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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해영][10화 리뷰] 호접몽
게시물ID : drama_454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밀덕덕
추천 : 20
조회수 : 1734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6/02 15: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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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제물론에서 장자는 '내가 꿈을 꿨는데 나비가 되는 꿈이었어. 근데 그게 너무 리얼해서 깨고 난 다음에도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인간인 나를 꿈꾸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음'하고 말한다.
 
그 유명한 호접몽 혹은 장자지몽이라고 부르는 일화다. 필자가 그런 꿈을 꿨으면 거참 신기한 경험했네 개꿈이 참 버라이어티했단 말이지하고 말았겠지만 역사서에 남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은 그걸 보다 깊이 파고 들었나 보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나와 물(物)의 구분이 있고 없고, 너와 나가 다르다 구분하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 아닐까.]
 
 
현대에서 누가 이런 말을 하면 망상성 성격장애라며 심리학자가 진지하게 통원치료를 권고했겠지만 그 때 당시에는 이게 꽤 잘 먹혔나 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쩌는 개념이라며 우르르 몰려들어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하니 윤리 수업에서 서양사상과 차별화되는 동양사상이라며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물아일체'가 바로 요거다.
 
이게 결국엔 만물의 구분이 무의미하고 생,사, 꿈과 현실의 구분이 없다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생사여일 뭐 이런 거. 
 
이 드라마 속 박도경의 경우가 코마냐, 과거냐, 미래냐 아니면 혼자만의 상상이냐로 갑론을박이 있는데 장자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흐믓하게 웃으며 '뭐하러 구분하나 어차피 다 같은 것인데'하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지 않았을까.
 
하여튼 머...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 감안해두고 리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사실 피곤하기도 하고 주제 의식이 슬슬 드러나기도 하고 중언부언 누군가 했던 이야기 굳이 또 끄집어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리뷰를 작성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워낙 좋은 리뷰를 쓰는 사람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들의 견해와 내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따져보니 굳이 누가 알아보아주거나 대상을 특정할 필요없이 그저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리뷰를 써보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이해에 적절한 가감을 붙여 읽어주시길 바란다.

참고로 이 글은 예전에 써놨던 글들을 짜집기하고 다소 내용을 추가한 것이라 극중 진행 상황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하의 글에서 전혜빈의 오해영은 전해영, 서현진의 오해영은 서해영으로 표기하겠으니 유의하시길.
 
 

1. 사라지는 걸 인정하면 엄한데 힘주고 살지 않아.
 
 
왜 소리를 좋아하냐고 묻던 어린 박도경에게 아버지는 사라지는 것을 인정하면 엄한데 힘주고 살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이었을까.

음향기사는 소리를 녹음하거나 소리를 되살리는 직업이다. 박도경의 아버지는 소리가 사라져서 좋다고 했지만 그의 직업을 생각하면 그는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잊혀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 바람과 파도처럼 한 때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다시 밀려온다 하더라도 결코 이전의 바람과 파도는 아닌 것. 아마 도경의 아버지는 결국 사라지겠지만 그래서 더 놓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한 것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할 듯.
 
 
박도경이 자신이 떠난 방에 녹음기를 켜두고 다니는 것도 자신이 미처 알지도 못할 때 있었다가 사라지는 소리마저 잡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도경은 그가 원래라면 결코 들을 수 있을리가 없던 서해영의 혼잣말과 진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참 좋았어. 시간을 뒤로 돌리는 것 같고."(전해영)
 

이미 서해영이 사라져버린 그녀의 방에서 그녀가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서해영을 기다리던 박도경은 녹음기를 틀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사라졌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박도경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 날 전해영을 만나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었음을 선언한 그가 향한 곳이 서해영의 집이었음을 보자면 그는 녹음을 들으며 그녀의 진심과 자신의 진심을 확인했을 것이다.

사라졌다가 돌아온 전해영과 사라졌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서해영. 지금 이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했기에 박도경은 전해영에 대한 마지막 앙금까지 잘라내고 서해영을 만나러 간 것이다.
 
