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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푸레이크의 군대 이야기 - 01
게시물ID : military_629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콘푸레이크
추천 : 5
조회수 : 9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5/24 0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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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나는 대로 두들긴다는 맺음말로 썼었던 글이 벌써 1년 반이나 지났네요. 정말 귀차니즘이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다시 생각이 난 김에 이것저것 두드려 봅니다.

군대. 좋은 일보단 나빴던 일이, 즐거운 일보단 가슴 철렁했던 일들이 많았던 내 청춘의 한 페이지.
그러나 싫든 좋든 그것은 오롯이 내 것이었기에 흘러내리지 않도록 가슴에 품었던 감정들.
그때를 회상하며 지금의 나를 되돌아 봅니다.



글 형식은 작성자가 군대에서 겪었던 사실을 가감 없이 짤막한 문장으로 구성해서 가볍게 볼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길어지는 내용도 있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면 일기, 기록물처럼 될 수도 있겠네요. 또 쓰고 싶은 대로 쓰다보니 순서도 제멋대로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얼마나 자주 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시작합니다.






1. 작성자는 2008년 1월 15일, 지금은 해체되어 사라진 306 보충대로 입대했다. 훈련소 배정을 받기 전, 3박 4일간 그곳에 그곳에 머물렀는데 퇴소하면서 있었던 일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3박 4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훈련소로 가는 관광버스를 타기 전 남은 시간에 우리 구대장이 마지막이기도 하고 시간도 때울 겸 우리들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여자친구가 있냐는 질문부터 앞으로 갈 훈련소에 관한 질문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때 우리 동기 중 한 명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구대장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순간 모두의 눈빛이 빛났던 것 같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우리 구대장은 병사들 군기를 잡는다고 우리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우리 대다수는 구대장의 나이를 매우 궁금해 했었다. 특히 그중에는 자기보다 어리면 죽여버릴 거라는 녀석도 있었다. 구대장은 그 질문에 호쾌하게 웃으며 아주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까지 한 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마지막에 해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출발할 때쯤 되서야 구대장은 다른 질문은 그만 받고 아까 받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겠다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86년생인 사람 손들어 봐."
제법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구대장은 한 번 피식 웃더니 이번엔 이렇게 말했다.
"그럼 87년생인 사람 손들어 봐."
거의 대다수의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구대장은 양손을 들어 율동하듯이 손을 반짝거렸다. 뜬금 없는 행동에 저게 뭔 짓거리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구대장이 입을 열었다.
"친구들, 안녕안녕?"
잠깐의 정적. 그리고 경악.
순간 연병장이 터져 나가는 줄 알았다. 이런 저런 육두문자가 병사들의 입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특히 86년생의 분노는 굉장했다. 구대장의 행동도 압권이었지만 그 목소리도 압권이었다. 평소 구대장들은 병사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철모로 눈이 보이지 않도록 눌러쓰고 가슴에서 나오는 발성법인 흉성으로만 말했었는데 마지막에는 흉성으로 말하지 않고 본래의 목소리로 말한 것이다. 특히 그 밝고 깨는듯한, 깐죽거리는 목소리는 병사들에게서 충분히 분노를 유발할 만했다. 잘 모르겠다면 한 번 상상해보자. 임재범의 목소리가 광희의 목소리가 되는 것을.
그렇게 한동안 연병장은 매우 시끄러웠고 나는 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저들보다 나이가 어려서 저들이 느끼는 분노엔 해당하지 않았으므로.
병사들이 분노했다고 적었지만 유혈사태로 가는 일은 없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우리가 느낀 것은 유쾌한 분노였다. 대다수가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건 대다수의 남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건 감탄사, 혹은 한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구대장이 86년생 형들에게는 미안했다고 말하자 그 뒤로는 모두가 유쾌하게 웃으며 구대장과 작별 인사를 했다.
훈련소로 가는 차를 타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구대장은 이런식으로 병사들을 놀린 게 한 두 번이 아닌 것 같다고. 그의 모습은 그만큼 매우 익숙해 보였다.
백씨로 기억되는 그 구대장은 그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역 이후에도 어디에 있든 그때처럼 유쾌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2. 작성자는 경기도 연천, 25사단 최전방에서 복무했는데 별 거 아니지만 나름 재밌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GOP는 3개의 대대가 1년간 돌아가면서 맡는데 작성자는 2년간 3개의 지역을 모두 돌아가며 근무를 섰다. 두포리, GOP전동리, 늘노리. 우리는 그것을 최전방 그랜드 슬램이라고 불렀다. GP가 포함이 되지 않은 거라 좀 약하긴 했지만.




3. 작성자는 GOP에서도 민통선(민간인통제구역)에서 초병으로 근무했었다. 아버지 군번(입대날짜로 1년 차이가 날 때 선임을 아버지 군번, 후임을 아들 군번이라고 합니다.)중 한 명이 뒷통수를 쳐서 내 보직이 취사병으로 바뀌기 전까지. 원래 GOP로 올라오기 전에 취사병을 했던 내 아버지 군번 선임은 정식 부사수 취사병을 뽑는 게 아니라, 7개월 정도 남은 복무 기간 중에 자신의 휴가 기간을 땜빵할 임시 취사병을 뽑는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첫날 임시 취사병으로 차출되어 근무를 서고 두 번째 날부터 정식 취사병이 되었다. 그리고 취사병이었던 그 선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 대신 민통선 초병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나는 요리의 '요'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 매우 빡치는 사실은 그 선임은 내게 요리는커녕 취사병과 관련된 것은 단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생각인데, 그 땐 왜 그랬었냐고 묻고 싶다. 그 선임과 간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결국 취사병 일은 다른 중대 취사병과 같이 일하며 배우긴 했지만 초짜 중에 생초짜였던 내가 요리를 단 기간 내에 잘 할리가 없었고 덕분에 취사병 초기에 쌍욕이란 욕은 다 듣게 되었다. 어차피 당시 막내라 무슨 짓을 해도 욕을 먹었겠지만... 하지만 선임에게 배웠으면 그것보단 나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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