎어진 것이다.
최종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지만 억울한 점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당시 내지시를 무시하고 측정한 사람들이 각자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측정하는 바람에 데이터가 꼬이면서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 내가 비번인 날에 부탁까지 하고 갔지만 그마저도 A가 기준을 무시하고 멋대로 측정을 해버린 것 등 여러 가지 일이 겹쳐버렸다.
덕분에 정말 제대로 지도교수한테 멘탈까지 털리고 말았다.
덕분에 수습하느라 무리하게 일을해버렸고 감기가 심해져버려 코로는 숨도 못 쉬게 되었다.
병원에 찾아갔더니 물혹이 너무 악화되어 감기를 치료해도 한쪽코로는 호흡하기가 힘들 터이니 수술하자고 권유했고 마침 한참 스트레스 받던 차에 나는 수술을 받고 덕분에 쉴 수 있었다.
수술을 받고 쉬는 건 당연하지만 수술이라도 받아야 쉴 수 있는 상황이여서 굳이 안 받아도 되는 수술을 받은 점도 있다.
참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아파서 쉬는걸 눈치 봐야 되는 점이 안타까운 거 같다.
수확 철이 한창 바쁘기도 했고 한사람이라도 아쉬운 건 알지만 굳이 코피를 흘려가며 내가 일해야 했을 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충분히 쉬지 못한 채로 실험실로 복귀하였다.
이 후 시간이 꽤 지나 본격적인 졸업논문 작성에 시기가 왔고 나는 선배들에 데이터를 만들어 줘야해서 많이 바빴었는데 선배랑 담배를 피다가 피가래를 토해냈다.
아마 코수술하면서 생긴 딱지 같았는데 비주얼이 꽤나 참혹했고 덕분에 담배는 끊었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해소방법을 술담배로하지 말자. 결국엔 아파진다 진짜.
 

석사 2년차에 시작
1년에 석사생활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되었다.
운이 작용한 것도 있었겠지만 지난1년간 내가한 실험은 성과를 보여 꽤나 많은 발전이 있었고 더욱 좋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진행하였다.
대학원을 다닌지 1년이 되어서야 보람을 느끼고 있었고 내손으로 뽑아낸 실험결과를 보면서 이래서 실험하는구나하며 하루하루 즐겁게 실험을 하고 결과를 내고 있었다.
이 시기에 A2주간 유럽여행을 갔다.
다들 딱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실험실 분위기도 좋고 다들 즐겁게 지냈다.
이 시기에 육종연한 단축을 위해서 다른 기관에 유리온실을 빌려서 식물을 위탁했는데 그 기관에서 요구한 조건은 그 식물에 대한 관리역활겸 기관에서 일할 학생 충원이었다.
이 역활에 적임자는 여자 친구였고 어째 저째 그 기관에 소속이 되었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
그 기관에선 넌 이제 우리소속이니까 앞으로 식물관리보다는 우리기관에 실험실일을 해야한다가 되었고 여자 친구는 그래도 열심히 관리해줬지만 힘에 부쳐 실험실에 도움을 요구했다.
관리하려고 온실에 가면 눈치를 주고 뭐라 하니 당해낼 제간이 있을 리가 없다.
A가 유럽에 가있는 동안은 문제가 안됐는데 A가 복귀해선 이 부분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지도교수도 A를 설득했지만 A의 심사는 뒤틀려있었다.
이 일로 실험실에서 A는 대놓고 욕을 했고 나는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뭐라 하면서 다툼이 시작됐다.
평소 쌓였던 일도 있고 해서 다툼은 꽤나 커졌고 한 달정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선 누구나 A가 잘못됐음을 알고 있음에도 실험실 구성원들은 A가 원래 그런 사람이니 내가 먼저 사과하고 풀으라고 얘기했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언제나 양보하는 쪽이 손해 보는 게 대학원생활이더라. 지금까지 내가 참아왔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반발했는데도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나에게 양보를 권유하는걸 보면서 느꼈다.
 