자신이 서해영을 좋아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지금 충실해야할 사람이 누구인지 자각했기에 그래서 그가 전해영에게 악수를 요구하며 하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먼저 다시 와줘서 고마워."
 
 
너는 죽었어야 했어라며 차라리 전해영이 세상에게 완전히 사라졌길 바랬었던 박도경이 거꾸로 살아돌아와줘서 고맙다며 전해영과의 완전한 결별을 이야기하며 하는 말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시간이 흘러 그저 묻히고 사라졌다가 문득문득 떠올라 화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다시 찾아올 용기를 내준 덕에 남아 있던 앙금과 미움마저 털어버리고 그들이 완전히 갈라설,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먼저 감사를 표하는 그 아이러니에서 전해영은 숨길 수 없는 당황을 드러냈다.
 

어쩌면 이 말은 결국 박도경이 겉으로는 아닌 척 했어도 전해영과의 과거에 매어 결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넘어 이제야 그녀로부터 벗어났음을 고백하는 말이었을지도.

쪽팔린 것, 치욕스러운 것, 맞을 것까지 각오하고 오로지 사랑하기 때문에 박도경에게 돌아올 용기를 끌어올린 전해영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결국 박도경은 지금 현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택했다.
 
전해영에게는 박도경의 고맙다는 말이 미워한다는 말보다 더 가슴 아팠을지도 모른다. 사랑 대신 중오가 무관심보단 악평이 오히려 누군가에겐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지금 난 아무라도 필요해. 나를 버린 사람이라도."
 
 
9화 막바지의 서해영의 말도 비슷한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닿을 수 없는 너의 무관심을 견디느니 차라리 가식이라도 필요하다고. 
 
 
하여튼 10화에서 전해영이 홀로 차를 몰며 박도경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래서 더 애틋하다. 여자가 우는 모습 꼴보기 싷다는 박도경의 말에 울면서도 억지로 웃는 모습을 항상 꾸며오던 그녀가 입을 가리고 그저 눈물만 흘리는 그 모습이 어쩌면 그녀 역시 새로운 시작점에 섰음을,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진 진실한 내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상처만 회복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상처만 회복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
 
 
누구 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후회없이 사랑했고 후회없이 꿈을 꾼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그로 인해 지금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그러나 만약 내려놓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미련과 후회가 남는다면 그것이 결국 지금의 발목을 잡는다는.
 
결혼식 당 일 부끄러움에 못 이겨 도망치는 것으로 박도경에게 복수한 그녀에겐 무엇이 남아 있을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박도경과 결국 헤어진 그 날을 지금의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2. 상실과 트라우마
 
사라지는 걸 인정하면 엄한 데 힘 주지 않는다고 말한 아버지는 그의 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인생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임을 알았으나 그 사실을 어린 박도경이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박도경은 말도 없이 떠나간 아버지가 소중했고 사랑했던만큼 더욱 원망스러워 나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악을 쓰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도경의 강박적인 소리에 대한 집착은 이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차적으로 보자면 이 에피소드를 사라지는 것 즉 죽음과 상실에 대한 박도경이 가진 트라우마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식 당일 나타나지 않는 전해영을 찾아 온갖 병원과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찾아다닌 그의 행동은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한 그의 아버지처럼 그녀가 어딘가에서 사고를 당해 오지 못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1년 뒤 전해영이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에게 '차라리 죽었어야 했어'라고 말했던 것은 박도경이 가진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거대한 트라우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박도경이 느낀 것이 배신감과 외로움,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치를 떨만큼 극심한 두려움이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파혼 당시의 일에 대해 가족 간에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오해영'이라는 이름 자체가 금기어가 된 그가 스스로 자신의 파혼 사실을 서해영에게 고백하고 그녀를 위로해주었다는 건 둘 다 똑같이 파혼을 당했다는 사실과 "내가 나갈께요. 그쪽이 나가면 버려진 기분일 것 같아."라는 그녀의 말이 그의 깊은 마음 속 어딘가를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공감, 쪽팔린 것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서해영의 용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박도경에게 말하는 서해영과 누구에게도 숨겨왔던 본심을 서해영에게 말했던 박도경.
 
