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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메이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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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페레트리
추천 : 0
조회수 : 3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5/31 2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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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그녀는 고아다. 대부분의 고아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자신이 왜 고아로 자라왔는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고아원과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자신의 작은 침대에서 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은 촛불 하나를 켜고 읽는 책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다. 그녀가 인형과 혼잣말을 하며 놀거나 또래 아이들과의 소꿉놀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이내 책에 얼굴을 파묻곤 했다.

고아원은 일반적인 가정집보다는 시설이나 분위기가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고아들에게는 그만한 '집'이 없었다. 고아원이 어느정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귀족이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아원이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고아들은 그 귀족을 참 좋아하고 따랐다. 마치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다만 고아들은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 잘 몰랐다. 아버지? 귀족님? 천사? 뭐, 그런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고아원의 선생도 그 귀족을 참 좋아했다. 엘리자베스와 고아들은 선생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를 표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하루는 엘리자베스가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 집에 가끔 오는 아저씨한테 왜 그렇게 고맙다고 인사해요? 선생은 마른 천으로 닦고 있던 그릇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마우신 분이니까. 그분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거야. 엘리자베스는 의자 위로 기어올라가 앉았다. 고마운 건 맞지만, 그래도 너무…. 선생이 눈을 흘겼다. 쉿! 그런 소리 하지 마렴. 우리와 그분은 일종의 주종관계야. 주인에게 충성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건 당연한거란다. 그래요? 그래도 같은 인간인데…. 쓸데 없는 말 하지 말고 얼른 올라가 자려무나. 엘리자베스는 그 날 책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곤 중얼거렸다. 주종관계라고?

엘리자베스는 고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됐을 때 또래인 안나를 만났다. 물론 안나 또한 고아였고,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 그녀는 엘리자베스와 달리 매우 과묵했다. 가끔 눈에 초점이 없어진 채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끝없이 조잘거리며 안나를 '귀찮게' 했다. 그런 안나가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하는 것을 본 선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나! 세상에, 얘가 말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는데! 엘리자베스, 안나와 친하게 지내려무나. 안나가 말을 하는 걸 조금 더 보고 싶구나. 엘리자베스는 씨익 웃었다. 알겠어요!

1년에 몇 번씩 그 귀족은 고아원에 들러 여자 아이 한 명을 자신의 성에 데리고 가곤 했다. 그 광경을 본 엘리자베스가 선생에게 묻기도 전에, 그녀가 고아원에 오기 전부터 늘 그렇게 해왔다고 선수를 쳤다. 귀족의 큰 성을 관리하려면 메이드가 수도 없이 필요했고, 그 인원은 고아원에서 충당하고 있었다. 선생은 성에 들어가면 예법부터 가사노동까지 메이드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성 안에 살면서 평생 주인을 모시며 산다고 덧붙였다. 그럼 저도 선생님처럼 그 아저씨를 모시게 되는 건가요? 그런 셈이란다.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여전히 그녀의 취미는 독서였고, 여전히 안나는 과묵했으며, 여전히 귀족은 여자 아이들을 데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와 안나를 불렀다. 귀족이 다녀간 직후였다. 얘들아, 이번에는 너희 둘이 성으로 가게 되었단다. 성에 가면 메이드로 일하게 돼. 먹고 사는데 문제는 없을 거야. 오늘 밤에 짐 싸는걸 도와주마. 내일 아침 일찍 마차가 데리러 올거란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자연스레 그렇게 받아들였다.