아픈 봄
겨울동안했던 실험도 드디어 실마리가 보이면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 무리해가면서 실험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
병원에 가서 일단 약을 처방받고 의사가 폐렴이 의심된다 하여 x-ray를 촬영했다.
촬영결과 폐렴은 아니었는데 희미하게 500원짜리 크기에 하얀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의사는 폐에 집중하다 보니 간과하고 있었지만 내가 질문하자 의사 또한 당황하며 큰 병원을 가보라고 하였다.
원래 이공계 대학원을 다니다 보면 연구실건강검진이라하여 1년에 한 번씩 종합검진을 하는데 그 때 촬영한 x-ray사진을 대조해보려 학교의대를 찾아갔다.
대조결과 당시에 x-ray에서도 크기는 약간 작고 희미하긴 하지만 하얀 무언가가 관찰되었다.
본격적으로 CT촬영을 통한 정밀검진을 해보니 폐에는 이상이 없으나 견갑골 쪽에 종양이 있다고 하였다.
이 때 정말 멘붕에 빠져서 모든 게 허탈해졌다.
의사는 아마도 양성종양인듯 하지만 빠르게 조취를 취하자고 권유하였다.
당시에 의대병원앞에 있는 벤치에 멍하게 앉아서 1시간동안 멍때렸던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도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수술날짜를 잡아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결과는 성공적이고 조직검사 결과도 양성종양으로 나왔지만 왼팔을 거의 사용할 수 없어서 쉬게 되었다.
3주정도 본가에 가서 지냈고 이후로도 2주 정도 더 보호대를 착용한 체 실험실을 출근하였지만 아직은 몸이 불편하기에 6시에 집에 갈 수 있었다.
6시에 귀가하니까 세상이 달라보였다.
집에서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았고 한쪽팔로 살살 인터넷만 해도 행복했고 몸이 피곤하지도 않았다.
보호대를 슬슬 빼고 왼팔을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때 쯤 지도교수가 나에게 지시한 통계분석에 결과가 늦게 나온다며 핀잔을 주었고 나는 솔직히 억울하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해서 처음으로 교수한테 대들었다.
교수에게 교수님 제가 정말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고 딱히 딴 짓을 한것도 아니고 지시하신바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몸이 불편해 이게 한계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자퇴서를 작성하였다.
쉬면서 무언가 미련도 사라지고 아파보니까 건강이 최고인거 같고 정말 무리해면서 해왔던 석사생활 1년 동안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던 시기였기에 미련 없이 대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론 지도교수와 잘해결되서 석사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니다 싶으면 지도교수라고 할지라고 할 말은 해야 한다.
 

다시 찾아온 농번기 그리고 막학기
농번기가 다시 찾아올 때 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비가 올 듯한 날씨면 수술한 어깨가 조금 쑤시긴 하였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팠던 영향도 있지만 내 스스로도 아예 풀어져 버려 조여지지 않았다.
만사에 의욕이 없고 무엇을 해내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으며 무기력해져갔다.
한번 대들었던 탓에 교수도 나에게 딱히 간섭을 하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유일하게 열심히 했던 건 던파였다.
사실 이시기에 던파가 이벤트도 많이 했고 한참 재미를 느껴 열심히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가 막학기가 되었다.
막학기가 돼서 돌아보니 올해 딱히 실험이 진행된 것도 없고 결과도 없었다.
1년차때 했던 실험에 결과가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졸업논문을 쓸 수 있었지만 갑자기 아쉬워졌다.
조금만 노력했다면 더 좋은 논문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였다.
논문은 학교마다 조금씩은 양식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공계에 경우 서론, 연구사, 재료 및 방법, 결과, 결론에 양식에 맞춰서 작성한다.
대다수 공감하겠지만 의외로 연구사에서 많은 시간이 걸리고 제일 고민도 많이 하는 것 같다.
읽어봤던 논문도 연구사를 쓰기위해서 다시 읽어보고 연구사를 쓰기위해 다른 논문에 연구사를 읽어보게 되는 등 쉽지 않다.
 

*논문을 리뷰 하다가 이건 도움이 된다 싶으면 정리해두자. 연구사 쓸 때 도움이 된다.
 

졸업 그 후 현재까지
졸업논문을 완성한 뒤 본가로 와서 졸업 전까지 알바를 하였고 졸업하면 구직을 할 생각으로 알바를 그만 두었으나 아직 구직중인 상태이다.
지금까지 몇몇 회사에 면접을 보고 온 경험으론 학력무관 모집에선 석사졸업생이라 기피하고 석사이상을 구하는 곳에선 조금 더 본인에 회사에 적합한 전공을 수행한사람을 선호하더라.
그리고 거의 관련된 전공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더 그 회사에 적합한 인재는 항상 있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근근이 일용직이라도 하면서 버티고 있긴 하지만 취직이 쉽지는 않다.
근데 이건 석사졸업생만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문제이긴하다. 다만 석사 졸업했다고 취직이 쉬운 건 아니니 정말로 하고싶은게 있거나 대학원에 뜻이 있다면 진학하기를 추천한다.
 

글을 마치며
 

요즘 진짜 석사, 박사들 많아요.
근데 막상 석박사 하는게 쉬운건 아니더라구요.
그렇게 막 경쟁력이 있는것도 아니지만 전 나름대로 제가 해보고 싶었던 일 해보고 경험해봐서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니 대학원 진학하시기전에 충분히 고민해보시고 신중히 생각해주세요.
결국 진학하기고 마음먹으셨다면 정말 정말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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