3화의 그 때 두 사람이 과연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이었을까, 같은 사람이었을까. 생각해볼만한 흥미로운 부분이다.
 
 
3. 죄와 벌
 
 
이 에피소드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또 한가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상실에 대한 박도경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까지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좌우할만한 거대한 사건이었는데 꼴랑 하나만 있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보자. 좀 가혹한 이야기이지만 과연 성인이 된 박도경은 그 때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현재의 자신을 만든 근본적인 사건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사실 복선이라고 볼만한 장면은 이미 있었다. 4화에서 허지아 여사가 아들의 돈을 삥 뜯으러 왔던 장면을 보도록 하자.
 
 
허지아: "이 집도 찾아야 할 거 아냐~. 엄마가 도와주겠다고."
박도경: "엄마가, 엄마가, 엄마가! 그냥 내가라고 하지 왜 맨날... 엄마가... 그래요. 감정파는 거지. 기분 더럽게 죄책감 심어주면서."
 
 
허지아 여사가 스스로를 엄마라고 지칭하는 것에 대해 박도경은 그것이 죄책감을 심어주는 행위라고 발언한다. 아니, 엄마를 엄마로 부르지 그럼 뭐로 부름? 막,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 이런 거 아니잖아. 이 씬은 결국 가족 간의 관계에 뭔가 심대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화였다.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된 10화의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린 박도경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일이겠지만 그리고 박도경 본인에게는 상처로 다가오겠지만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 때 어린 박도경이 했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음을 알아챈 어린 박도경은 절벽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고 절벽 아래에 떨어져 누워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했다. 놀란 마음에 산을 뛰어 내려가 흔들어 보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박도경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논길을 따라 달린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도 아무도 만나지 못하자 다시 돌아가 천 위에 아버지를 옮겨 질질 끌며 차까지 모셔온다. 그리고 그 논란이 많은 '기어 중립' 상태에서 차를 밀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의 체력으로는 그 어느 것도 중과부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해가 지고 박도경이 완전히 지쳐 쓰러질 때쯤에 가서야 누군가의 차량이 다가왔고 아마 그 이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박도경의 아버지는 병원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이 때의 사건을 어른이 된 박도경은 어떻게 떠올릴까. 글쎄, 확신할 수야 없겠지만 아마 다음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차라리 아무나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뛰어야 했어. 멈추지 말고 달려야 했어.]
 
 
...하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다. 실로 가혹한 말이겠지만 어린 박도경의 행위는 오히려 아버지를 더 큰 위험에 밀어넣는 일이었다.
 
칼이나 날카로운 것에 찔린 사람은 함부로 칼을 빼면 안 된다는 것이 의학상식 중의 하나이다. 놀란 근육과 밀려들어간 피부가 오히려 출혈을 억제하기 때문에 함부로 칼을 뽑으면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발견해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장기가 어떤 뼈가 어디를 찌르고 어디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환자를 건드리는 것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한다. 교통사고 피해자를 꺼내다가 허리나 목을 건드리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가 있어났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절벽에서 떨어진 아버지를 옮기고 차에 실어 밀고 가는 행위는 오히려 아버지를 치료해서 구원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비록 어린 아이에게 그 책임을 묻는 사람이야 없었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지식이 쌓이고 그 때의 일에 대해 가능한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박도경은 아마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혹시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 말이다.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닌가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여탕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만난 동네누나가 반갑다고 달려가 포옹했다가 뺨을 맞고 여탕에서 울어제낀 기억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 때야 그저 맞아서 억울한 마음이었겠지만 다 커서 그 일을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들까.
 
허지아 여사에게 말했던 죄책감의 정체가 아마 이것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자신이 엄마를 혼자로 만들었다는 그 죄책감 말이다.
 
