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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주사
게시물ID : panic_884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팔이파리
추천 : 19
조회수 : 3050회
댓글수 : 24개
등록시간 : 2016/06/13 0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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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솔직히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원했던 일은 아니다.
수의사로 작은 병원에 취직해 여자친구와 행복한 꿈을 꿀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시작은 터무니없었다.
10년 넘게 키워온 고양이를 안락사 시켜달라 부탁한 분은  일흔 넘은 할아버지였다.  
암이 번져 당신도 이제 한 두달이면 죽을 목숨... 
새까만 털에 녹색 눈이 아름다웠던 이 고양이 역시 노화로 시각과 청각을 잃었고 한 달이면 죽을 목숨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마지막까지 돌 볼 수 없기에 안락사를 부탁해 온 것이다.
처음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제가 돌보겠다고 회유해봤지만 자신이 죽은 후 그것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그냥 자기가 보는 앞에서 죽게 해달라고 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고, 난 할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마취제를 놓았다. 아이는 잠든듯 이내 깊는 잠에 빠졌다.
할아버지는 차마 염화칼륨 주사를 못 보겠다며 돌아섰다. 
정맥을 파고든 염화칼륨은 빠른 속도로 고양이를 평온하게 재웠다. 
할아버지는 니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가 너를 내 품에서 죽게 해서 다행이라며 마른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고물 판 돈을 모아 아이의 장례를 치렀다.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서둘렀다. 수의사가 되었지만 살리는 일보다 죽이는 일이 더 많은 이 직업에 회의를 느꼈고 결혼 후 안정을 찾으면 작은 팻샵이나 열 생각이었다.
결혼 후 3개월 쯤 지나 아내에게서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어느 아이의 정맥에 염화칼륨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할아버지를 길에서 다시 만났다. 관절이 굽히지도 않는 손가락으로 녹슨 카트에 폐지를 주워담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할아버지를 도왔다. 눈도 많이 어두워지셨는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폐지와 고철 합쳐 봐야 얼마 안 될 카트를 할아버지는 힘겨워했고 나는 카트를 고물상까지 갖다 주었다.
할아버니는 고맙다며 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내게 주었다. 나는 참담히 돌아섰고 할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오늘, 나도 좀 부탁헐게...
할아버지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물상 주인은 몇 그램을 기어이 깎아 3천원을 쥐어주고 또 오라며 빙긋이 웃었다. 할아버지는 주인에게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나는 병원으로 되돌아왔고 염화칼륨 주사액을 챙겼다.
고물상과 할아버지 집은 불과 50미터... 나는 그 중간에 차를 세우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움직였다.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기쁨일 수도 있었다. 나는 충분히 마지막 말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녹슨 철문을 천천히 열었다. 철문은 기쁘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그의 정맥은 이전에 분명히 보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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