성에 함께 가게 된 두 사람은 나이가 지긋이 든 메이드장에게 각종 가사를 배웠다. 요리와 설거지, 청소와 세탁 외에도 귀족에게 갖추어야 할 예법과 마음가짐 그리고 말투까지 하나하나…. 메이드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복종이었다. 그 어떤 부당한 처사에도 복종할 것. 고아원에서의 습관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단 하나, 그녀의 작은 침대에서 책을 읽는 것은 허용되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몰래 허용되었다. 그녀는 매일 밤, 촛불 하나를 몰래 켜놓고 책을 탐닉했다. 안나는 늘 그랬듯 묵묵히 일을 배워 나갔고, 또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듯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의 머리속에는 계속해서 한가지 물음이 멤돌았다. 주종관계? 같은 인간인데 왜 그런 관계가 만들어진걸까? 접시를 깨트리고, 빨래를 다시 하면서도 질문은 머리속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이런 일이 아니야. 나는 책을 쓰고 싶어. 억압이 아니라 자유여야만 해. 안나, 너는 어떻게 생각해?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던 안나는 대답이 없었다. 넌 이 일이 괜찮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안나의 고개가 두어번 끄덕여졌다. 작은 한숨이 그녀들의 방을 채웠다.

시간이 또다시 화살처럼 흘러갔다. 메이드장의 잔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귀족은 바쁜 일 때문인지 이따금씩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독서와 안나의 과묵함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의문은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흘러, 엘리자베스와 안나는 비슷한 시기에 초경을 했다. 그 사실을 안 메이드장은 비로소 진짜 '여자' 가 되었다며 축하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메이드장의 미소 뒤에서 이질감과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축하를 받았는데도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아. 오히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나 안나는 웃고 있었다.

얼마 후, 메이드장은 안나를 불렀다. 그리고 하루종일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메이드장의 미소를 본 이후 느끼는 불안함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책에도 나오지 않았다. 원래도 그랬지만, 안나가 걱정된 그녀는 하루종일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자신의 손이 허공을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다른 곳으로 떠나는걸까?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있으면 의지가 되곤 했는데. 안나는 밤이 되고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안나를 꼭 끌어안았다.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어. 안나는 떨고 있었다. 그녀는 씻으러 간 후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밤새 앓았다.

원래 말이 없는 안나였지만,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날 밤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녀 입장에서는 안나가 겪은 일이 어떤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메이드장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더욱 자주 실수했다. 잔소리에는 이제 면역이 된 상태였지만, 그녀가 잔소리보다 더 두려워한 것은 자신의 차례였다. 책의 내용은 여전히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엘리자베스는 습관적으로 읽고, 그것으로 잠들었다.

아침 일찍 메이드장은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그녀는 초경 만으로는 '진짜 여자'가 된 것이 아니라며 미소지었다. 메이드장의 미소는 친절해 보이지만, 음흉했다. 메이드장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아닌 성의 주인, 그녀들의 주인, 귀족의 방이었다. 예법에 맞춰 가볍게 노크 두 번, 들어오라는 말을 했을 때 양손으로 문을 천천히 열고…. 거대한 침대, 그리고 많은 수의 촛불과 바닥에 놓인 커다란 카페트…. 흔들의자에는 그가 깍지를 끼고 앉아 지긋이 그녀와 메이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했어, 그만 물러가봐. 예, 분부대로. 메이드장이 나가고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고아원에서도, 성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친절한 아저씨와의 일대일 대면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코 앞까지 온 그가 우뚝 선 채로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피하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벗어.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새의 지저귐이나 동료 메이드들의 꺄르륵 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고통도 무뎌져갔다. 그녀는 자신의 베개 아래에 숨겨둔 책을 생각했다. 안나를 생각했다. 고아원과 선생을 생각했다. 주종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끝날 줄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속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주종관계… 인가…? 그녀는 지금만큼은 자신을 인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한참 후에나 만족한 후 그녀에게 그만 방으로 돌아가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제야 빠져나갔던 영혼이 다시 돌아온 듯 움직여, 그녀는 터벅터벅 방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안나는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울지 않았다. 단지 안나를 꼭 끌어안고 떨 뿐이었다. 그녀들의 방에는 안나가 켜둔 촛불은 거의 남지 않은 상태로 약하게 타오르다가, 이내 바람에 꺼져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안나를 끌어안은 채로 차갑게 말했다. 여길 떠나야 돼. 오늘 밤, 당장.

얼마 후, 성에는 커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너나 할것 없이 진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불은 이상하리만치 잘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메이드복을 입은 두 소녀는 수많은 인파 사이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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