12번이나 돈을 뜯기면서도 결국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박도경은 어쩌면 그것을 아버지를 잃게 만든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한 어머니가 저렇게 된 건 결국 나 자신의 탓도 있으니 끝까지 안 된다고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4.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는가
 
 
10화에서 박도경은 아버지를 회상하며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린다. 마치 그 때 달리다가 멈추었던 자신을 탓하고 원망하듯이 말이다. 지금이라도 달리면 누군가를 만나서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것 마냥.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전해영은 극중에서 마라톤을 하고 클라이밍을 했는데 그 두 가지는 원래 박도경의 취미였을지도 모르겠다. 절벽에서 떨어진 끝까지 달리지 못해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 자신을 괴롭히는 방편으로.
 
하여튼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박도경은 결국 자리에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서해영에게 전화를 걸어 와달라고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뭐...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박도경에게 서해영이 가지는 의미가 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박도경에게 서해영이 가지는 의미?]
 
 
난데 없이 무슨 소리냐 싶으시겠지만 사실 10화의 에피소드와 연관되는 장면이 이전에 하나 있었다. 4화에서 허지아 여사에게 돈을 뜯기고 서해영이 그 사실을 다 들었다는 걸 알아챈 박도경은 화가 나서 장비를 챙겨 야경 소리를 녹음 하러 떠난다. 서해영은 민망함과 죄책감에 그의 뒤를 따라갔지.
 
그리고 높은 언덕, 멀리 한강이 보이는 그곳에서 박도경과 서해영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는 침묵이 싫었지만 침묵에서 위안을 찾았고 남자는 여자한테 짜게 굴지 말라는.. 호구처럼 돈을 뜯겼지만 자신은 딱히 나쁘게 보지 않았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
 
 
다시 복습하면 알겠지만 10화에서 아버지가 떨어지던 그 절벽과 4화에서의 그 언덕은 매우 유사하게 생겼다. 높은 절벽과 언덕, 강과 바다. 박도경은 그 때의 그 장소와 비슷한 곳에서 아버지를 추억한 것이다. 
 
 
허지아와의 일로 아버지가 떠올라 심란해진 박도경이 죄책감을 덜기 위해 찾아간 그곳에서 제멋대로 쫒아온 옆집여자가 남의 속도 모르고 던진 그 위안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녹음을 끝내고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으며 난데없이 "먹는 거 예쁜데. 헤어진 남자가 그랬다며 먹는 게 꼴 보기 싫어졌다고. ...먹는 거 괜찮다고."하고 말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부모에 대한 상념과 죄책감에 쓰라린 속을 서해영이 달래주었기에 박도경 역시 그녀가 현재 안고 있는 쓰린 속을 달래줄 위로를 던진 것이다. 술을 먹고 해장으로 국수를 후두룩 빨아대는 그녀에게 말이다.
 
옆집여자에게 기대하지 않던 위로를 받았던 그 일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박도경은 서해영의 생일을 일부러 챙겨주기도 하고 '있던 거야'하며 오르골을 선물해준다. 자장가가 실린 오르골. 오래된 타자기를 치며 전해영에게 '되게 고급스럽지 않냐? 너처럼'하고 말하는 것이 박도경이다. 그 오르골은 아마 박도경이 서해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물건이었을 것이다.
 
위로와 평안.
 
서해영이 자신의 아픔을 공감해준 박도경에게 끌렸듯이 박도경 역시 자신을 위로해준 그녀에게 고맙고 그래서 더 미안했을 것이다. 그 속도 모르고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잘 자요'하고 중얼거리는 그녀를 박도경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괴로움 속에서 아버지와의 일을 떠올리고 힘들어하던 그에게 그 순간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추측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와줘.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남자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부르자 앞뒤 재지 않고 달려오는 여자. "나 좀 안아주라"라는 부탁에 그 흔한 무슨 일이냐는 말도 없이 그저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여자.
 
무슨 일이든 무슨 상황이었든 상관없이 나는 너를 안아주겠다는 그 여자는 아마 박도경에게 세상 전부와 싸워서라도 지킬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누군가가 이렇게 해준다면 반드시 잡아라. 이런 여자 거의 없을 듯.
 
 
 
5. 추가 파트 - 왜 서해영은 회식자리(9화)에서 전해영에게 그렇게 했을까.
 
 
원래는 그냥 위의 단락으로 끊고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그 회식자리에서 서해영이 너무 피해망상 아니냐 캐릭터 붕괴 아니냐, 이해가 안 간다 이야기 하는 사람이 많아서 짧게 언급해보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캐릭터 붕괴이지만 동시에 아니다. 작가와 감독은 그 장면을 의도적으로 넣은 것이 분명하고 그들은 분명히 그것이 논란을 일으킬 것을 알았고 오히려 조장했을 것이다.
 
 
"딱 한 번만 밟고 끝내자. 내가 끝내줄께."
 
 
서해영이 전해영에게 이걸로 모두 청산하자며 하던 말이다. 사실 상황만 보면 서해영의 행동은 매우 무례하고 황당한 행동이다. 먼저 시끄럽다고 시비 걸고 결혼식 파혼 건으로 면박주고 나중엔 때리기까지 하겠단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주변인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지가 먼저 시비걸다가 이젠 완전 막장까지 가니 이쯤되면 주변에서도 도저히 옹호할 기분이 아니었을 것. 물론 팀원들이야 서해영의 예전 학창시절 이야기를 간간히 듣긴 했으니 일말의 이해는 했겠지만 그래도 한 번만 밟자고 했던 건 도저히 커버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서해영은 정말로 예전에 자기가 같은 이름이라는 피해를 당했던 사실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낸 것이었을까?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과거의 일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겠지만 더 중요한 동기는 아마 질투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박도경에게 자꾸 들이대는 전해영이 미웠던 것이다. 게다가 전해영이 박도경에게 전화를 걸어 탁구 운운하며 둘이 따로 만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니 더욱 열이 받았던 것. 정작 자신은 박도경이 헷갈리게 해서 미칠 지경인데!
 
박도경이 자신이 가해자이면서도 오히려 한태진에게 뻔뻔하게 한 대만 때리자고 했던 것과 서해영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오히려 한 번만 밟아보자고 했던 것은 과연 아무 연관이 없는 일처럼 보이는가.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제 잘못을 모르고 뻔뻔하다고. 근데 세상 일이라는 건 선의로 행한 일이 악의로 돌아오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도 없다.
 
거렁뱅이에게 동정심으로 적선을 해주었다가 그 돈으로 마약을 사서 강도살인을 저질렀음을 뉴스로 접한 사람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그들이 이기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책임을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를 섣불리 내리는 것도 과하다.
 
무엇보다 서해영과 전해영은 딱히 누가 누구의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구분지어서 말하기 어렵다. 전해영이 서해영을 때리라고 일진들에게 부탁한 것이 아니고 서해영이 스스로 맞을 짓을 한 것도 아닌만큼 이 일은 어쩌면 전적으로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까놓고 말해서 전해영이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에게 오해영을 차별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해영이 서해영에게 있어 의도적으로 행동하고 비난 받을 이유가 있다면 박도경에 관한 일 뿐인데... 사실 연적을 일일이 배려해가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나.
 
더더군다나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구분된 지금 전해영을 더욱 바닥으로 몰아가는 것도 딱히 좋은 태도는 아닐 것이다. 문자 그대로 시체에 총질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테니까.
 
 
이왕 서해영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담이고 추가로 흥미롭게 볼만한 내용을 첨언하자면 이 회식장면에서 서해영은 오른쪽 이마를 다쳤는데 박도경이 한태진에게 얻어 맞은 것은 오른쪽 눈이었다.
 
격정 키스씬 전의 몸싸움에서 서해영은 왼쪽 입술 아래를 다쳤고 박도경이 한태진에게 얻어 맞아서 다친 부위도 왼쪽 입술 아래이다. 어제 촬영장 사진으로 올라온 사진에서 박도경은 코를 다친 것으로 나오는데... 그 부위는 박도경과 서해영이 처음 카페에서 마주친 날 어깨빵을 당해 서해영이 다친 그 부위다.
 
박도경 사망설이 요즘 이상하게 나도는 것 같은데... 이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로맨틱 코미디이고... 극의 구성상 박도경이 사망하면 서해영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한 번 생각해볼 부분이다.
출처 평소에 썼던 것 짜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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